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36화 (137/222)

136. 피에람(6)

밤.

몰래 방을 빠져나온 이안은 복도를 거닐었다.

구름이 달을 가려 저택은 칠흑같이 어두웠지만, 크게 앞을 보는 데 문제는 없었다.

이네스가 물었다.

[그러니까, 이안의 생각은 마을을 불태운 게 피에람 일가의 짓이라는 건가요?]

‘예. 생각해 보면 이 근처에서 그만한 화염 마법사는 마탑 소속이거나 피에람 가문의 일원 아니겠어요?’

[……무슨 득이 있어서 그런 짓을 하는 걸까요.]

‘글쎄요.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저택의 지하에는 악마가 잠들어 있다는 거예요. 그런 걸 가둬두는 사람들이니 제정신은 아니겠죠.’

피에람 가문의 성인식은 나이가 찬 가문의 일원을 악마와 단둘이 대면시키는 것이다.

게임에서 플로라도 악마와 마주한다.

그때, 악마는 힘을 주겠다고 속삭이며 플로라를 유혹한다.

거기서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뉜다.

플레이어가 플로라의 호감도를 충분히 쌓았다면 플로라는 악마의 제안을 거절하고, 악마와의 전투에 돌입한다.

반대로 충분하지 못하다면, 악마에게서 엄청난 힘을 얻고 타락해, 플레이어를 공격한다.

지금의 상태로 봐서 호감도와는 별개로, 플로라의 성격은 예전 같지 않고 성숙하다.

걱정하지 않아도 유혹을 잘 이겨낼 것 같았다.

‘하지만 굳이 그런 경험을 시킬 이유는 없겠지.’

가문에 대한 긍지로 똘똘 뭉친 플로라다.

가문의 추악한 면을 본다면 플로라가 받는 충격은 작지 않을 것이다.

이안은 몰래 지하로 통하는 입구를 찾은 뒤, 악마를 처리할 생각이었다.

이네스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안 역시 그 아이를 아끼는군요. 마음의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이렇게 위험을 감수하고.]

‘그렇다기보다는 쓸데없는 위험은 감수하지 말자는 취지지요. 플로라의 마음이 망가져 버려서 예전의 스텔처럼 마법이라도 못 쓴다면, 곤란하거든요.’

이안의 시치미에 이네스는 싱긋 웃었다.

[솔직하지 못하네요. 하지만 이안. 이안이 플로라 양을 어린애로 보는 건 이해해요. 이안은 지금의 겉모습과 달리 나이가 꽤 있으니까요.]

‘200년을 살아온 이네스 님보다야…….’

농을 건네려던 이안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순간 이네스가 지었던 살벌한 표정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네스는 여전히 미소를 유지하며 물었다.

[무슨 말 했나요?]

‘아뇨.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그래요. 어쨌든, 제가 말하고 싶은 건 플로라 양은 이제 어엿한 어른이라는 거예요. 설령 상처받을지라도, 플로라 양은 가문의 비밀을 알 권리가 있어요.]

이네스의 말을 잠시 곱씹던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도 맞네요. 하지만 비밀을 알아야 한다 해도, 더 좋은 방법이 있을 거예요.’

말을 마친 이안은 은밀히 1층 복도를 거닐었다.

가끔 마법적인 방범 장치들이 교묘하게 설치되어 있었지만, 이안은 가뿐히 피해낼 수 있었다.

이안은 걸음을 옮기며 고민했다.

‘지하실을 찾으려면 바닥과 벽을 모조리 두드려 봐야 하나. 게임에서도 제대로 묘사를 안 해서 영 찾기가 쉽지 않네.’

마땅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이안은 수상한 곳을 하나하나 모조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안은 방 하나를 발견했다.

주위를 잠시 둘러본 이안이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여기는…….’

집무실이었다.

양측 벽에는 책이 가득 꽂힌 벽장이 서 있었고, 방 중앙에 있는 탁자 뒤에는 피에람 영지의 지도가 큼지막하게 걸려 있었다.

이안은 살금살금 걸어 집무실을 살폈다.

‘플로라의 아빠가 평소 여기서 일을 한다 이 말이지.’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안은 처음 로드릭을 본 순간부터 알 수 없는 꺼림칙함을 느꼈다.

영혼을 꿰뚫어보고 싶었지만, 화염 마법사라 그런지 영혼에서도 불꽃이 일렁여 그 속내를 읽기도 힘들었다.

‘한번 조사해 보자고.’

이안은 조심스레 집무실을 살폈다.

