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피에람(7)
왜 불꽃이 다시 말을 걸어왔을까?
플로라는 잘 알았다.
지금 그녀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시작은 로드릭이 몰래 저택을 나서는 걸 보았을 때다.
플로라는 처음에 로드릭의 외도를 의심했다.
정말 자상하고 팔불출인 로드릭이 그럴 리가 없지만, 사람 마음이란 모르는 게 아닌가?
쓸데없는 상상을 하는 대신 플로라는 주저 없이 로드릭의 뒤를 밟았다.
로드릭은 그녀의 생각보다 더 날렵했다.
가문의 숲으로 숨어 들은 로드릭은 그대로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숨겨둔 애인이라도 만나러 가는 걸까?’
플로라는 그 가능성에 고개를 저었다.
잘은 몰라도 방금 로드릭의 모습은 애인을 만나러 가는 것과는 달랐다.
그렇다면 로드릭은 대체 이 밤중에 어디로 향한 것일까?
그날, 플로라는 처음으로 자기 부모가 낯설게 느껴졌다.
다음날부터 플로라는 주위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
가장 먼저 들어온 얘기는 바로 샐러맨더로 인해 마을들이 불타고 있다는 얘기.
그 얘기를 듣자마자 플로라는 생각했다.
‘…… 아니. 이건 샐러맨더의 소행이 아니야.’
손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로드릭이 했다고는 믿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평생을 믿고, 사랑하고, 마음을 지탱해주던 존재가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고는 차마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 애초에 증거도 없고. 방계나 마탑의 마법사들이 저지른 짓일 수도 있고.’
그렇게 말하며 플로라는 스스로를 속여넘겼다.
굳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칠 생각은 접었다.
그 끝에 마주칠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때쯤 이안이 왔다.
자신을 지탱해주는 또 다른 사람.
위기에서 플로라를 구해준 은인.
얄밉지만 소중한 하나뿐인 친구.
처음 이안의 얼굴을 봤을 때, 그렇게 반갑고 기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안의 뒤에 선 아름다운 소녀를 봤을 때. 그 소녀를 가리키며 친구라고 소개했을 때.
그리고 그 소녀를 이안이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신경 쓰며 챙겨주는 걸 보았을 때.
저 무표정하고 무감정한 소녀가 유독 이안을 향해서는 신뢰를 보일 때.
플로라는 마음 한구석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감정을 느꼈다.
아마 그래서였을 거다.
[형편없는 불꽃이네? 그래 가지고 원하는 걸 얻어낼 수 있겠어?]
불꽃이 다시 말을 걸어온 것은.
***
“무슨 일이니 플로라!”
허겁지겁 달려온 로드릭은 주위에 펼쳐진 난장판에 말을 잃었다.
수련을 위해 특수하게 지어진 수련장이 박살 나 있었다.
그리고 한구석에 쓰러져 가쁜 숨을 몰아쉬는 플로라.
로드릭은 황급히 다가가 플로라의 몸을 살폈다.
“무슨 일이니. 다친 곳은 없니?”
“……그냥요. 오랜만에 힘을 좀 써보고 싶었어요. 그래 봤자 전력의 반도 안 냈지만.”
“허.”
로드릭은 플로라의 머리를 자상하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성인식을 앞두고 긴장이 되었던 모양이구나.”
“미안해요. 아빠.”
“아니다. 화염 마법사는 이렇게 주기적으로 힘을 발산해주어야 한다. 그게 오히려 더 건전한 거야.”
잠시 입을 다문 플로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빠도 그러신가요?”
“그럼! 아빠도 가슴이 답답할 때는 힘껏 불꽃을 터트린단다! 내 가슴을 태우는 것보다는, 나무나 쓰레기 같은 걸 태우는 게 훨씬 낫지 않겠니?”
“그렇…… 군요.”
플로라가 힘겹게 답했다.
그런 플로라를 로드릭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힘의 절반도 안내서 이 정도의 화력이라니. 너는 정말이지, 아빠와 엄마. 그리고 온 피에람의 자랑이란다. 그러니 성인식은 너무 걱정하지 말려무나. 우리 딸이라면 분명 잘 해낼 테니.”
“네…….”
로드릭의 격려에 플로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언제나 와 같은 자상한 아빠다.
이런 사람이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르다니. 그럴 리 없다.
플로라는 다시 마음의 불꽃이 안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이안이 수련장에 들어왔다.
“이 밤중에 이게 무슨 난리야.”
플로라의 얼굴에 화색이 떠올랐다.
폭발음을 듣고 이런 늦은 시각에도 달려 와주다니. 그만큼 자신을 걱정해준다는 거 아닌가?
하지만 그런 플로라의 기쁨은, 이안의 뒤에 딱 달라붙은 스텔을 본 순간 싹 가라앉았다.
