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피에람(5)
사정을 설명하자 아리사는 흔쾌히 이안을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그것도 모자라, 아리사는 마차에 직접 올라타 이안의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플로라를 생각하면 당연히 부모도 권위주의와 귀족주의가 가득할 줄 알았는데, 아리사에게 그런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리사는 폭풍처럼 질문을 쏟아냈다.
“어머 어머. 플로라의 친구가 설마 남자일 줄 몰랐네요. 어디서 만난 사이죠? 이름은?”
얼굴을 들이미는 아리사에 밀려, 이안은 조금 움츠러들며 답했다.
“하하…… 이안이라 합니다. 코르디스에서 같은 반이었고요.”
“아. 같은 학우였군요. 그러면 딸 아이의 학교생활을 좀 들려주세요. 좀체 부모에게는 그런 얘기를 않으려고 들어서요. 아이가 잘 지내던가요?”
“음.”
이안은 머뭇거렸다.
코르디스를 떠난 지 벌써 시간이 꽤 흘렀지만, 왠지 플로라가 어떻게 생활할지 눈에 보였다.
단지 그걸 부모에게 말할 만한 내용이 아니라 문제였지.
하지만 그 머뭇거림만으로도 충분한 답이 된 듯했다.
아리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역시, 제 예상대로인가 보군요.”
“아저도 이제는 학생 신분이 아니라, 확실하지는 않아요. 그래도 플로라는 능력도 있고, 더 나아지려는 욕망도 있어요. 그 신분과 재능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다가가지는 못해도, 다들 멀리서 선망하고 있을 겁니다. 금방 친한 사람들도 생길 거고요…… 아마도요.”
이안이 어떻게든 분위기를 수습하자, 아리사가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훔쳤다.
당황한 이안이 물었다.
“제가 뭔가 실수라도……?”
“아뇨. 그저 말을 너무 예쁘게 하시길래…… 이렇게 변호해줄 수 있는 좋은 친구가 플로라에게 생겼다는 게 너무 기쁘네요. 솔직히 말해 친구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당연히 플로라가 창피해서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아. 예.”
대체 이 부모는 딸을 어떻게 평가하는 걸까.
하지만 플로라의 행동거지를 보면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어머니네요. 딸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어요.]
‘오히려 이런 자상한 부모 밑에서 오냐오냐 자라가지고 애가 그렇게 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요.’
아리사는 마차가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수많은 질문을 쏟아냈다.
이안은 성실히 대답하면서도 주위를 유심히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역시 오래된 명문가라 그런가, 엄청 넓네.’
정원. 호수. 안뜰. 숲.
그 모든 게 다 있을 정도로 부지가 엄청나게 넓었다.
다 둘러보려면 꼬박 하루를 걸어 다녀도 다 못 볼 정도였다.
중간중간 고풍스럽게 서 있는 저택들도 눈에 들어왔다.
피에람 가문의 방계들이 주거하는 저택들이라고 아리사는 설명했다.
“넓네요. 왠지 신비로운 것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아요.”
슬쩍 떠보듯이 하는 말에 아리사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호호. 다들 그런 기대감을 품고 있더라고요. 오래된 마법사 가문이니, 저택에 엄청난 비밀이 잠들어있을 거라고 말이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건 없어요.”
“그거 아쉽네요. 혹시 드래곤이라도 있을까 기대했는데.”
“아. 피에람 가문의 신화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피에람의 시조가 드래곤에게 선택받아 그 재능을 선사 받았다는 이야기다.
이제 와서는 믿는 사람도 별로 없는 전설을 이안이 얘기하자, 아리사가 은은하게 미소지었다.
“저희는 드래곤 자체가 허구의 존재라 생각하는 쪽이라서요. 이안 님은 드래곤을 믿으시나요?”
“예.”
이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냐하면 실제 게임에서도 드래곤이 있었으니.
“낭만적인 분이시군요. 하긴, 그러니 대륙을 떠돌아다니며 여행을 하는 것이려나요.”
“뭐. 그런 셈이죠.”
이안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가문의 비밀에 대해 슬쩍 떠봤지만 아리사의 영혼 상태는 큰 변화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마음을 잘 다스리는 걸까.
그 뒤로 아리사는 또 한참을 플로라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얘기했다.
몇 살부터 마법을 깨우쳤다느니, 한때 사춘기가 와서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느니, 몰래 술을 먹고 취해서 난동을 부렸다느니.
부모로서 사랑이 느껴지는 건 좋았지만 조금 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안은 기계적으로 대답하며 아리사의 얘기를 흘려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떠들던 아리사는 뒤편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그제야 자기 실수를 깨달았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이안 씨랑 대화가 너무 즐거워서 신경을 못 썼네요. 저쪽에 아름다우신 분은 성함이……?”
