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38화 (139/222)

138. 피에람(8)

“오른 어깨는 좀 괜찮으십니까?”

“음? 아아. 근육통은 이미 말끔히 가셨네. 걱정해줘서 고맙네.”

부드럽게 웃는 로드릭을 한번 훑어본 이안은 고개를 돌려 뒤쪽에 걸린 영지 지도를 살폈다.

전보다 빨간색 ‘x’자가 더 늘어나 있었다.

이안이 지도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 빨간 표시, 불타 버린 마을 맞죠?”

“그렇네. 어떻게 알았나?”

순수하게 궁금하다는 얼굴로 묻는 로드릭.

둘은 잠시간 말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역시 명문가의 가주인가. 뭐 하나 읽어낼 수가 없네.’

이안이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이곳으로 오다 마을이 불타고 있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그랬나? 샐러맨더를 마주쳤겠군.”

“아뇨. 마을을 불태운 건 수준급 실력을 갖춘 화염 마법사였습니다. 아무도 살아나가지 못하게 아주 깔끔하게 태우더군요.”

“허…… 그건 좀 흥미로운 이야기군.”

로드릭은 탁상 위에 널브러져 있던 서류 더미를 정리하고, 한쪽 팔로 턱은 괸 채 이안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

“싸웠습니다. 바닥에서 치솟는 불기둥. 쉴새 없이 날아드는 불의 검. 아주 지랄 맞더라고요. 아, 평민이라 말버릇이 고약한 건 이해해주시길.”

“이해하네. 그나저나 불의 검이라. 그건 피에람에 내려오는 마법 운용법인데…… 그 뒤로 어떻게 되었나?”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나름 잘 싸워보긴 했지만, 그쪽에서 작정하고 도망치니 더 따라갈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도 한방 정도는 먹여줬어요. 오른쪽 어깨에. 단검 하나로.”

“……그렇군. 마을을 방화한 범인이 사실 피에람의 일원이라니. 방계의 수가 많으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믿고 싶지 않은 진실이군. 하지만 내 조사하도록 하지.”

로드릭은 괴로운 듯,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림에 그린 듯한 이상적인 영주의 모습이었다.

슬슬 짜증이 난 이안이 혀를 찼다.

“쯧. 여기까지 얘기했으면 슬슬 가식은 집어치우죠? 댁이 했다는 거, 대충 확신하고 있으니까.”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다.

그만한 실력의 화염 마법사는 드물다. 애초에 범인 후보 자체가 몇 없는 셈이다.

그중에서 체격이 비슷한 사람은 더더욱 적다.

심지어 그날. 로드릭은 오른팔을 사용하지 못했다.

마치 상처라도 입은 듯이.

그것만 가지고 단정할 수 없어 처음에는 확신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안은 로드릭이 뛰는 자세를 보았다.

사람의 기본적인 자세는 일견 비슷해 보여도, 자세히 보면 근육을 사용하는 방법이 조금씩 다르다.

다급하게 플로라에게 달려가던 그 자세는 이안이 마주쳤던 괴한과 똑같았다.

더 이상의 의심은 무의미하다고 이안은 판단했다.

로드릭이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그러니까, 자네는 영주인 내가 영주민들을 불태웠다고 말하고 싶은 거군. 맞나?”

“예.”

“터무니없는 오해지만, 만에 하나라도 맞다고 치고. 그 얘기를 왜 지금, 나한테 하는 건가? 만약 내가 진짜 범인이라면, 자네를 절대 살려두지 않을 텐데.”

이안은 성검에 슬며시 손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글쎄. 이길 자신이 있으니까?”

로드릭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웃음이 번져나갔다.

***

플로라는 고독하게 누워 있었다.

믿었던 가족도, 친구도 없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다.

아니. 혼자가 아니다.

검은 불꽃이 속삭여온다.

[넌 더 강해질 수 있어. 마음만 제대로 먹는다면 말이야. 그리하면 모두가 널 우러러보겠지. 그도 너를 돌아볼 거고.]

“……시끄러워.”

그렇게 말한 플로라의 목소리는 본인도 깜짝 놀랄 정도로 힘이 없었다.

검은 불꽃이 비웃듯이 일렁였다.

[12시가 지났네. 따라와.]

“뭐?”

[성인식을 치러야지. 지금까지의 너를 버리고 어른이 될 시간이야. 플로라.]

플로라의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마치 누군가 손을 잡아당기는 느낌이었다.

저항하고자 하면 그럴 수 있었지만, 플로라는 그 힘에 몸을 맡겼다.

플로라는 검은 불꽃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복도는 기묘하리만치 어두웠다.

그 어둠 속에서 빛을 내는 건 검은 불꽃 하나뿐이었다.

그러다 불꽃이 멈췄다.

그 옆에는 고풍스러운 문이 있었다.

‘집에 이런 문이 있었던가?’

플로라는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끼익.

