소설리스트

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34화 (135/222)

134. 피에람(4)

이안의 접근을 괴한도 알아차렸다.

등을 돌린 괴한은 다짜고짜 허공에 팔을 한번 휘저었다.

콰아아아!

이안이 서 있던 바닥에서 불기둥이 솟구쳤다.

급하게 뒤로 물러난 이안은 쯧―하고 혀를 찼다.

뜨겁다.

샐러맨더가 뿜어내던 불꽃과는 확연히 다르다.

상대는 수준급의 화염 마법사였다.

“스텔. 부탁해.”

“응.”

스텔이 기도를 외자, 하얀 장막이 이안의 주위를 뒤덮었다.

이안은 다시 한번 땅을 강하게 밟아, 용수철처럼 앞으로 튀어나갔다.

‘일단 거리를 좁힌다.’

방금의 불기둥은 조금 위험하다.

저런 마법을 마음대로 사용하게 두면 안 된다는 게 이안의 계산이었다.

그리고 마법사를 가장 효과적으로 견제하는 방법은 바로 거리를 좁히는 것.

괴한은 다가오는 이안을 향해 연달아 손을 내저었다.

콰아아! 콰아아아!

불기둥이 연달아 솟아오르며 사방을 밝혔다.

하지만 이안은 그럴 때마다 아슬아슬하게 몸을 굴러 불기둥을 피해냈다.

스텔의 방벽이 열기를 막아주기에 가능한 묘기였다.

멈칫한 괴한이 중얼거렸다.

“이동 경로에 정확히 사용했거늘. 전부 다 피해 버리는군. 마치 어디에 마법을 쓸지 전부 보이는 것처럼.”

괴한은 달려오는 이안을 유심히 살폈다.

특이한 외모였지만 다른 무엇보다 저 눈이 은은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마치 밤하늘의 달처럼 말이다.

“신비한 눈이군…….”

순식간에 상황을 이해한 괴한은 곧바로 전략을 바꿨다.

이안을 상대로 큰 기술을 사용하는 건 비효율적이다.

괴한은 손을 휘저어 허공에 커다란 불덩어리를 만들어냈다.

이내 그 불덩어리는 수십 조각으로 쪼개졌고, 쪼개진 불은 롱소드의 모양으로 변해갔다.

순식간에 생겨난 불의 검 수십 자루가 허공에서 맴돌았다.

워낙 화려한 광경이라 달려가는 이안으로 하여금 절로 위축되게 만들었다.

‘씁. 실력이 보통 뛰어난 게 아닌데요.’

[집중해야 해요.]

이네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불의 검이 이안을 향해 쇄도해왔다.

그 궤적이 복잡하다.

모든 방위에서 시간차를 두고 날아오는 불의 검은 눈을 어지럽혔다.

그렇게 정신을 쏙 빼놓고는 때때로 불의 검이 급소를 향해 절묘하게 파고들었다.

마치 숙련된 검사 수십과 싸우는 기분.

게다가 그 검사들은 줄여도 줄여도 끝없이 다가온다.

저 뒤에선 괴한은 계속해서 불의 검을 날려오고 있었다.

‘씁. 곤란한데.’

사실, 버티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절묘하게 날아오는 불의 검을 모조리 막아내다니.

괴한조차 이안이 보여주는 무위에 당황할 정도였다.

공격을 시작하고 한 호흡 이내에 끝날 줄 알았던 전투가, 벌써 수십 호흡 동안 이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체력전으로 끌고 갈까?’

상대는 화염 마법사다. 싸움이 길어질수록 평정을 유지하기 힘든 이들.

하지만 이안은 이내 그 생각을 지워 버렸다.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고, 밑천이 어디까진 지도 모르는데 체력전을 벌이는 건 그냥 도박이야. 폭주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게다가 저 괴한이 또 어떤 수를 숨기고 있을지 모르는 일.

이안은 제자리에서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하게 놔두느니, 직접 승부수를 던지기로 했다.

“스텔! 그거를 써!”

이안이 뒤쪽을 향해 외쳤다.

두루뭉술한 말이었지만 스텔은 곧장 알아듣고 기도를 올렸다.

파앗!

빛무리가 하늘로 솟구쳐 오르더니, 이내 비가 되어 지상에 쏟아져 내렸다.

불꽃을 꺼트리는 치유의 비.

이 놀라운 기적에 괴한이 당황했다.

“무슨……!”

물론, 괴한의 불꽃을 꺼트릴 만큼 거센 비는 아니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약하게 한다면 그걸로 충분.

이안은 온몸의 힘을 한계까지 끌어모아 괴한을 향해 포효했다.

“꺼―! 져―! 라―!”

영혼을 울리는 포효가 퍼져나갔다.

그 외침에 이안을 향해 날아오던 불의 검이 잠깐이나마 흩어졌다.

숙련도가 높지 않아 겨우 만들어낸 찰나의 시간.