플로라가 아무 말도 없자 로드릭이 대신 이안의 말을 받았다.
“아무래도 플로라가 수련에 너무 열중한 모양이네.”
“너무 열중한 것 같은데요? 수련장이 다 박살이 나 버렸네.”
“우리 딸이 워낙 열심이라 그렇네! 하하하!”
이안의 말을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한 로드릭이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물었다.
“그나저나 자네는 이 시각까지 왜 깨어 있었나? 스텔 양도 그렇고.”
로드릭의 눈에서는 한순간이지만 예리함이 번뜩였다.
이안은 스텔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여행 계획을 짜느라고요. 좀 상의를 하다 보니 시간이 늦어지더라고요.”
“……?”
스텔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이안은 수련장으로 달려가던 중, 굉음을 듣고 방에서 나온 스텔과 마주쳤을 뿐이다.
하지만 몰래 저택을 뒤져보고 있었다고 거짓말할 수는 없으니, 제법 적절한 변명인 셈이다.
로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하지만 젊은이들은 밤에 일찍 자야 하네. 그래야 키도 쑥쑥…… 플로라?”
갑자기 일어선 플로라가 휙 걸음을 옮겼다.
“피곤해요. 오늘은 이만 잘래요.”
“아. 그래. 좋은 꿈 꾸렴.”
빠르게 걸어간 플로라는 그대로 이안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어, 야.”
이안은 플로라에게 손을 뻗었지만, 플로라가 속도를 올려 빠져나가 버렸다.
민망해진 이안은 머리만 긁적였다.
“쟤가 왜 저런대. 많이 힘든가?”
이안과 스텔의 눈이 마주쳤다.
스텔은 그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
플로라는 무릎을 끌어모으고는 얼굴을 파묻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스스로가 너무나 한심했다.
‘기껏 걱정해주러 온 사람한테 무슨 짓이야.’
이제 성인식도 치를 나인데 아직도 애 같이 굴다니.
부끄러움 때문에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플로라가 잘못한 건 잘못한 거고, 감정은 또 다른 문제였다.
굳이 스텔을 데려온 데다가 친근한 모습까지 눈앞에서 보여주니, 열 받고 서운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 불꽃이 또다시 속삭여왔다.
[원래 그곳은 네가 있었어야 할 자리야.]
플로라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마.”
검은 불꽃이 잠시 일렁였다.
마치 플로라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넌 지금 반쪽짜리 마법사야. 타 버릴까 두려워 힘을 전부 못 내고 있지. 불꽃을 무서워하는 화염 마법사라니, 웃기지도 않아.]
“…….”
[마음속의 모든 제어를 풀어. 전부 태워. 화려하게. 우아하게. 그러면 그가 너를 되돌아볼지도 모르지.]
검은 불꽃은 이내 다시 원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방에는 다시 플로라 혼자뿐.
플로라는 깊은 사색에 잠겨 들었다.
***
이틀을 더 수색했지만, 지하실로 통하는 입구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피에람의 저택은 넓어도 너무 넓었다.
게다가 사용인들과 방계 출신 가솔들도 많이 지나다녀, 저택을 대놓고 헤집고 다니기도 힘들었다.
‘결국, 성인식 날까지 기다려야 할까요? 솔직히 그 녀석에게 그런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은데.’
[의외로 간단히 극복할 수도 있잖아요?]
‘누명 한 번에 무너지려 하던 애가요? 썩 확률이 높은 것 같지는 않은데요.’
이네스가 탐탁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음, 플로라 양을 위하는 마음은 좋지만. 역시 저는 이안이 플로라 양을 너무 어린애로 본다는 느낌이 강하네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더 좋은 방법이 있고요.]
‘어린애가 맞으니까요. 그리고 뭡니까? 더 좋은 방법이라는 게.’
이안이 물었지만 이네스는 의미심장한 미소만 지을 뿐. 답하지 않았다.
이럴 때의 이네스는 아무리 졸라도 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 답을 직접 찾아야 의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안은 굳이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스텔을 데리고 저택 이곳저곳을 구경하는 ‘척’을 했다.
“뭔가 느낌이 이상한 거 있으면 꼭 말해. 알겠지?”
“응.”
묘한 부분에서 감각이 날카로운 스텔이다.
의외로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1층 왼쪽은 대충 확인했으니 오른쪽을 좀 찾아봐야겠어.’
이안과 스텔은 저택의 1층. 오른쪽 끝으로 곧장 향했다.
그중 눈에 띄는 방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자, 지나가던 사용인 하나가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이곳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이안은 자연스럽게 답했다.
“아. 저택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혹시 이 방은 어떤 곳인가요?”
“피에람 가문의 서고입니다. 가주님이나 마님의 허락이 없으면 출입하실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아.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이안은 순순히 물러나려 했다.