문은 손을 데기도 전에 양옆으로 활짝 열렸다.

그 앞에 펼쳐진 건 아래로 향하는 계단.

망설이는 플로라가 답답했는지 검은 불꽃이 앞장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

마른 침을 삼킨 플로라도 불꽃의 뒤를 이었다.

그리고 계단을 끝까지 내려갔을 때, 그녀는 보았다.

***

“하하하! 당돌하군! 플로라의 하나 뿐인 친구가 이런 사내라니, 솔직히 매우 만족스러워.”

“좋게 봐주니 고마울 따름이네요.”

“하지만 무모해. 이곳은 피에람의 저택이다. 그리고 나는 피에람의 가주고. 이곳에서 나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나?”

“똥개도 자기 집에서 오 할은 먹고 들어가긴 한다는데…… 그래도 내가 이겨. 당신. 사실 플로라보다 약하잖아. 싸우고 싶지 않으면 내 요구사항을 들어줘.”

대놓고 도발하는 말에 로드릭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래. 원하는 게 뭔가.”

“지하에 악마가 있지?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악마에 가까운 무언가라 해야 하나.”

“……!”

여태껏 표정 변화 하나 없던 로드릭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그래. 이제야 감정이 좀 드러나는 것 같네.”

“내 말에 답하도록.”

“다 아는 수가 있지.”

머리를 검지로 툭툭 두드린 이안이 말했다.

“그런 괴물과 딸을 만나게 하려 하다니. 당신. 아빠 실격이야.”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마라. 아무것도 모르면서.”

차갑게 내뱉은 로드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플로라의 친구라서 웬만하면 죽이고 싶지 않았는데, 너는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다. 그냥 보내줄 수 없겠어.”

“마음이 통했네. 나도 댁이 플로라 아빠라서 별로 죽이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때와 같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로드릭의 눈동자에 불꽃이 일렁였다.

이안은 곧장 외쳤다.

“스텔!”

그 순간, 이안의 몸 주위를 하얀 장벽이 감쌌다.

로드릭이 외쳤다.

“이럴 줄 알고 미리 사제를 밖에 대기시켜놓은 거였군! 하지만 둘 다 죽이면 될 뿐이다!”

로드릭이 손을 휘저었다.

콰아아!

살벌한 불꽃이 손끝에서 피어나와 집무실 안에 회오리쳤다.

공간이 좁기 때문에 피할 곳이 없었다.

이안은 땅을 박차 도리어 화염 속으로 돌진했다.

스텔의 방벽과 수호자의 망토 덕에 그럭저럭 견딜만했다.

이안은 온 힘을 성대에 집중해 포효를 쏟아냈다.

“꺼져―!”

한순간 불길이 움츠러들었다.

이안이 다시 한번 땅을 밟아 가속했다.

둘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어딜!”

가까워져 오는 이안의 검 끝을 보며 로드릭이 땅을 짚었다.

손에 들린 건 자그마한 화염구.

콰앙!

화염구가 바닥과 부딪히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고, 그 충격으로 집무실의 뒤편 벽이 녹아내렸다.

반대편 손의 화염구를 또다시 터트린 로드릭은 그 반동으로 건물 밖으로 튕겨 나갔다.

‘쯧. 거리를 벌리는 건가.’

노련한 대응이다.

단번에 결전을 내려던 이안은 혀를 찬 뒤, 성큼성큼 도움닫기를 했다.

탓!

부서진 잔해를 밟고 이안이 날아올랐다.

그 속도가 놀랄 만큼 빠르다.

멀어져가던 로드릭의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감정과는 달리 대응은 기계적이다.

불의 검 수십 자루가 이안을 향해 날아왔다.

“이제는 마법을 숨길 생각도 안 하시는구만!”

이안은 공중에 떠오른 상태에서 무게 중심을 옮겨 크게 빙글 돌았다.

몸 움직임에 따라 성검이 한 바퀴 돌고, 다가오던 불의 검을 단 한 번에 베어냈다.

이미 한번 상대해 본 적이 있는 수법이다.

파훼법은 진즉 생각해두었다.

불의 검이 통하지 않자 로드릭은 불꽃을 모두 거둬들였다.

그 뒤, 로드릭은 손바닥을 마주쳐 쥐고 있떤 화염구를 폭발시켰다.

콰광!

공중에 떠 있던 로드릭의 방향이 급격히 꺾여 아래로 향했다.

한 바퀴 굴러 능숙하게 바닥에 착지해낸 로드릭이 다시 달음박질했다.

‘최대한 도망치겠다는 건가.’

마법사와 검사의 싸움 양상이 으레 그렇듯.

로드릭은 철저히 거리를 벌리며 이안을 소모시키려 했다.

반대로 이안은 마법을 피해내며 단 한 번의 일격을 노렸다.

내장이라도 한 번 찔리면, 그 고통 때문에 제대로 마법을 제어하지 못할 테니.

