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39화 (140/222)

139. 피에람(9)

플로라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 가문의 지하실이었다. 그랬을 진데…… 어째선지 방의 가장자리에 뜨거운 용암이 흐르고 있었다.

‘마법으로 만든 용암인가?’

그 의문에 플로라는 고개를 저었다.

용암에서는 어떤 마법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어렸을 때 보았던 오스트 화산의 용암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왜 가문의 지하에 이런 게 흐르는 걸까?

그런 상념을 뚫고 아름다운 목소리 하나가 머리에 들어왔다.

“어서 오렴. 나의 아이야.”

플로라는 고개를 퍼뜩 들었다.

지하실의 정중앙에 마련된 화로 위에 강한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불꽃은 이리저리 일렁이더니, 이내 아름다운 여인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플로라가 눈이 크게 뜨였다.

그녀는 저 여인이 누구인지 안다.

“로잘리아 피에람…….님.”

“알아봐 주니 고맙구나.”

로잘리아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플로라는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반가움과 기쁨, 의심과 의문이 섞인 복잡한 표정이 드러났다.

로잘리아가 부드럽게 웃었다.

“많이 혼란스러운가 보구나.”

“예, 예. 저는…… 당연히 로잘리아 님이 불꽃이 되어 천국에 오르신 줄 알았어요.”

“나도 그러려고 했지. 하지만 지상에 두고 갈 핏줄들과 영지의 백성들이 참으로 걱정되더구나. 우리가 악마를 물리쳤다 하나, 악마는 언제든 부활할 수 있으니.”

“그래서 지상에 남으셨군요!”

“그래. 이런 형태로나마 남고 싶었단다.”

플로라의 표정이 비로소 환해졌다.

천국에 올라 신의 옆자리에 설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하고, 사람들을 위해 지상에 남다니!

참으로 영웅적이고 위대한 결단이었다.

로잘리아가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오랜 시간 피에람 가문을 지켜보고 있었단다. 가솔들의 불꽃 속에는 언제나 내 불꽃이 섞여 있었지.”

“아! 그렇다면 가끔 불꽃이 말을 걸었던 것도……!”

“그래. 전부 나란다.”

“하, 하하. 로잘리아 님께서 제 모습을 전부 보고 있었다니, 쑥스럽네요.”

플로라의 얼굴이 조금 달아올랐다.

영웅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행동을 플로라는 참으로 많이 해왔었다.

그러다 플로라는 문득 생각했다.

‘하지만 불꽃이 얘기했던 건…….’

불꽃이 속삭이는 내용은 모두 플로라를 위했으나, 과격이 짝이 없었다.

도저히 영웅이 할법한 말은 아니었다.

그런 갈등을 읽은 걸까?

로잘리아가 느긋하게 말했다.

“플로라. 요즘 네가 어떤 고민을 가졌는지는 잘 알아. 네가 믿어 왔던 것에 대한 의심, 인간관계에 대한 갈등, 아. 지금 또 하나의 고민이 늘었구나.”

로잘리아를 이루는 불꽃이 일렁이더니 플로라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손이 플로리아의 볼을 쓰다듬었다.

불꽃이라기에는 놀랄 만큼 싸늘한 느낌이었다.

“천재인 너는 바로 알아차렸구나. 지금 내 상태가 유지되는 게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영혼을 불꽃의 형태로 담아 지상에 몇백 년간 고정하다니.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한 거죠?”

다소 날카롭게 묻는 플로라를 로잘리아는 사랑스럽다는 듯이 보았다.

“불을 피우기 위해서는 땔감이 필요하단다. 우리가 피우는 불꽃도 다르지 않아. 마음속에 있는 무언가를 불태우기에, 우리는 허공에 불꽃을 피워올릴 수 있는 거야. 그렇기에 화염 마법사는 마법을 사용하면 할수록 마음을 제어하기 힘들어지지.”

로잘리아의 형상을 이루는 불꽃이 한차례 일렁였다.

플로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로잘리아 님은…… 지금 무얼 태우고 계신 거죠?”

“글쎄. 한 가지를 제외하면 전부 태워 버렸지. 그걸로도 모자라 이제는 이 지하실에 발이 묶여, 피에람의 가주들에게 불꽃을 나눠 받는 신세고.”

“가주들의 불꽃이요?”

로잘리아가 조금 슬픈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가주가 가진 가장 큰 감정 중 하나를 나의 땔감을 위해 바쳐. 네 아빠인 로드릭은…… 재능이 부족해 특히 많은 감정을 바쳐야 했지. 가족에 대한 사랑 외에는 대부분을. 그걸로도 부족해 꾸준히 감정을 채울 필요가 있었던 거야. 아주 어두운 감정이라도…… 이걸로 네 고민에 대한 해답이 어느 정도 됐니?”