하지만 찰나만으로도 충분하다.

이안은 품에서 활공하는 단검을 꺼내 괴한을 향해 던졌다.

당황한 괴한은 다급하게 방어를 준비했다.

괴한의 몸 주위로 급조한 화염의 벽이 만들어졌다.

평범한 단검이라면 곧바로 녹아 버릴 정도의 열기.

하지만 활공하는 단검은 평범한 단검이 아니다.

푹!

화염 벽을 돌파해낸 단검은 기어코 괴한의 어깻죽지 날아가 박혔다.

그나마 괴한이 마지막 순간 몸을 비틀어서 어깨에 박힌 거지, 아니었다면 심장에 박혔을 것이다.

“큭!”

신음을 흘린 괴한은 곧바로 단검을 뽑아 집어던지고는 뒤로 돌아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안은 급하게 그 뒤를 따라가려 했지만 이내 사방에 솟아나는 불기둥에 더는 추격할 수 없었다.

“쯧.”

아쉬움에 혀를 찬 이안은 단검을 다시 회수한 뒤,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을은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최근. 샐러맨더의 피해가 증가하고 있다고 했었죠?’

[예. 하지만 지금 보면…… 범인은 샐러맨더가 아니었던 모양이네요.]

마을을 불태우고 다니는 화염 마법사.

심지어 그 수준 또한 매우 높다.

이안은 처참하게 불탄 마을을 보며 생각했다.

‘역시. 빨리 피에람으로 가야겠어요.’

이안과 스텔은 다시 마차에 올랐다.

***

“여보. 이것도 드셔보세요.”

“허허. 고마워.”

아리사 피에람이 음식을 집어 로드릭의 접시 위에 놓아주었다.

로드릭은 음식을 한입에 삼키며 호들갑을 떨었다.

“당신이 주니 더 맛있는 것 같아.”

“이이도 참…….”

이제 나이도 있건만 부부는 여전히 뜨겁다.

평소 같았으면 눈꼴시렵다는 듯, 플로라도 한마디를 얹었을 것이다.

그러면 마치 셋은 미리 정해두기라도 한 것처럼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겠지.

정말이지 그림에 그린 듯한 행복한 가정이다.

지금까지 플로라는 그렇게 믿어왔다.

“…….”

플로라의 분위기가 평소와 다른 걸 눈치챈 것일까.

로드릭이 플로라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플로라. 혹시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니?”

“……아니요.”

“저번에 친구한테서 편지 왔을 때는 그렇게 기뻐하더니…… 혹시 친구와 얘기가 잘 안 됐니?”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몸이 좀 안 좋네요.”

“저런. 아무래도 성인식을 앞두고 너무 무리해서 수련한 것 같구나. 몸 관리 잘하렴. 필요한 게 있다면 꼭 아빠한테 말하고.”

자상한 로드릭의 말에 플로라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딸의 시큰둥한 반응에 로드릭은 난처한 듯, 아리사와 눈을 마주쳤다.

고개를 저은 아리사는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요즘 샐러맨더들의 피해가 상당히 큰가 봐요. 마을 전체가 불타는 일이 번번이 일어난다면서요?”

그 얘기에 플로라가 흠칫 고개를 들었다.

로드릭이 아리사의 말에 답했다.

“그래. 여름에 샐러맨더들이 기승을 부리는 건 늘 있는 일이지만, 올해는 특히 더 심한 모양이더군.”

“오스트 화산에 문제가 생긴 걸까요?”

“그럴 확률이 높아. 일단 마탑에 조사 의뢰는 해놨으니 금방 결과가 나오겠지.”

얘기를 듣던 플로라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정말 샐러맨더의 소행이 맞나요?”

“무슨 뜻이니?”

아리사의 의문에 표정을 굳힌 플로라가 말했다.

“마을 전체가 불탔대요. 제법 큰 마을도요. 근데 살아남은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이건 이상한 일이잖아요.”

“얘야, 샐러맨더는 매우 흉포한 괴수란다. 게다가 다리가 여섯 개라 몹시 빠르지. 생존자가 없어도 이상하지 않단다.”

“그래도요…….”

“혹시 그게 걱정되어서 기분이 안 좋았던 거니?”

플로라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수그렸다.

그 모습에 로드릭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벌써부터 영지민들을 걱정하다니. 우리 플로라는 좋은 영주가 될 것 같네. 그래. 꼭 샐러맨더의 소행이라고 단정 지을 수만은 없겠지. 이 아빠가 한번 제대로 조사해보마. 이제 좀 안심이 되니?”

플로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잠시 망설이더니, 로드릭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수련을 좀 도와주세요.”

로드릭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오오! 우리 딸이 도움을 요청하다니! 몇 년 만이니!”

“웬일이니?”

“그냥요. 잘 모르는 부분이 있어서요. 밤늦게까지 수련할 것 같아서 죄송하지만요.”

