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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43화 (144/222)

143. 성인식

로잘리아의 몸과 함께 드래곤의 사체도 천천히 불타 없어졌다.

방금까지의 소란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주위에는 차가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안은 살짝 눈치를 보다, 이네스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으세요?’

[괜찮진…… 않죠.]

이네스는 씁쓸하게 웃었다.

친구라 생각했던 이가 추악하게 변한 것도 모자라, 마지막까지 자신을 탓하다 사라졌다.

분명, 큰 충격이었을 터.

하지만 의외로 이네스는 담담하게 말했다.

[누군가의 선망을 받는다는 건, 그 사람들의 증오까지 짊어져야 한다는 거예요. 앞으로 이안도 익숙해져야 하고요.]

‘글쎄요. 저는 마냥 저런 식으로 제 탓을 하면 확 쥐어박아 버릴 것 같은데요.’

이안이 팔뚝을 들어 올리며 때리는 시늉을 했다.

쓰게 웃은 이네스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잘못한 걸까요? 제가 로잘리아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탓일까요? 저는 그저 동료들이 행복한 여생을 보내길 바랐는데.]

‘인간이 남의 속마음을 어떻게 다 예측할 수 있겠어요. 그냥 그러려니 해야지. 그런 거로 자책하지 마세요. 괜히 저까지 가슴 답답해져서 짜증 나니까.’

이네스는 모든 걸 자기 탓으로 돌려 스스로 짊어지려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그녀는 홀로 모든 걸 짊어지고 대륙을 구해내기도 했고.

그 인간을 초월한 것 같은 성정은 감탄스럽기도 하지만, 이안은 그녀가 좀 더 인간답게 굴었으면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이안의 위로 아닌 위로에 이네스가 미소지었다.

[맞아요. 지나간 일을 후회해봤자 의미 없겠죠. 다만, 로잘리아와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데, 그럴 겨를이 없었던 게 아쉽네요.]

고개를 끄덕인 이안은 용이 죽은 자리를 살폈다.

완전히 녹아 용암과 비슷한 상태가 된 땅에, 투박한 검 한 자루가 꽂혀 있었다.

검신에는 붉은 실선이 퍼져 있었다.

드래곤과 함께 잠들어있던 여섯 번째 성검 조각.

이안은 그 손잡이를 향해 주저 없이 손을 뻗었다.

***

이안은 눈을 떴다.

주위가 묘하게 따뜻했다.

이내 자신의 하반신이 반쯤 용암에 잠겨 있다는 걸 깨달았다.

“헉!”

기겁한 이안이 급하게 빠져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이안을 누군가가 말렸다.

“걱정마라. 이미 내 가호가 몸 구석구석에 퍼졌을 테니.”

이안은 고개를 돌렸다.

자그마한 크기로 변한 드래곤이 용암 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 옆에서 이네스도 함께 반신욕을 즐기고 있었다.

이네스가 이안을 보며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드래곤 씨께 양보해드릴게요. 아무래도 시간이 부족하니까요.”

“고맙군. 이네스.”

살갑게 얘기를 나누는 둘을 보며 이안은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드래곤이 콧김을 흥! 하고 내뿜었다.

“대체 뭐가 뭔지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군. 하지만 나는 드래곤이다.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생물. 시간만 있다면 이런 검 속에 비집고 들어오는 것 정도는 손쉬운 일이다.”

“음. 예.”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드래곤에게는 시간이 별로 남지 않은 것 같으니.

드래곤은 이안을 찬찬히 관찰했다.

노란색 세로 눈이 이안의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찬찬히 살폈다.

드래곤은 때로는 감탄을 내뱉거나, 흥미로 눈을 빛냈다.

“이거 놀랍군. 여러 신비가 몸 안에 들어가 있다니. 게다가 한 몸에 두 가지 영혼이 공존하고 있군. 성검이 그 매개체가 되어주는 것이고.”

혼자 중얼거리던 드래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렇게 신기한 존재는 또 처음이군. 나만큼이나 특별해. 과연 영웅은 영웅이라 이건가.”

“칭찬은 감사합니다만 하고 싶은 말이 그겁니까?”

슬슬 짜증이 난 이안이 톡 쏘아붙이자 드래곤의 입가에 미소 비슷한 게 떠올랐다.

“인간. 참으로 건방지군. 내가 현역이었으면 이미 씹어 삼켰을 거다.”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 성격인지라.”

“하하. 그래. 이제 나한테는 너를 해코지할 힘이 없지.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지. 마지막에 네가 피웠던 불꽃. 그건 분명 레니 피에람의 것이었다. 대체 어떻게 한 거지?”

레니 피에람.

피에람을 세운 선조의 이름이었다.