“스텔.”
“이라고 합니다.”
스텔의 예의 없는 단답에 이안이 서둘러 이어 말했다.
“교단의 사제로 신성을 다룰 수 있죠. 지금은 여행을 함께 하는 사이입니다.”
“친구.”
“응?”
스텔이 이안을 빤히 쳐다보았다.
시선 속에 담긴 뜻을 읽어낸 이안이 다시 말했다.
“여행을 함께하는 친구입니다.”
“어머. 교단의 사제셨군요. 이렇게 아름다운 사제분이 함께라니…… 플로라의 반응이 기대되네요. 어서 플로라를 보러 가죠! 분명 수련장에 있을 거예요!”
이안은 왜인지 갑자기 의욕을 보이는 아리사가 가리키는 방향대로 마차를 몰았다.
피에람에는 마법적인 훈련을 위한 수련장이 여러 개가 있었는데, 지금은 아마 외부 수련장을 사용하고 있을 거라고 아리사가 설명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수련장에 가까워지자 강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콰광!
―히히힝!
“워워.”
놀란 말들을 진정시키며 이안은 생각했다.
‘이런 무식한 폭발이라면 플로라가 확실하긴 하네.’
아리사와 이안, 그리고 스텔은 마차에서 내려 수련장 쪽으로 걸었다.
플로라는 로드릭의 조언을 받으며 수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셋은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실력이 많이 늘었네요. 불꽃을 제어하는 솜씨가 아주 뛰어나요.’
[네. 하지만…….]
이네스가 말을 흐리자, 이안이 물었다.
‘왜 그러시죠?’
[음. 기분 탓일지 모르겠지만, 불꽃이 조금 떨리고 있어요. 무언가 걱정거리라도 있는 걸까요?]
듣고 보니 플로라의 불꽃은 조금 불안정한 것 같기도 했다.
게다가 플로라는 하늘을 향해 연달아 큰 마법을 뻥뻥 터트리곤 했다.
마치 답답한 속마음을 풀기라도 하듯이.
그 옆에 선 로드릭은 손뼉을 치며 기뻐하고 있었다.
“잘한다 우리 딸! 아빠가 20살 때도 이런 훌륭한 불꽃은 만들지 못했어! 로잘리아 님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을 재능일 거다!”
팔불출다운 모습에 볼멘소리를 내뱉으려던 플로라는 그제야 자기를 보는 시선을 알아채고는 고개를 돌렸다.
“엄마? 그리고…….”
플로라와 이안이 눈을 마주쳤다.
이안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당황하던 플로라가 다시 고개를 훽 돌려 버렸다.
이안은 머쓱한 얼굴로 아리사에게 말했다.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당황한 것 같네요.”
“글쎄요. 단순히 부끄러운 게 아닐까요?”
“그 플로라가요? 설마요.”
멀리서 허둥대던 플로라는 수건을 들어 급하게 땀을 닦은 뒤, 이쪽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안이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 반갑다?”
“언제 올지 미리 얘기했어야지!”
“온다고 편지했잖아.”
“오늘 온다고는…… 휴. 번거롭게 왜 찾아온 거야. 나는 엄청 바쁜 몸이라고.”
귀찮다는 듯이 말하는 플로라를 보며 아리사가 미소지었다.
“어머. 왜 말을 그렇게 하니. 편지를 받고 그렇게 기뻐하더니.”
“……그런 적 없어요.”
아리사를 향해 눈을 한번 흘긴 플로라는 턱을 치켜들고, 한껏 으스대며 말했다.
“뭐. 이미 찾아왔다면 어쩔 수 없지. 손님을 내쫓았다가는 가문의 명성에 누가 되니까. 내 호의에 기뻐하도록…… 뒤에 누구야?”
플로라는 경계 가득한 얼굴로 스텔을 가리키며 말했다.
설마 이안이 동행을 데려올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 스텔이라고. 나랑 여행을 함께 다니는…….”
“친구.”
“그래. 친구야. 그 단어가 엄청 마음에 들었나 보네.”
이안이 스텔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왜인지 조금 언짢아 보이는 플로라가 되물었다.
“그러니까 여행을 함께 다닌다는 거지? 그것도 단둘이.”
“그런 셈이지.”
무언가 불만스러운 게 있는지, 플로라는 이안과 스텔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미묘한 분위기에 아리사가 곤란해하던 그때, 뒤따라온 로드릭이 끼어들었다.
