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동료
아비게일은 처음에는 이안의 말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후. 피에람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이 사실이었다니…… 여전히 믿기 어렵군요. 하지만 그동안 이안 님이 겪은 일을 생각하면, 믿지 않을 수도 없겠지요.”
“당장 피에람에서는 이 얘기를 퍼트리고 싶지 않은 눈치에요.”
바닥에 떨어진 깃펜을 주워든 아비게일은 다시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며 답했다.
“아무래도 가문의 치부와 관련이 되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안 님은 어떻게 하시고 싶으십니까? 원하신다면 들고 있는 정보를 활용해 피에람을 압박할 수 있습니다.”
가주가 마을과 주민들을 불태운 일이나, 지하에 악마와 비슷한 존재를 가둬둔다는 소문은 아무리 피에람이라도 치명적이었다.
어떻게든 무마하고 싶을 터.
하지만 이쪽에는 교단이 있다.
소문을 관리하고 퍼트리는 데에 있어서는 전문가인 집단이.
적절히 협박하면 피에람에 생각보다 더 많은 걸 뜯어낼 수 있을 터.
하지만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최후의 수단으로 미뤄두죠. 일단 얘기를 좀 나눠보고 싶어요. 기왕이면 협박보다는 자발적으로 협력하는 게 좋잖아요?”
“과연……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희는 준비만 해놓고 있겠습니다. 언제라도 연락만 주시면 곧바로 움직이겠습니다.”
아비게일이 안경을 손가락으로 추켜올리며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적이면 두렵지만, 아군일 때는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이안이 일어서며 말했다.
“그 외에 더 할 말이 없다면 그만 돌아가보겠습니다.”
“아. 얘기 드릴 게 있습니다.”
아비게일이 떠나려는 이안을 붙잡았다.
“남부에서 벌어지는 텔 공국과 알론 연합 간의 전쟁이 격해지고 있습니다. 원래는 서로의 전력차가 있어 수성과 공성 위주로 전황이 진행될 거라 여겼는데…… 둘의 전력이 비슷해지는 바람에 제대로 맞붙고 있습니다.”
“전력이 비슷해지다니요?”
“이안 님이 말했던 초원의 전사들이 알론 연합에 합류해, 수배 차이 나는 병력을 깨트려 버렸습니다. 그들의 무용에 공국 병사들은 깊은 공포를 느끼고 있습니다. 덕분에 공국에서도 무리하게 세금을 거둬, 용병을 고용하고 있고요. 눈치를 보던 다른 왕국들도 동참할 기미를 보이고 있습니다.”
“끄응.”
이안은 신음을 흘렸다.
예전에 대칸을 도왔던 일이 이런 식의 결과를 낼 줄 예상치 못했다.
‘전쟁이 격해지면 안 되는데.’
왕국들의 전력은 훗날, 황태자의 군대와 싸우고, 그 이후에는 악마의 군세와 맞붙어야 했다.
여기서 세력이 깎여나가는 건 좋지 못했다.
아무리 이안이 강해져도, 혼자서 군대를 상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저도 비슷한 생각이에요. 전쟁만큼 부정한 감정을 많이 끌어내는 것도 없으니까요. 전쟁이 지속되고, 사람이 죽어 나갈수록 악마의 도래는 빨라질 거예요.]
점점 악마가 다가오고 있다.
이안은 게임에서보다 사건의 흐름이 빨라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이런 변화를 만들어낸 건 아마도…… 이안의 탓일 거다.
이안이 아비게일에게 물었다.
“황태자. 아니, 황제 측에서는 뭔가 움직임이 없나요? 가만있지 않을 것 같은데.”
“네. 황태자 측에서는 왕국들에게 계속해서 경고를 보내고 있습니다. 서둘러 전쟁을 중단하는 게 좋을 거라고.”
“하지만 안 멈췄고요?”
“예. 아직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황제가 할 수 있는 일이 크게 없을 거라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왕국들의 생각이 눈에 보였다.
어떻게든 황제의 자리가 안정될 때까지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거겠지.
전쟁에서 승리만 한다면, 훗날 황제에게 받을 질타 정도는 감수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을 거다.
‘황제를 너무 물로 보는군.’
황제는 폭탄 같은 사내다.
아직 폭발까지 시간이 남았다고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심각하게 굳어가는 이안의 얼굴을 보며, 아비게일이 이어 말했다.