이안이 가진 월안은 신비를 감지하는 데에는 탁월하지만, 기계식 함정이나 장치는 간파해 내기 힘들었다.

한 걸음 내딛는 것도 신중히 해야 했다.

‘보자. 벽장에는…… 좋은 아빠가 되는 법? 화목한 가정을 꾸리기 위한 가장의 100가지 노력? 딸에게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

[역시나 가정적인 사람이네요.]

그 비슷한 책들이 한쪽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반대편에는 마법 관련 서적이 꽂혀 있었다.

특별히 수상쩍거나 악마와 관련된 서적은 없었다.

‘뭐, 있더라도 좀 더 잘 숨기겠지만.’

다음으로 살핀 건 탁자 위다.

대영지를 다스리는 영주답게 보고서가 산처럼 쌓여 있었지만…… 역시 수상쩍은 건 없었다.

‘역시 여기를 뒤지는 건 시간 낭비였나.’

작게 한숨을 쉬며 머리를 긁적이던 이안의 시야에 문득, 벽에 걸린 큼지막한 지도가 들어왔다.

지도 곳곳에는 도시와 마을을 표현한 푸른 점이 찍혀 있었다.

하지만 가끔, 희미하게 붉은색으로 ‘x’ 자가 표시된 곳도 있었다.

이안은 그 x 자들을 유심히 살폈다.

‘여기가 내가 통과해 온 길이고. 그렇다면 이 x 자는…….’

그때였다.

이안의 예민한 감각이 발소리를 감지했다.

발소리는 똑바로 이곳을 향하고 있었다.

‘이크.’

이안은 서둘러 주위에서 숨을 만한 곳을 찾았다.

하지만 탁자 아래를 제외하면 도무지 숨을 만한 곳이 없었다.

‘너무 뻔한 곳에 숨고 싶지는 않지만……!’

이안은 황급히 탁자 아래에 수그리고 들어갔다.

그와 거의 동시에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

발소리의 주인. 로드릭은 문을 연 뒤, 잠시 그 자리에서 서서 집무실을 둘러보았다.

그는 손 위에 피워낸 작은 불꽃의 빛에 의지해 천천히 벽장으로 걸어갔다.

로드릭은 꽂혀 있는 책의 모양새를 유심히 살폈다.

“흠.”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걸까? 로드릭이 미간을 좁혔다.

이윽고 그 발걸음은 탁상 쪽으로 향했다.

뚜벅. 뚜벅.

발소리가 점점 다가왔다.

이안은 숨을 죽였다.

긴장으로 가슴이 뛰었다.

‘어떻게 하지?’

우연히 길을 잘못 들었다고 하면 넘어가 줄까?

아니.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이다.

정보를 빼내기 위해 영주의 집무실에 침입한 첩자쯤으로 여기겠지.

‘안 돼. 그랬다가는 큰일이야. 남은 방법은…….’

얼굴을 가리고 돌파해 내는 것.

이 역시 쉽지는 않아도 가만히 앉아서 들키는 것보다는 나았다.

이안은 습관적으로 성검의 손잡이를 쥐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나저나 이 밤중에 집무실은 왜 찾아온 거야.’

다가오던 발소리가 탁상 바로 앞에서 멈췄다.

로드릭이 양손을 탁자 위에 올렸다.

그러고는 벽에 걸린 지도를 유심히 살폈다.

이안은 들키지 않기 위해 숨 쉬는 것마저 멈췄다.

“…….”

체감상으로 길고 긴 시간이 흘렀다.

이 시각에 영지의 지도를 보며 대체 무엇을 고민하는 걸까.

그러다 로드릭이 탁상에서 손을 뗐다. 이안은 로드릭이 그대로 침실로 돌아가길 바랐다.

하지만 로드릭은 탁자에 앉으려는 듯, 천천히 더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의자를 잡아당기려 하고, 이안이 뛰쳐나갈 준비를 하던 그 순간.

콰아아앙―!

커다란 폭발음이 저택을 흔들었다.

“플로라……!”

작게 중얼거린 로드릭은 곧장 집무실 밖으로 달려나갔다.

“…….”

잠시 눈치를 살피던 이안이 살금살금 기어 나왔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후아. 이번에는 진짜 조마조마했네요.”

[다음부터는 좀 더 신중히 행동해야겠죠?]

“예…… 그나저나 방금 그 폭발은 역시 플로라가 만든 거겠죠? 이 밤중에 일부러 터트렸을 리는 없고…… 저도 가봐야겠어요.”

로드릭이 열어 놓은 집무실 문으로 이안도 달려 나갔다.

***

화염 마법사는 가슴에 불꽃을 품고 있다.