“걱정 마렴! 우리 딸을 위해서라면 이 아빠는 사흘 밤을 새운다고 해도 멀쩡하단다!”

그제야 플로라의 입가에는 미소가 돌아왔다.

하지만 평소의 천진난만한 미소가 아닌, 마지못해 지은 억지스러운 미소였다.

***

긴 역사를 자랑하는 피에람은 번화한 도시였다.

지금껏 여러 대도시를 여행해본 이안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좀 다르긴 하네.’

피에람은 마법이 발달한 도시다.

도시 한구석에 솟아 있는 마탑. 거리 곳곳에 설치된 신비한 장치들.

가끔 대로를 분주히 거니는 고깔모자를 쓴 마법사들.

성도가 좀 더 고즈넉한 분위기였다면, 이곳은 현대적인 느낌이 물씬 풍겼다.

상황이 여유로웠다면 도시를 돌아다니며 구경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우선 피에람의 저택으로 가고 싶었다.

‘미리 편지를 보내긴 했는데, 설마 문전박대하진 않겠지? 왠지 걔 성격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 같은데.’

미리 찾아간다고 편지를 보내긴 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통보를 한 것뿐이고, 플로라가 허락했다는 건 아니다.

나름 친하다고 생각해서 다짜고짜 찾아가는 것이기는 하지만 사람 간의 관계가 으레 그렇듯.

플로라는 조금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뭐. 정 안 되면 일단 교단에서 좀 머무르지.’

설령 문전박대를 당한다 해도, 피에람 가문에서 벌어지는 이벤트는 포기할 수 없다.

그걸 포기한다는 건 곧 플로라를 포기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생각을 정리하던 이안은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옆을 보았다.

스텔이 이안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래?”

“피에람. 아는 사람?”

“아. 그러고 보니 말을 안 했던가?”

생각해보니 피에람의 저택으로 간다는 말만 했지, 그 외에는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을 깜빡한 자기도 자기지만 그걸 이제야 물어보다니, 참 스텔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 플로라 피에람이라는 애가 있거든? 기가 막힌 재능을 가진 화염 마법사지.”

“……여자야?”

“이름 들으면 모르겠어? 당연히 여자지.”

스텔의 눈매가 살짝 좁아졌다.

“무슨 사이?”

“예전에 코르디스에서 함께 수학하던 학우. 아니, 학우는 너무 딱딱한가. 친구라고 할 수 있지.”

“친구?”

스텔이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자주 들어본 단어였지만, ‘친구’라는 개념은 스텔에게 너무 생소했다.

친구가 무엇인지 설명해달라는 눈빛에 이안은 난처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친구가 뭐냐면…… 그냥 같이 밥 먹고, 같이 다니고, 같이 얘기하고, 함께 있으면 마음 편하고. 뭐 그런 거야.”

“그럼 이안과 나도 친구?”

“그게 그렇게 되나? 뭐, 까짓거 오늘부터 친구하지.”

그 말에 스텔의 얼굴이 환해졌다.

어디까지나 평소 스텔의 기준일 뿐, 남들이 봤을 때는 무표정할 뿐이었지만.

“어쨌든. 친구니까 가서 만나면 너도 잘 좀 대해줘. 친구의 친구는 친구나 다름없으니까.”

“……그래?”

“그럼. 일단 문을 열어줄지는 모르겠지만.”

친군데 왜 문을 열어줄지 고민하는 걸까. 그 모순적인 말에 스텔이 고민하는 사이.

이안은 마차를 몰아 피에람의 저택으로 향했다.

저택을 둘러싼 성벽 앞에 도착한 이안은 정문을 지키고 선 경비병에게 말을 걸었다.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데요.”

“이곳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약속을 잡고 다시 와주십시오.”

정중하게 막아 세우는 경비병에게 이안이 말했다.

“플로라의 친구가 왔다고 전하면 될 겁니다.”

“……아가씨의 친구 말이십니까?”

경비병은 수상쩍은 눈으로 이안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플로라의 친구라고 하기에는 생김새나 차려입은 모양새나 영 아니었다.

이안을 사기꾼이나 잡상인쯤으로 결론을 내린 경비병은 같은 말을 반복했다.

“저는 방문객에 전해 들은 바가 없습니다. 다음에 약속을 잡고 다시 와주십시오.”

“아니. 그러니까 얘기 좀 전해달라니까요.”

“다음에 와주십시오.”

이런 경우가 가장 난감했다.

말이 안 통하는데 또 태도는 공손하고. 자기 일을 성실히 하는 거라 화를 낼 수도 없다.

그렇게 어떻게 해야 할지 이안이 고민하던 그때.

“어머. 무슨 일인가요?”

플로라와 마찬가지로 붉은 머리칼이 탐스러운 귀부인.

수행원들을 데리고 다가온 아리사가 호기심을 빛내며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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