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45화 (146/222)

145. 예언

플로라와의 얘기가 끝났다.

옆에서 듣고 있던 로드릭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딸이 꿈에 한 걸음 다가섰다는 감격과 어려운 길을 걸을 딸에게 닥칠 위기가 걱정이 마음속에서 어우러졌다.

이안은 그런 로드릭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당신 딸이랑 우린 한배를 탄 거예요. 그러니 협조를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요.”

“……이미 자네는 나와 가문의 비밀을 알고 있지 않나. 자네 말에 모두 따르겠네. 무얼 원하나?”

“전쟁을 준비하세요.”

“뭣…….”

예상외의 말이었는지, 로드릭이 당황했다.

당연히 이안이 가문의 보물이나 지원 정도를 원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피에람보고 전쟁을 일으키라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아뇨. 곧 전쟁이 벌어질 겁니다. 대륙을 혼돈에 빠트릴 대전쟁이. 그 전쟁에서 우리는…….”

이안은 잠시 고민했다.

‘이 사실을 말해도 될까?’

지금껏 이안은 미래의 일을 최대한 남에게 털어놓지 않는 방향으로 살아왔다.

이후에 어떤 변화로 되돌아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

제대로 피에람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아는 걸 다 털어놓아야 했다.

“황제랑 싸워야 합니다.”

“그건……!”

역시나 크게 당황하는 로드릭.

긴 역사 동안 황실을 도와온 가문이니만큼, 거부감이 클 것이다.

플로라 역시 크게 놀라 물었다.

“황실에 반기를 들라는 거야?”

“그래.”

“받아들이기 힘든 일인 건 둘째치고, 무모한 일이네.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제국이 쌓아온 힘이 얼마나 되는지 아는가? 아니, 그것보다 애초에 왜 황제를 적대해야 한다는 건가?”

로드릭의 의문에 이안은 망설임 없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건 황제가 악마 숭배자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황가의 핏줄이 어떤지는 자네가 가장 잘 알 텐데!”

로드릭의 반응이 격해졌다.

황가의 핏줄에는 선대 영웅들의 피가 섞여 있다.

선대 영웅들은 그 업적을 인정받아 신의 옆자리에 오른 사실상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

그 핏줄이 흐르는 황족은 반인반신 취급을 받으며, 제국민들의 큰 자긍심이기도 했다.

그런 황가가 악마를 숭배한다니. 믿고 싶지 않은 것도 당연했다.

“증거. 증거를 말해보게!”

흥분한 로드릭에게 이안이 여전히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로드릭 님도 짐작 가시는 부분이 좀 있지 않습니까?”

“뭣?”

“황제에 대한 의혹이 암암리에 퍼지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아비게일은 황제가 악마 숭배자라는 의혹을 포착했다고 말했다.

그 말은 제국의 고위층들 사이에서도 이미 소문이 퍼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렇다면 권세로는 누구한테도 밀리지 않을 피에람의 가주가 그런 소문을 듣지 못했을 리 없다.

로드릭이 반박했다.

“헛소문! 애초에 그 소문에 근거 따위는 없었네!”

이안은 로드릭에게 더 설명하는 대신, 플로라에게 고개를 돌렸다.

“플로라. 황제가 아직 황태자 신분일 때, 코르디스에 왔던 거 기억나?”

“으, 으응.”

“그 옆에 마법사 두 명을 데리고 다녔잖아. 흰색이랑 검은색.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 쪽의 이름은 대현자 오테르야.”

“나도 알아. 오테르 님은 워낙 유명하시니까. 마법사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존경받을만한 분이시잖아?”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이어 말했다.

“그리고 그 오테르 경의 옆에 한 사람이 바로 테이오스. 머리를 짧게 깎은 인상 사나운 마법사. 기억나?”

“으응. 뭔가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었지.”

“그 사람이 악마 숭배자야.”

이안의 단호한 말에 로드릭과 플로라가 동시에 놀랐다.

“뭐? 그 사람이? 그러면 코르디스에서 악마가 나타난 것도…….”

“아니. 그건 그 사람 작품은 아니야. 하지만 아마 낌새 정도는 눈치챘을 확률이 높지.”

로드릭도 테이오스에 대해서는 무언가 집히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테이오스…… 분명 그 신분에 대해 말이 많은 사내였지. 하지만 황제께서 워낙 중히 여기는 데다가, 공을 많이 세워서 함부로 할 수 없는 이였는데…….”