드래곤의 말을 알아들은 이안은 옷에 걸린 브로치를 떼어 건네주었다.

‘피에람의 긍지’

피에람의 선조가 자신의 불꽃을 담아 만들었다는 아티팩트.

드래곤은 떨리는 손, 아니 발로 브로치를 받아들였다.

“……맞아. 그녀의 불꽃이 맞군.”

드래곤은 브로치를 코에 댄 뒤 지그시 눈을 감았다.

먼 과거를 회상하는 듯, 드래곤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내 유일한 친우였다. 그녀와 함께하는 하루하루는 매우 즐거웠지. 그녀 없는 세상이 너무나 지루할 정도로.”

드래곤의 목소리에는 진한 씁쓸함이 묻어나왔다.

인간보다도 더 인간 같은 감정이었다.

“지혜가 생긴다는 건 꼭 좋은 일만은 아니야. 이런 끔찍한 감정을 느껴야 한다니.”

“…….”

“그녀는 자기 자손들이 잘 살기를 바랐지. 여차하면 나보고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다행히 피에람은 건재하고, 나도 그녀의 유언을 들어줄 수 있게 되었군.”

드래곤은 온몸을 덮쳐오던 불길을 떠올렸다.

제정신이 아니었던 지라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피에람이 아니라면 절대 만들어낼 수 없는 불꽃이었다.

그 정도 인재가 있다면, 앞으로 피에람은 더더욱 번성할 것이다.

드래곤이 이안과 눈을 마주쳤다.

“이미 네 몸에 내 가호를 걸어두었다. 웬만한 하찮은 마법에는 내성이 생길 거다. 특히 불은 너의 친구가 될 거고.”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도 용암 속에서 멀쩡한 것도 모자라, 피로가 회복되는 느낌이었다.

당장 현실에서 이 정도의 위력을 발휘할지는 미지수지만…….

게다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드래곤은 브로치를 꾹 쥐었다.

“고맙다. 마지막에 그녀의 향기를 맡을 수 있게 해줘서. 덕분에 즐거운 추억들이 떠올랐다. 이 아티팩트의 이름이 무엇이지?”

“피에람의 긍지.”

“긍지라…… 나쁘지 않은 이름이군. 이 안에 내 남은 힘을 전부 담겠다.”

드래곤에게서 발산된 붉은 기운이 브로치 안으로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주위 공간이 일그러졌다.

어느새 다가온 이네스가 이안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았다.

이안의 의식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

손에 느껴지는 감촉에 이안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뒤를 돌아보니 스텔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안의 손을 꾹 쥐고 있었다.

“……어디 아파?”

이안은 스텔을 안심시키기 위해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어주었다.

“흠! 흠흠!”

인위적인 헛기침 소리에 이안과 스텔의 고개가 돌아갔다.

플로라가 뾰로통한 얼굴로 둘을 쳐다보고 있었다.

“모두 훌륭했어. 스텔 양. 굉장한 신성이었어요. 이안. 너도…… 음! 나쁘지 않았어.”

칭찬의 말을 늘어놓은 플로라가 팔짱을 끼며, 기대 어린 눈빛을 보냈다.

마치 듣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이안은 플로라를 잠깐 놀려줄까 생각했지만, 이번만큼은 순순히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마지막에 날린 불꽃. 엄청나더라. 실력이 많이 늘었네. 엄청 열심히 수련했나 봐?”

“윽.”

의외로 순순히 칭찬해주자, 부끄러웠는지 플로라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 반응이 재밌어 이안은 칭찬을 쏟아냈다.

“역시 피에람 가문의 천재는 다르다 이건가. 어쩌면 그 로잘리아의 전성기 시절을 뛰어넘었을 수도 있지. 가문도 좋고, 아름답고, 실력도 뛰어나고, 정말이지 부족한 게 하나도 없는…….”

“그만! 알았으니까 그만해!”

더는 버텨내지 못한 플로라가 손을 뻗어 이안의 얼굴 앞에서 휘저었다.

그러다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

셋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난장판이었다.

저택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덜 식은 땅은 흐물거렸다.

플로라가 마법을 날린 곳에는 거대한 구덩이가 생겨 있었다.

플로라가 나고 자란 공간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아니. 그것만이 아니다.

이안은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아?”

“안 괜찮아.”

즉답.

플로라의 심정이 어떨지는 짐작할만하다.

피에람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했던 플로라다.

로잘리아를 뛰어넘어 피에람의 이름을 알린다는 건, 그런 자긍심의 영향일터.

자긍심은 그녀의 마음속 기둥이었고, 그 기둥은 이번 사건으로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플로라는 이상하게 후련해 보였다.

이안이 물었다.