“그런.”

플로라는 혼란스러움에 바닥에 주저앉았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로잘리아의 말이 진실이라는 걸 머리가 이해하고 있었다.

플로라가 힘겹게 물었다.

“가, 가주들이 그렇게까지 해서 로잘리아 님을 위하는 이유가 뭐죠? 아니. 로잘리아 님은 왜 그렇게까지 지상에 남아 있으려 하는 거죠?”

“말했잖니. 나는 가솔들과 백성들이 걱정된다고. 플로라. 세상이 위험해. 악마가 곧 대륙을 쑥대밭으로 만들 거야.”

“아, 악마.”

로잘리아가 플로라의 뺨과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렇게 구차하게 생을 이어온 것도, 다 이 순간을 위해서야. 그리고 신의 기적인지, 너라는 천재가 나타났어. 나를 받아들여 줘 플로라. 함께 악마를 무찌르자.”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로잘리아의 눈동자 속 불꽃이 시선을 따라 플로라의 눈으로 흘러 들어갔다.

“함께하자. 그러면 네 평생의 소원이었던 위대한 명성도 어렵지 않게 누릴 수 있어. 그리고 생각해봐. 네가 혼자라고 생각했을 때, 옆에 있어 준 건 언제나 나뿐이었어. 사실 우리는 언제나 함께였던 거야. 안 그러니? 같이 영웅이 되자.”

“…….”

플로라의 눈동자가 점점 검게 물들었다.

로잘리아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

쿠구구구궁.

지면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안이 다급히 물었다.

“뭐야! 뭐가 일어나는 거야!”

“하하하. 아무래도 지하 내부에 왜곡해둔 공간이 일그러지고 있나 보군. 저택의 지하는 오스트 화산으로 통하거든.”

“……제정신이 아니구만.”

이안은 로드릭의 멱살을 쥔 채,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지면이 흔들린다는 건 무언가 벌어지고 있다는 징조.

더 늦기 전에 플로라를 찾아야 했다.

눈치껏 내려온 스텔이 이안의 뒤에 붙었다.

이안과 스텔이 함께 걸어가자, 급하게 달려온 사용인들과 사병들은 둘을 막아서려 했다.

이안이 칼을 치켜들며 말했다.

“다들 썩 꺼져. 댁 가주가 죽고 싶은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무슨……!”

이안이 로드릭에게 속삭였다.

“다 뒤로 물려. 관계없는 사람들까지 해치고 싶지 않으니까.”

“하. 대체 뭘 하려고 그러는 거지?”

“멍청아. 빨리 플로라를 보러 가야지. 어떻게 됐을지 모르는데.”

로드릭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그러니까 대체 왜! 플로라는 로잘리아 님의 불꽃을 받아들여,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화염 마법사가 될 거다.”

이안이 멈칫했다.

“……그 악마가 로잘리아라고?”

“로잘리아 님이 정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지상에 남은 건 사실이다. 깐깐한 교단의 눈에는 안 좋게 보이겠지. 하지만 로잘리아 님은 스스로를 희생하신 거다! 언젠가 대륙이 위험에 빠진 순간, 그 힘을 피에람의 일원에게 전수하기 위해!”

로드릭의 눈이 광기로 빛나며 쉴새 없이 주절거렸다.

“그리고 그 힘을 물려받은 플로라는 위대한 마법사가 되어 많은 위업을 세우겠지. 그토록 원하던 플로라의 꿈이 이루어지는 거야!”

듣고 있던 이네스는 헛숨을 들이켰다.

이안은 미간을 좁혔다.

한 번에 너무 많은 정보가 들어와서 머리가 복잡했다.

‘가문의 지하에 있던 악마는 로잘리아 피에람. 그렇다면 게임에서 플로라가 타락한다는 건…….’

머릿속에 퍼즐조각들이 맞춰졌다.

이안이 멱살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줬다.

“병신아.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직 모르겠어?”

“뭐?”

“몇백 년 동안 지상에 남고 싶어 할 정도로 삶에 미련 있는 놈이, 순순히 자기 힘을 주고 성불하겠냐고.”

그녀가 이야기대로 위대한 영웅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안은 로잘리아의 이야기를 안다.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이네스를 배신한 그녀는 한낱 평범한 인간일 뿐이었다.

“넌 과거의 망령에 네 딸을 팔아넘긴 거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로잘리아 님을 모욕한다는 건 피에람을 모욕한다는 것! 그 아가리를 찢어 버리기 전에 닥쳐!”

“하지만 너도 방금 흔들렸지?”

“뭐?”