하지만 로드릭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테이오스가 악마 숭배자란 근거도 없지 않나?”

“뭐. 지금으로선 그렇죠.”

“자네의 말만 믿고 그런 위험한 일을 벌일 수는 없네.”

우려했던 반응이다.

아무리 이안에게 약점이 잡혀 있다 해도, 황제를 향해 이빨을 들이대기는 부담스러운 법이었다.

여기서 더 압박해서 행동을 강제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러면 의미가 없다.

이안이 원하는 건 로드릭이 마음을 다해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니까.

고민하던 이안은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지금부터 미래를 예지해보죠.”

“뭐? 무슨 말인가?”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말해드릴게요.”

플로라가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그런 것도 가능해?”

“당연히 가능하지.”

로드릭이 미심쩍은 눈빛을 보냈다.

“내가 알기로, 선대 영웅들 중에서 그런 능력이 있는 자는 없었던 것으로 아네만. 보통 예언자라고 했던 이들도 전부 사기꾼이었고.”

“가주님. 영웅 해보셨어요?”

“…….”

“해본 사람만 아는 게 있어요.”

이안의 막무가내 논리에 로드릭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미래를 예지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상황 아닌가.

‘다 게임에서 겪어봤다고 설명할 수는 없지.’

로드릭을 침묵시킨 이안은 찬찬히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설명했다.

세세한 부분에는 변화가 있을 테니, 가급적 꼭 일어날 법한 큼직한 일들만 말했다.

“우선, 황제가 머지않을 때 전쟁을 선포할 거예요. 왕국들이 대륙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제국의 권위를 무시한다는 게 명분이죠.”

“그것부터 납득하기 힘들군. 굳이 제국이 병사를 일으켜 전쟁을 벌인다고?”

이안은 로드릭의 반론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 말했다.

“그다음에는 황제가 악마 숭배자와 연관이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나타납니다.”

“하. 참으로 형편 좋은 소리군.”

“그다음에는 전쟁 구도가 제국과 나머지 왕국 연합의 대결로 바뀝니다. 악마를 숭배하는 적을 상대로 싸우는 것만큼, 명분이 확실한 것도 없으니까요.”

옆에서 듣던 플로라가 끼어들었다.

“제국은 어떻게 되는데? 황제가 악마랑 연관이 있다면, 제국 내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 아니야.”

“그래. 여러 세력이 황제의 반대파에 붙지. 그리고 그 구심점은 너도 아는 사람이야.”

“아…….”

그게 누구인지 곧바로 알아챈 플로라가 중얼거렸다.

“레아 님…….”

“정답이야.”

“……그래서 코르디스에서 그렇게 레아 님께 치근덕댔던 거야?”

“내가 언제 치근덕댔다는 거야.”

왜인지 눈을 가늘게 뜨고 이안을 쳐다보는 플로라를 무시하며, 이안이 계속 설명했다.

“레아 님을 중심으로 연합이 모여, 결국 대전쟁을 벌입니다. 그리고 레아 님이 황좌에 앉게 되지요.”

“……그게 끝인가.”

“그 후에 대악마가 온다는 것까지 얘기하면, 이걸로 제 얘기는 끝입니다.”

로드릭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혼자서 이안의 이야기를 곱씹었다.

만약 다른 이가 말했다면 끝까지 듣지도 않았을 거다.

예언이라니.

지금껏 스스로를 예언가라고 칭하던 이들은 백이면 백, 전부 사기꾼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사내를 그런 사기꾼으로 치부할 수는 없었다.

무려 드래곤을 잡아낸 실력에 교단에서도 인정한 영웅 아닌가.

그렇기에 로드릭은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꿔보기로 했다.

‘이 말이 진실일까?’가 아닌, ‘이 말이 진실이라면 어떻게 될까?’로.

로드릭은 대전쟁이 발발했을 때, 가문과 영지가 어떻게 될지를 상상했다.

이제는 이안의 동료가 된 딸이 어떻게 될까도 고민했다.

‘믿지 않으면 굳이 수고를 들여 대비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아주 작은 확률이라도 저 사내의 말대로 세상이 흘러간다면…… 대비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은 천지차이다.’

결정을 내린 로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자네의 말을 전부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전쟁에 대비는 어느 정도 해놓겠네.”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은 이들의 삶을 책임져야 하는 가주는 신중해야 하는 법이다.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었다.