“들려온 첩보에 의하면, 황제가 강철 기사단의 본부를 직접 방문했다 합니다. 아시다시피 강철 기사단은 황태자 시절부터 황제를 섬겨오던 측근 세력입니다. 그 의도는…… 굳이 설명드리지 않아도 뻔하지요.”
“알겠어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한동안 지켜보죠.”
그 뒤로 이안은 아비게일과 몇 마디 말을 더 나눴다.
현재 교단은 이안에 대한 소문은 은밀하게 퍼트리고 있다고 했다.
구체적이진 않고 교단에 귀인이 나타났다는 식으로 두루뭉술하지만, 그런 소문도 언젠가 쌓이고 쌓여 커다랗게 굴러갈 것이다.
더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역시 황제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제국은 강력하다.
그런 제국에 맞서려면 든든한 아군이 필요하다.
아비게일과 이야기를 마친 이안은 다시 로브를 뒤집어쓰고, 소란스러운 분위기의 인파 속에 파고들었다.
***
피에람 가문은 오히려 일반 시민들보다 뒤숭숭했다.
당장 손님으로 온 이안이 가주를 잡고 협박하던 게 어제 새벽의 일이다.
가주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물러섰더니, 굉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지면이 흔들렸다.
가솔과 사용인들은 저택의 상공에서 터져 나가던 환한 불빛을 볼 수 있었다.
또한, 거대한 드래곤이 하늘에 날아오르던 것을 보았다.
그들은 공포에 떨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발만 동동 굴렀다.
소음이 잦아들고, 상황이 마무리된 거로 보이자 그들은 곧바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보게 되었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대저택과 녹아내린 땅, 그리고 곳곳에 남겨진 격한 전투의 흔적을.
다행히 드래곤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건 기절한 가주와 휴식을 취하던 이안, 스텔, 플로라뿐.
곧바로 가솔들은 이안을 사로잡으려 했지만, 플로라가 그런 가솔들을 말렸다.
플로라는 자세한 사정을 가르쳐주지는 않았지만, 가솔들은 차기 가주인 플로라의 말을 따라야만 했다.
그리고 하루가 꼬박 지난 저녁이나 되어서야 가주가 정신을 차렸다.
그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이안은 곧장 별채로 향했다.
주위를 지키던 가솔들이 그런 이안을 사납게 노려보았지만, 이안은 코웃음만 쳤다.
‘뭘 잘했다고 째려보고 있어.’
가솔들과 몇 초간 눈싸움을 벌인 이안이 스텔과 함께 가주가 머무르는 방문을 두드렸다.
안쪽에서 플로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이안과 스텔은 안쪽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혹여나 소리가 새어 나갈까 경계하는 이안에게 플로라가 말했다.
“절대 소리가 안 새어 나가게 되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럼 안심이고.”
침대에 누워 있던 로드릭은 이안이 들어오자 상체를 일으켰다.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지, 얼굴이 퀭했다.
고개는 플로라와 마주치지 못하고 침대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죄책감일까요? 아니면 그런 척을 하고 있는 걸까요.’
로드릭의 영혼은 여전히 읽기 힘들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 불꽃이 많이 사그라들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꼭 로드릭만 그런 건 아니었다.
로잘리아가 사라지고.
그녀의 불꽃들이 피에람에 속한 모두에게서 흩어져 버렸다.
그 때문인지 로드릭의 눈동자는 허망하기만 했다.
이안이 말했다.
“아래만 쳐다보고 있지 말고 얘기를 좀 해보죠. 가주님.”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네.”
“본인의 잘못을 전부 인정하는 겁니까? 좀 더 변명할 수도 있을 텐데요. 로잘리아가 꼬드겨서 어쩔 수 없었다거나.”
로드릭은 고개를 저었다.
“속삭임에 넘어간 건 나일세. 옳지 않은 것임을 알면서도 행한 것도 나고. 그 누구의 핑계도 댈 수 없어.”
깔끔한 대답인 한편, 그 목소리에서는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모든 삶의 의지를 잃은 사람처럼.
썩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이안이 좀 더 노골적으로 물었다.
“악마. 아니, 악마화 된 로잘리아를 유지하기 위해 감정을 바치는 것도 모자라, 시민들을 태워 죽여 부정한 감정을 모으던 걸 전부 인정하는 겁니까?”
“……인정하네.”