로드릭은 발바닥에 불꽃으로 폭발을 일으켜, 마법사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빠른 기동을 보였다.

그런 로드릭이 향한 다시 저택의 정문 방향이었다.

“호크.”

뒤따르던 이안이 손바닥에 호크를 소환했다.

그러고는 타이밍을 재다, 로드릭이 뒤를 흘끔 돌아볼 때 호크를 날려 보냈다.

호크가 한 줄기 섬광이 되어 로드릭의 눈을 훑고 지나갔다.

“끄아악!”

불시의 기습에 로드릭이 시야를 잃었다.

그 틈을 노려 이안은 양손을 가슴 앞에서 교차하듯이 던졌다.

일순간 손이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빠른 속도.

손안에 들려 있던 단검 두 자루가 공기를 가르며 날아갔다.

쐐액! 푹!

“끄악!”

뒤늦게 화염의 벽을 펼쳐내려던 로드릭이지만 이번에도 늦었다.

로드릭의 양 허벅지에는 단검이 각각 한 자루씩 박혔다.

고통에 못 이겨 로드릭이 바닥에 넘어졌다.

저택 안으로 다시 들어가기 바로 직전이었다.

“저택 안에 사용인들과 함정들을 사용해 싸우려고 했겠지. 시도는 좋았지만…….”

그게 오히려 로드릭의 실수였다.

사람은 안전한 장소가 바로 눈앞에 보이면 심리적 빈틈이 생겨나기 마련이니.

이안이 노린 건 바로 그 빈틈이었다.

‘마법의 위력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전투 경험이 많이 부족한 것 같네요. 솔직히 가주치고는 많이 실망이에요. 좀 더 어려울 줄 알았는데.’

[감히 누가 피에람의 가주에게 싸움을 걸었겠어요.]

이안은 로드릭에게 걸어가며 정신을 집중했다.

경보가 울린 건지 요란한 소리가 저택에서 울리고, 이쪽을 향하는 발소리들이 들려왔다.

저택의 사용인들은 물론, 다른 저택에 살던 방계들과 사병까지 오는 듯했다.

아무리 이안이라도 그들 모두와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이안은 서둘러 로드릭의 멱살을 잡은 뒤, 성검을 그 목에 가져다 댔다.

“자. 허튼짓은 하지 마. 아까도 말했듯이 친구의 아빠를 상처입히고 싶지는 않으니까.”

로드릭이 이를 빠드득 갈았다.

“이러고도 무사할 거라 생각하나? 이곳은 피에람이다.”

“당연히 아무 생각없이 벌인 짓은 아니지. 내가 뒷배가 좀 있거든.”

“하! 어떤 대단한 곳을 두고 있길래 감히 피에람에…….”

이안이 품을 뒤져 교황이 건네준 상징을 로드릭에게 보여주었다.

상징을 유심히 살피던 로드릭은 곧 그 안에 서린 신성이 누구 것인지를 알아보았다.

“교황……!”

“그래요. 내가 교황을 뒷배로 좀 두고 있는 사람이라…… 아무리 피에람 가문이라도 교단 전체한테는 좀 힘들지 않겠어요?”

물론, 이런 이안의 행동은 교단과 미리 합의되지 않은 사항이었다.

만약 이번 일로 피에람과 교단이 대립하게 된다면, 교황은 분명 큰 충격을 받고 기절하겠지.

하지만 그런 건 이안이 알 바가 아니었다.

이안은 차분히 협박했다.

“저택에 악마가 있는 거 알아요. 다 알고 온 거라고. 제가 괜히 알고 왔겠어요? 다 정보가 있으니 온 거지. 그리고 그 정보가 어디서 났겠어요?”

“악마가…… 아니다.”

“하지만 그에 가까운 무언가겠죠.”

이안은 로드릭의 변명을 곧장 봉쇄했다.

“악마를 섬기는 가문이라니. 이 사실이 제대로 알려지면 당신네 가문은 끝이야. 이단심문관들이 들이닥쳐 피에람의 피가 조금이라도 섞인 자들을 다 잡아 들이겠지. 나도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아. 플로라가 충격을 받을 테니까.”

“……원하는 게 뭔가.”

“조용히 처리하자고. 악마에게 안내해. 내가 그 악마를 베고, 이번 일은 조용히 덮어줄 게. 가문이 전부 날아가는 건 원치 않잖아?”

로드릭이 벌여온 범행 같은 건 부차적인 문제다.

우선 악마를 막고, 플로라가 타락하는 가능성을 없애야 했다.

로드릭이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두 눈이 다시 뜨였다.

눈동자에 담긴 건 포기가 아닌 각오.

“가문이 전부 날아간다고? 그런 건 이미 각오하고 있었어.”

“뭐?”

“어차피 시작된 모양이군. 이제는 막을 수 없어.”

쿠구구궁.

로드릭이 그 말을 뱉자마자 지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