“예. 그리고 황실에서 계속 눈을 떼지 말아주세요. 만약 제 말대로 일이 흘러간다면…….”

“그때는 전적으로 자네를 믿고, 따르겠네.”

로드릭은 굳은 얼굴로 그리 말했다.

***

로드릭과 플로라에게 미래에 벌어질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놓은 건, 반쯤은 도박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이안에 대한 신뢰도를 크게 떨어트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이안은 피에람이 최대한 전력을 온존하길 바랐다.

‘황제가 전쟁을 일으킬 때,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만 막아도 큰 소득이야.’

더불어 이안의 말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

그때에는 로드릭도 이안을 딸의 동료로서 지원하는 게 아닌, 진정한 아군으로써 함께할 것이다.

피에람과 교단.

그 둘의 힘만 합쳐도 섣불리 건드릴 수 없는 강력한 세력이 만들어진다.

이안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줄 둘이.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제 말이 사실이었다는 게 판명 날 때까지 이곳에 머무르는 게 좋겠네요. 황제가 언제 전쟁을 벌일지는 모르니, 좀 오래 있을 수도 있겠네요.’

[그럼 또 부지런히 수련할 수 있겠네요? 한동안은 저택의 지하실을 찾아내느라 바빴잖아요?]

‘예. 새로 얻은 것도 있으니…….’

여섯 번째 성검 조각을 얻으면서 이안의 신체 능력은 이제 초인의 영역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단련으로 근육이 더 강해지는 영역은 지난 셈이다.

반대로 이안의 검술은 긴 시간 동안 정체되어 있었다.

‘마치 한계에 마주친 느낌이에요.’

[모든 검사가 느끼는 아득함이네요. 하지만 이안의 경우는 조금 달라요.]

‘예?’

[이안은 제 재능을 물려받았으니, 겨우 이런 곳에서 벽을 느낄 리가 없다는 거죠.]

당연하다는 듯이 터무니없는 말을 내뱉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이네스에게 한계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았기에.

[이안의 문제는 아직 검광을 사용하지 못하는 데에 있겠죠. 검광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 하나의 경지에 이른다는 거니까요.]

‘검광이라…….’

여전히 이안에게는 어렵고 아득하게 느껴지는 힘이다.

‘아직 실력이 부족한 걸까요?’

[글쎄요. 그렇다기보다는 여전히 심리적인 문제라고 생각하지만요.]

심리적인 문제라면 단기간에 바꿀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억지로 매달리는 대신, 이안은 검에서 눈을 돌려 이번에 새로 얻은 드래곤의 가호 쪽으로 눈을 돌렸다.

이네스가 말했다.

[저도 우연히 오스트 화산 근처에서 드래곤의 가호를 받은 적이 있어요. 정확히는 드래곤 본인이 아닌, 잠든 드래곤의 의념이 만들어낸 정령이었지만. 이안은 직접 드래곤에게 힘을 받았으니 더욱 강력한 효과를 발휘할 거예요.]

이안도 피부를 타고 흐르는 이 힘이 범상치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좀 시험해보고 싶은데요.’

이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에 들어온 건 이안의 시중을 드는 저택의 사용인.

새빨간 머리칼의 장대한 사내는 이안을 불만족스럽게 노려보고 있었다.

‘하긴, 가주를 데리고 인질극까지 했으니 좋게는 못 보겠지.’

어쩔 수 없는 적의였다.

이안은 사내에게 물었다.

“잠시 도움을 좀 받을 수 있을까요?”

“……무슨 일이십니까.”

“저한테 화염 마법을 날려 보세요.”

“예?”

갑작스러운 말에 사내가 경계의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혹, 제가 무언가 잘못한 게 있습니까?”

“아뇨. 그냥 순수하게 실험하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걱정 마세요.”

“저는 방계이긴 하나, 그래도 피에람입니다. 제 불꽃에 맞으면 목숨이 위험하실 겁니다.”

“괜찮습니다. 걱정 말고 마법을 날려주세요.”

사내의 표정이 더더욱 일그러졌다.

이안의 말은 마치 사내의 마법이 별 볼 일 없을 거라고 깎아내리는 것처럼 들렸다.

안 그래도 마음에 안 드는 놈이, 그의 가장 큰 자존심을 건든 셈이다.

‘건방진 외부인 놈이!’

가슴에 불이 붙은 사내가 팔을 걷어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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