일단 서고가 엄중히 지켜지고 있다는 정보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갑자기 서고의 문이 열리더니,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안을 불렀다.
아리사였다.
“괜찮아요. 들어오게 해도.”
“하지만 마님.”
“괜찮대도.”
서고로 들어가자 오래된 책 특유의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아리사는 따뜻한 얼굴로 이안과 스텔을 맞아주었다.
“마침 혼자서 심심하던 차였어요. 서고에서 뭔가 읽고 싶은 책이라도 있는 건가요? 그때 말했던 드래곤에 대한 책도 있어요.”
아리사는 독서가 취미인 듯했다.
그녀가 앉아 있던 의자의 옆에는 두꺼운 책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비록, 서고를 뒤져보는 건 힘들어졌지만 이안은 아리사의 친절을 기꺼이 받기로 했다.
‘궁금한 거라…… 그러고 보니 하나 있기는 하군.’
이안이 물었다.
“로잘리아 피에람 님에 대해 좀 알고 싶어요. 대악마를 쓰러트리고 난 후의 이야기요.”
이네스를 마지막에 배신했던 동료들. 이안은 결사대의 행적이 궁금했다.
분명 이네스도 말은 안 해도 궁금해 할 테고 말이다.
아리사가 흥미로 눈을 빛냈다.
“아. 로잘리아 님의 이야기는 플로라도 참 좋아했죠. 어렸을 적에는 매일같이 이야기를 들려줬었는데, 오랜만에 얘기해보겠네요. 앉으세요.”
아리사가 탁자 앞의 의자를 가리켰다.
이안과 스텔은 시키는 대로 앉았고, 그들의 앞에 사용인이 다가와 차를 따라주었다.
아리사는 로잘리아의 이야기를 천천히 풀었다.
“악마를 토벌한 이후, 로잘리아 님의 행적은 세간에 잘 안 알려져 있죠. 왜인지 알아요?”
“왜인가요?”
“간단히 말해, 로잘리아 님은 방 밖으로 아예 안 나갔거든요.”
“그, 그렇군요.”
아리사가 웃으며 말했다.
이안은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로잘리아 님은 남은 일생을 방에 틀어박혀, 학문적 연구에 투신하셨어요. 그때 로잘리아 님이 거두신 마법적 성과 덕분에 이후 피에람이 더 번성할 수 있었죠.”
“왜 그렇게까지 연구에 매진하신 걸까요?”
아리사가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그건 로잘리아 님만이 아시겠죠. 원체 과묵하셨다 하니…… 어쨌든. 그렇게 학자로서의 삶을 살다 일가족이 지켜보는 앞에서 스스로의 몸을 불태우셨다고 해요. 피에람답게 마지막에는 불꽃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 거죠.”
그걸로 이야기는 끝이었다.
더 얘기를 해주고 싶어도, 로잘리아 피에람에 대해 할 얘기가 없다고 아리사는 말했다.
이야기를 듣던 이네스가 충격받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로잘리아답지 않은 일이네요. 로잘리아는 사교회에 나가거나 연회에 참석하는 걸 정말 좋아했거든요. 그런 로잘리아가 집에서 나가지 않았다니. 동료들만이라도 행복하게 살길 바랐는데…….]
씁쓸한 목소리.
이네스는 진심으로 로잘리아가 행복하기를 원했다.
설령 자신을 배신했다 해도.
그 뒤로 이안은 아리사와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선조와 드래곤. 역대의 위인들 등등.
주로 피에람 가문에 얽힌 역사나 전설들에 대해서였다.
이안은 혹시나 싶어 이야기를 자세히 들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필요한 단서를 얻지는 못했다.
***
시간이 흘러, 성인식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분주하게 돌아다녔지만 결국, 지하실로 통하는 문은 찾지 못했다.
워낙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정작 플로라와는 대화를 못 했다는 게 아이러니한 점이다.
이안은 고민했다.
이대로 악마와 플로라가 대면하는 걸 지켜볼까?
‘아니. 역시 그래서는 안 돼.’
어차피 성검의 조각을 얻기 위해서는 피에람 가문의 악마와 싸워야 한다.
하지만 만약 플로라와 악마가 대면하면, 플로라마저 적으로 돌아서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존재한다.
‘크레이 사가’에서 마주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상황을 현실에서도 겪고 싶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하지.’
결국, 지하실로 통하는 입구는 찾아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안은 마지막까지 보류해둔 계획을 꺼내 들었다.
‘입구를 알고 있는 사람한테 물어야지.’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늦은 저녁.
이안은 한 방문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 문을 두드렸다.
똑똑.
“들어오게.”
허락이 떨어지자 이안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이안을 보고 로드릭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음? 자네였나? 이 시각에 대체 무슨 일인가?”
집무실에 앉아 업무를 보던 로드릭을 향해 이안이 물었다.
“오른 어깨는 좀 괜찮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