“안 괜찮은 것치고는 멀쩡해 보이네?”

“이번 불꽃에 마음속 모든 걸 태워 버렸더니, 머리가 맑아지더라고. 많은 걸 깨달았어.”

이안은 플로라가 담담히 내뱉는 말을 조용히 들어주었다.

“로잘리아 님이랑 아빠도 결국 평범한 사람이었더라고. 그 점은 조금 다행스럽긴 해. 예전에는 로잘리아 님 같은 분을 어떻게 하면 뛰어넘을 수 있을까 아득하게 느껴졌거든.”

“그러냐.”

플로라는 전투로 엉망이 된 흰 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그동안 너무 가문을 위해 살았던 것 같아. 주위 기대가 너무 커서, 나도 모르게 그 마음에 답하고 싶었던 거지. 이제 그런 건 그만두려고. 내가 하고 싶은 걸 찾게.”

“나를 위해 살겠다! 이거네? 그러면 꿈은 바꾸는 거야?”

플로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여전히 난 로잘리아 님을 뛰어넘고, 위업을 세워, 전 대륙에 내 이름을 남길 거야.”

“하지만 가문을 위해서는 아니라는 거야?”

“응. 가문의 명예는 내 꿈에 뒤따라오는 부차적인 것들일 뿐이야. 왜냐하면…… 내가 피에람이니까.”

‘나는 피에람이니까’가 아니다.

내가 피에람이니까.

오만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이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드래곤을 상대할 때 보여준 그 불꽃이라면, 플로라야말로 피에람 그 자체라 할 수 있겠지.

이안은 플로라의 마음속에 새로 세워진 기둥을 볼 수 있었다.

‘언제 이렇게 다 컸대?’

이안이 생각하는 플로라는 언제나 덜자란 애였다.

하지만 스스로 두 발로 일어선다고 선언한 플로라의 모습은 훌륭한 한 사람의 어른이었다.

물론 아직 서툰 만큼, 넘어지거나 휘청일 때도 있을 거다.

그때는 이안이 잡아주면 될 뿐이다. 이네스가 이안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이안이 플로라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어른이 된 걸 축하해. 화려한 성인식이었네.”

이안의 농담 아닌 농담에, 플로라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

밤사이 일어났던 소란은 적당히 무마하기에는 너무나 요란했다.

피에람의 시민들은 하늘을 밝히던 불빛과 굉음, 이따금 들려오는 괴수의 울음소리에 벌벌 떨어야만 했다.

몇몇은 피에람에서 마법 실험을 하다 실패했다고 추측했다.

또 누군가는 오스트 화산에 의한 자연현상이라고도 했다.

꿈 많은 소수의 사람들은 전설 속 드래곤이 다시 깨어난 게 아니냐는 말을 꺼냈다가 주위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샀다.

피에람에서는 당장 어제의 일을 곧이곧대로 발표할 수는 없었다.

사람들의 문의가 빗발치자, 피에람에서는 이렇게 발표했다.

“플로라 피에람 님께서 새로운 마법의 경지에 달해 일어난 일일 뿐이다. 안심하도록.”

이 소문은 순식간에 피에람 전역에 퍼졌다.

시민들은 자기 일처럼 기꺼워했다.

플로라는 차기 영주가 될 사람이다.

영주가 강할수록 영지민은 편한 법이다.

피에람의 발표를 믿지 않고 진짜 진상을 알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지만, 뭐 어쩌겠나.

이곳에서는 피에람의 말이 곧 법이거늘.

그런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로브를 눌러쓴 이안을 거리를 헤쳐나갔다.

그가 향한 곳은 교단의 피에람 지부.

“누구십…….”

“이거.”

안내하는 사제에게 교황이 준 상징을 보여주자, 황급히 고개를 조아린 사제가 그를 어딘가로 데려갔다.

철저한 보안으로 지켜진 방 안.

그곳에는 의자 하나와 전신 거울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잠시 기다리자, 거울이 일렁이더니 깐깐한 여성의 모습을 비추었다.

신의 목소리의 수장을 맡은 아비게일이었다.

“오랜만이군요. 안 그래도 궁금하던 참이었습니다. 대체 피에람에서 어젯밤,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벌써 소문이 거기까지 퍼졌나요?”

“피에람으로 가신다는 말을 듣고 언제나 그쪽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죠. 그래서. 무슨 일이었는지 짐작가는 게 있으신가요?”

고개를 끄덕인 이안은 어제 벌어진 사건을 최대한 간추려서 설명했다.

귀를 기울이며 분주히 필기하던 아비게일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드래곤이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 손에 든 깃펜을 떨어트렸다.

이걸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표정으로 아비게일이 되물었다.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 맞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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