옆에서 보고 있던 플로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끼어들지는 않고, 그저 안타까운 얼굴로 로드릭을 쳐다보았다.
이안은 곰곰이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로드릭이 이런 짓을 벌인 동기에 대해 더 정확히 듣고 싶었다.
악마는 으레 인간 마음속 나약한 틈을 파고드는 법이니.
하지만 플로라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얘기할 만한 주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제가 교단에 연이 있다는 건 얘기했었죠?”
“뭐? 교, 교단?”
옆에서 듣던 플로라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로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네. 자네 같은 신자에게 이번 일은 넘어가기 힘들겠지. 하지만 가문에는 죄가 없어. 내 목숨 정도로 넘어갈 수 없겠나?”
“아빠…….”
애절한 표정이었지만 이안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죽음은 속죄가 될 수 없어요. 그리고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저는 신자가 아닙니다. 신자는 얘고요.”
이안은 스텔의 머리를 툭툭 쳤다.
스텔은 이야기에 별 관심 없는 듯, 시선을 창밖에 흘러 다니는 구름에서 떼지 않았다.
이안의 말에 로드릭의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분명 교황의 신성이 깃든 상징이었는데…… 그런 걸 교단의 신자도 아닌 사람에게 준단 말인가?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어요. 잘 생각해보세요.”
로드릭은 곰곰이 생각에 잠겨 들었다. 그러다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그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나?”
“아마 맞을 겁니다.”
“그렇군. 그렇게 된 건가…… 그렇다면 자네의 실력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군. 혹시 저쪽의 스텔 양도?”
“예.”
“뭐야. 둘이 무슨 얘기를 하는 건데.”
플로라가 로드릭과 이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잠시 침을 삼킨 로드릭이 천천히 말했다.
“플로라. 악마는 수백 년마다 돌아오는 걸 알고 있지?”
“응. 당연하지.”
“악마가 다가오면, 영웅들 역시 나타나고.”
“근데?”
“아무래도 눈앞에 이 두 사람이 그 영웅인 것 같구나.”
플로라가 눈을 부릅떴다.
몇 번 입을 뻐끔거리더니, 비명처럼 말을 토해냈다.
“말도 안 돼! 스텔 씨는 몰라도, 이안은 평민이고, 인상도 더럽고, 말도 교양 없게 하잖아!”
“거 말 참 예쁘게 하네.”
로드릭은 이마를 손으로 쓸어내리며 크게 놀라워했다.
“이 내 예상보다 더 놀랍군. 범상치 않은 출신일 거라 생각은 했지만…….”
말끝을 흐리던 로드릭은 문득,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 잠깐. 설마 이곳에 찾아온 이유는?”
“예. 그 얘기를 하려고 왔습니다.”
로드릭의 시선이 플로라에게 향했다.
이안 역시 플로라를 향해 몸을 돌렸다.
몹시 진지한 눈빛이었다.
이런 분위기의 이안은 플로라에게 낯설게 다가왔다.
갑작스러운 시선에 플로라가 침을 꿀꺽 삼켰다.
이안은 긴장한 플로라에게 정중히 물었다.
“우리는 악마를 죽일 거야. 긴말 안 할게. 플로라. 우리와 함께하자.”
“나는…….”
“네가 필요해.”
“…….”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사고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플로라는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졌다.
‘악마를 토벌하는 영웅.’
언제나 동경해왔던 일이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악마라니.
플로라는 여전히 코르디스에서 보았던 그 악몽 같은 존재를 잊지 않았다.
그보다 더한 것들을 상대해야 했다.
분명 두렵고 괴로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플로라는 마음을 다잡았다.
턱 끝을 올리며 마치 내려다보듯이 이안에게 말했다.
“흥. 내가 그런 걸 거절할 거 같아? 오히려 네가 제안하지 않았다면 나 혼자서라도 나섰을 거야.”
“어렵고 힘든 일이 될 거야. 중간에 포기하기도 쉽지 않을 거고.”
“날 뭐로 보는 거야. 플로라 피에람이라고. 넌 내가 함께해 준다는 거에 감사나 해.”
“……고마워서 돌아가시겠네.”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쓴웃음을 지은 이안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보며 잠시 멈칫한 플로라가 이내 환하게 웃으며 이안의 손을 마주 잡았다.
유난히 따뜻한 플로라의 손을 잡으며 이안은 생각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제 화력 걱정할 필요는 없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