달빛을 반사한 이안의 눈이 빛났다.

그 꿰뚫어 보는 듯한 눈에 로드릭이 말을 멈췄다.

“순간이지만 불안해졌잖아. 방금.”

“무슨…….”

“일단 확인해보면 되는 거잖아. 정말 댁이 말하는 대로 로잘리아가 순순히 힘을 넘겼는지. 안 그래? 그러니 저놈들을 물려. 당장!”

이안이 윽박지르자, 로드릭이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이빨이 파고든 입술에서 핏물이 터져 입가를 타고 흘렀다.

로드릭이 사용인과 사병들에게 말했다.

“모두 비켜라. 이자의 말에 따르라.”

“아예 이곳에서 멀리 떨어트려. 보는 눈이 많아져서 좋을 게 없으니까.”

“모두 물러가라! 그리고 날이 밝기 전까지는 돌아오지 마라!”

“하지만……!”

“어서! 명령이다!”

로드릭이 단호하게 명령하자, 눈치를 보던 사용인들이 이내 물러나기 시작했다.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빠지고 마지막으로 남은 건 아리사였다.

아리사는 흐르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찍어내고 있었다.

“여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플로라가 보이지 않아요! 그리고 이안 씨는 왜 그러는 거고요!”

“아리사. 지금은 일단 자리를 비켜 줘. 중요한 일이니까.”

“하지만……!”

이안은 로드릭의 멱살을 쥐고 아리사를 그대로 지나쳤다.

이미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다.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안은 굳이 로드릭의 멱살을 쥐지 않아도 되었다.

초조한 얼굴의 로드릭의 발걸음은 이안보다 더 빨랐다.

“설마. 아닐 거야. 절대.”

그 세 단어를 반복하며 로드릭은 복도에 나 있는 문 하나를 벌컥 열었다.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보였다.

‘이런 곳에 문이 있던가? 대체 어떤 조화인지…….’

[이안. 집중하세요. 이 아래에 있는 게 진짜로 로잘리아라면…… 그녀가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르기 전에 막아야 해요.]

이네스는 절박하게 말했다.

그녀의 오랜 친구를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은 로드릭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공기가 점점 뜨거워지더니, 눈을 뜨기가 힘겨울 정도로 주위가 뜨거워졌다.

그런 열기에는 아랑곳하지 않는지, 로드릭이 지하실에 발을 들였다.

그곳에는 눈과 머리가 새까맣게 변한 플로라가 서 있었다.

“플로라? 너 맞니?”

로드릭이 플로라에게 손을 뻗었다.

플로라는 그 손을 탁―하고 쳐 버렸다.

“수고했다. 로드릭. 그동안 네가 보여준 희생과 헌신. 잊지 않겠다.”

그건 플로라의 입에서 나왔다고 믿기에는 너무나 사악하고 이질적인 목소리였다.

로드릭이 눈을 부릅떴다.

“무, 무슨 소리를…….”

“기뻐해도 좋다. 다시 한번 피에람 가문에 위대한 영웅이 탄생한 것이니. 가문의 이름은 또 한 번 드높아질 것이다.”

“로잘리아 님. 당신입니까? 대체 우리 플로라를 어떻게 한 겁니까!”

“아둔한 녀석이군. 하지만 너도 땔감으로서는 가치가 있겠지.”

“컥!”

화륵.

플로라, 아니. 로잘리아의 손이 로드릭의 목을 졸랐다. 그녀의 손이 검은 화염에 휩싸였다.

“끄아아악!”

열기에 저항이 있는 화염 마법사마저 고통을 참지 못할 정도의 화염.

로드릭의 몸은 금방이라도 타 버릴 것 같았지만…….

돌연. 로드릭의 목을 놓은 로잘리아가 뒤로 물러났다.

그녀가 서 있던 곳에는 이안의 성검이 훑고 지나갔다.

이안은 로드릭의 몸을 잡아채 뒤로 집어 던졌다.

“플로라가 정신 차렸을 때, 자기 손으로 아빠를 죽였다는 걸 알면 얼마나 충격이겠어.”

로잘리아가 웃었다.

“이안. 플로라의 갈등의 원인. 마침 잘 왔다. 너를 산채로 태운다면, 이 아이는 더 강력한 불꽃을 만들어낼 수 있겠지.”

로잘리아의 주위로 검은 화염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살벌한 기세를 풍기며 공중으로 떠오른 로잘리아가 물었다.

“자. 이안. 그래도 플로라의 친우에 대한 예우로, 유언을 남길 기회를 주겠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음…….”

머리를 긁적인 이안이 툭 뱉었다.

“그런 식으로 살지 말라고…… 이네스 님이 전해달라는데?”

로잘리아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