플로라의 가슴에도 불꽃이 있다.

그 불꽃은 다른 그 어떤 불꽃과 비교해도 화려하고, 밝고, 뜨겁다.

그야 당연하다.

플로라는 피에람의 일원이니까.

그녀의 재능, 외모, 그리고 이 불꽃도 전부 가문에서 물려받은 것이다.

플로라에게 가문이란 곧 그녀의 자부심이자 전부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실력을 키우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

언젠가 가문의 이름을 드높인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더 성장할 필요가 있었다.

그녀의 실력이 일취월장할수록 가슴속 불꽃의 크기도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불꽃이 커질수록 더 제어하기도 힘들어졌다.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하던, 화염 마법사의 고충이자 단점을 뼈저리게 체감했다.

이 불꽃을 더 키워 나가는 게 맞을까? 더 커졌다가는 내 마음과 몸을 완전히 태워 버리는 게 아닐까?

그런 의문을 가질 때.

처음으로 불꽃이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걱정하지 마. 나는 언제나 네 편이니까.]

플로라의 가슴속 불꽃은 언젠가부터 그녀에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당황했다.

불꽃이 말이라니?

자기가 미쳐 버리기라도 한 걸까?

어린 플로라는 부모에게 이 문제에 대해 상담했다.

로드릭은 그런 플로라의 머리를 자상하게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피에람에게는 당연한 일이야. 너무 당황하지 말렴.”

“아빠도 그랬어요?”

“그럼! 뭐, 자주 말을 걸어오지는 않지만 이따금 좋은 조언들을 건네주지.”

그제야 플로라는 안심하고 수련에 전념했다.

실력과 함께 불꽃은 점점 커졌지만, 익숙해지니 두려움은 옅어졌다.

불꽃도 입을 다물었다. 마치 원래 말 따위는 못한다는 듯이.

불꽃이 다시 말을 건네온 건 상당히 나중의 일이었다.

코르디스. 황태자가 보는 자리에서 루크와 벌였던 대련.

그곳에서 플로라는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썼다.

그곳에 있던 모두가 그녀를 욕했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만 같은 고독함. 믿었던 자들에 대한 배신감. 모든 게 끝났다는 절망감.

어린 플로라가 견뎌내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감정들이었다.

너무 큰 충격 탓이었을까?

그녀의 시야가 암전되고, 주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 빠졌다.

그 어두운 공간에 있는 건 오직 플로라와 그녀의 불꽃뿐.

평소에는 밝은 주황색이던 불꽃은 왠지 검게 타오르고 있었다.

불꽃이 플로라에게 속삭였다.

[전부 태워 버려. 너는 억울하잖아? 너를 배신하고, 깔보고, 욕하고, 노려보는 모두를 불태워. 그게 가장 깔끔해.]

플로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불꽃은 나쁜 의도로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었다.

목소리에서는 순수하게 플로라를 위하는 감정이 전해져 왔다.

[말했잖아. 나는 네 편이라고. 저 하찮은 놈들 목숨보다, 나는 네가 상처받지 않는 게 더 중요해.]

진심 어린 조언이다.

하지만 플로라는 불꽃에게서 두려움을 느꼈다.

만약 저 말을 따랐다가는 불꽃에게 잡아먹힐 거라고 본능이 외쳐댔다.

하지만 여기서 플로라가 더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함정에 빠진 실상 플로라에게는 선택지가 없는 셈이었다.

플로라는 천천히 불꽃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검은 불꽃에 완전히 몸을 맡기기 직전의 순간.

플로라를 구해준 게 바로 이안의 목소리였다.

이안은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플로라를 응원했다.

다른 모두가 의심할 때 주저 없이 자신을 믿어주었고, 기꺼이 위험을 감수했다.

플로라는 안다.

황태자의 앞에서 평민이 난동을 부린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행동인지.

이안은 플로라를 위해 목숨을 건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이안의 노력이 전해졌기 때문일까?

새카맣게 불타오르던 플로라의 가슴이 다시 따뜻한 빛을 띠었다.

마음을 다잡고 성장한 플로라이기에, 불꽃이 다시 말을 건네오는 일은 없었다.

플로라도 깨달았다.

마음속의 검은빛 불꽃을 조심해야 한다는 걸. 그건 플로라의 일부이기도 했지만, 굉장히 이질적인 기운을 풍기기도 했다.

그렇게 조심해서 살아왔는데…….

[형편없는 불꽃이네? 그래 가지고 원하는 걸 얻어낼 수 있겠어?]

얼마 전부터 불꽃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