“이거, 귀한 손님이 오셨군. 로드릭 피에람. 피에람의 가주를 맡고 있다네. 플로라의 친구라고 했나?”
“아. 이안입니다.”
청해오는 악수에 이안은 오른손을 내밀려고 하다, 로드릭이 왼손을 내밀었다는 깨닫고 급히 손을 바꿨다.
로드릭이 멋쩍게 웃었다.
“하하. 이해해주게. 잠을 잘못 잤는지, 오른쪽 어깨가 잘 안 올라가서 말이야.”
이안도 똑같이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마주 잡았다.
마법사 특유의 부드러운 손이었다.
‘이 사람이 피에람의 가주. 평범한 팔불출처럼 보이지만 가주답게 엄청난 실력의 마법사.’
로드릭은 초인의 영역에 들지는 못했다.
그는 아직 젊었고, 재능은 피에람 가문의 평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피에람의 평균은 곧 수준급을 의미한다.
친절한 미소를 띄운 로드릭이 마주 잡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좋은 손이야. 검사인가? 내가 검의 전문가는 아니라도, 자네의 실력이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건 알 것 같네.”
“과찬입니다. 그런데…….”
이안은 물끄러미 로드릭을 쳐다보며 물었다.
“혹시 저희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던가요?”
로드릭에게서는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단순한 감일 뿐이지만, 왠지 어디선가 마주친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이안의 질문에 잠시 기억을 더듬는지 눈을 감았던 로드릭이 고개를 저었다.
“아닐 것 같군. 자네처럼 특징적인 외모라면 잊어버릴 리는 없으니 말이야.”
“하긴. 그렇겠군요.”
지극히 맞는 말이었다.
이안은 좋든 싫든 눈에 띄는 외모.
게다가 이안이 지금껏 지나온 길을 생각해보면, 로드릭과 접점이 있기도 힘들었다.
분위기를 환기하듯, 로드릭이 손뼉을 짝― 하고 쳤다.
“자. 날도 더운데 어서 들어가자고. 오늘 저녁은 주방장에게 말해 특별히 신경 쓰도록 해야겠어.”
그렇게 말한 로드릭은 앞장서서 걸어나갔다.
그 뒤를 따라 걷던 플로라가 가만히 서서 로드릭의 등을 보고 있는 이안에게 물었다.
“뭐해? 안 따라오고. 아빠한테 뭐 할 말 있어?”
“……아무것도 아니야.”
이안도 뒤따라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여전히 시선은 로드릭의 등에서 떼지 않은 채였다.
***
“핍!”
“와! 엄청 귀여워요!”
“이제보니 자네는 정령술로 코르디스에 입학한 거였군!”
천장 근처에서 부드럽게 비행하는 호크를 보며, 로드릭과 아리사는 연신 호들갑을 떨어댔다.
이안이 굳이 호크를 소환한 이유는 피에람 부부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딸의 친구라고 데려온 게 검은 머리 검은 눈을 가진 수상쩍은 청년이니, 내색은 안 해도 저 둘이 얼마나 걱정이겠는가.
이럴 때 호크는 참 유용하다.
정령술은 워낙 신비한 능력이기도 하고, 호크의 귀여운 생김새는 호감을 사기에도 좋다.
플로라도 날아다니는 호크를 보며 입을 헤― 벌리며 허공을 손으로 휘젓고 있었다.
호크를 만져보고 싶다는 의지를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이안은 호크를 불러내, 손에 앉힌 뒤. 플로라에게 내밀었다.
“만져봐.”
꿀꺽.
마른침을 삼킨 플로라가 조심스럽게 호크에게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손가락은 호크의 몸통으로 쑥 들어갔다.
화들짝 놀란 플로라가 손가락을 뒤로 뺐다.
“빛의 정령이라 만지지는 못해. 아직은.”
“아직이라면, 나중에는 가능하다는 거야?”
“아마도?”
플로라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 당장에라도 호크의 깃털을 쓰다듬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다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로드릭은 흐뭇하게 웃었다.
“이렇게 훌륭한 친구를 두고…… 언제 우리 플로라가 이렇게 컸을까. 기쁘면서도 섭섭한 이 기분은 또 뭘까.”
“주책은…… 이제 플로라는 곧 성인식도 치르잖아요. 어엿한 어른이라고요?”
성인식이라는 말에 이안이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 성인식이 언제인가요?”
“음? 아아. 다음 주라네. 이제 일주일도 안 남았군.”
“그렇군요.”
이안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정확히 시간에 맞춰 온 것 같군.’
플로라의 성인식.
그날은 피에람의 이벤트가 벌어지는 당일이며, 플로라가 타락해 적이 되거나 아군이 되는 중요한 분기점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