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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47화 (148/222)

147. 사고의 전환

이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황제의 행동이 예상 이상으로 빨랐다.

로드릭이 말했다.

“폐하께서는 전쟁에 대해 긴히 할 얘기가 있다고 하네. 갑작스러운 말에 다른 영주들도 술렁이고 있어.”

“그 외에 다른 말은 없었습니까?”

로드릭은 고개를 저었다.

전쟁에 대해 할 얘기가 있으니 반드시 오라는 말뿐.

구체적인 설명은 없다고 했다.

로드릭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맙소사. 정말 자네 말대로 세상이 흘러간다면…… 아니. 아직 속단하기는 이르지. 어쩌면 그저 남부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관한 얘기를 하려는 것일 수도 있지 않나?”

“뭐. 그럴 가능성도 조금이나마 있긴 하죠.”

“아무튼, 직접 가서 폐하의 말을 들어보겠네.”

“황실의 분위기를 유심히 살피세요. 몸조심하시고요.”

고개를 끄덕인 로드릭은 방을 나섰다.

이안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늘에는 이른 장마가 오려는 듯,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

다음날 로드릭은 수행원들과 함께 곧바로 황도로 떠났다.

이안은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온종일 이네스와 대련하는 데에 집중했다.

카각!

두 사람의 검이 얽혔다.

이미 수천 번도 넘게 했을 탐색전이 짧게 이어졌다.

둘은 동시에 자리에서 물러난 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검을 내질렀다.

두 사람의 검이 또다시 허공을 갈랐다.

이안은 곧바로 발을 내디디며 검을 휘둘렀다.

힘껏 내려 베는 강검.

그 모습에 이네스가 미소를 지었다.

“찌르기 다음에 곧바로 이어지는 강검. 놀랄 정도로 발전했네요.”

본인이 얼마나 성장했는지는 이안 스스로도 크게 체감하고 있었다.

원래는 아무리 검을 맞대도 아득하게만 느껴지던 이네스다.

마치 바닷속을 들여다보는 막막한 기분.

하지만 이제는 이네스의 움직임이 점점 읽히기 시작했다.

함께 정신을 공유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만큼 검을 많이 맞댔기 때문일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세상에서 이네스의 검보다 더 현란하고 복잡한 검은 없다는 거다.

그 검을 읽어낼 수 있다면 다른 어떤 강자의 검이든 읽어낼 수 있을 터.

캉! 캉! 캉!

검과 검이 연달아 맞닿았다.

공방이 이어질 때마다 이안은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깎여나가고 있었다.

눈앞에서 검이 왔다 갔다 하는데도 한없이 차분한 이네스의 눈빛은 소름 끼칠 정도였다.

‘저 평정을 어떻게든 깨트려야 해.’

이안이 한 걸음 더 내디디며 두 사람의 간격을 좁혔다.

의도를 알아챈 이네스는 검을 내려놓고 곧장 맨주먹으로 응수해왔다.

짧은 사이, 서로가 서로의 팔을 쳐내고, 때리고, 막아내는 공방이 수십 합이 지나갔다.

이안은 목표는 이네스의 여유를 깨트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여유를 잃는 건 이안 쪽이었다.

식은땀을 흘리는 이안을 상대로 이네스는 주먹을 쉴새 없이 움직이며 대화까지 건네왔다.

“아무래도 초조한 모양이네요.”

“…….”

“이안이 알고 있던 것과는 세상이 조금씩 다르게 흘러가고 있으니까요. 맞죠?”

이안도 주먹을 휘두르는 와중에 여유를 쥐어짜 내어 답했다.

“조금이 아니죠. 황제가 마음만 먹으면 당장 겨울이 오기 전에 전쟁을 벌일 수도 있어요. 그러면 제가 알고 있는 것보다 족히 1년이나 기간이 앞당겨지는 거잖아요.”

이네스가 부드러운 동작으로 이안의 주먹을 흘려내며 물었다.

“그만큼 악마가 빨리 찾아오는 게 두렵나요?”

“예. 세상의 흐름이 빨라진 거에 비해, 제 실력은 충분치 못한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솔직한 대답에 이네스는 잠시 고민하다, 무릎을 이안의 명치 쪽으로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러면 생각을 좀 바꿔보면 어떨까요?”

“예?”

이네스가 땅을 힘껏 밟아 뒤로 물러났다.

갑작스럽게 생겨난 소강상태.

털썩 주저앉은 이안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빛으로 이네스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시간의 흐름이 빨라진다면, 이안이 직접 나서서 되돌리면 되잖아요?”

“예?”

“황제가 전쟁을 준비한다면, 그 전쟁을 방해하는 거죠. 교단을 이용해 황제를 정치적으로 압박하는 식으로요.”

역발상.

물론 이안도 생각해보지 않은 부분은 아니었다.

“제가 왜 지금까지 가급적이면 게임의 흐름대로 행동하려고 했는데요. 설령 변화가 있다 해도…….”

“너무 큰 변화가 생겨서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는 걸 막는 거였죠?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이미 큰 변화는 나타났어요. 그러면 기존의 태도를 고수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안은 이네스의 조언을 곰곰이 곱씹었다.

확실히.

이제 와서 이안이 더 과격하게 행동한다 해도, 지금의 흐름보다 그 결과가 나쁘기 힘들 것 같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네스 님 말이 맞아요. 어쩌면 저는 너무 수동적으로 살아왔던 걸 수도 있어요.”

“정해진 운명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자주 그런 모습을 보이곤 해요. 이안에게 그 게임이라는 세계에서 일어난 일은 반드시 일어나야 할 운명이었던 셈이죠. 운명대로 흘러가지 않으니 초조한 거고요.”

이네스의 설명에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이라는 단어가 뇌리에 깊게 박혔다.

이안이 물었다.

“이네스 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운명을 믿으시나요?”

“음…….”

잠시 고민하던 이네스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저는 정해진 미래는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에요. 설령 있더라도, 노력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것이라고 믿어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대답.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이안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얼굴에 어린 근심은 씻은 듯이 사라진 상태였다.

“또 배워가네요.”

“제가 도움이 됐다니 기뻐요.”

“제가 뭘 할 수 있는지. 뭘 해야 할지에 대해 다시 고민해봐야겠어요. 황제조차 전쟁을 미룰만한 일이라…… 황도에 화재라도 일으키면 되려나요? 마침 플로라도 있으니 마냥 불가능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이네스가 당황해 되물었다.

“……예?”

“아니면 병참에 대대적으로 테러를 하면 어떨까요? 비축 물자를 모조리 태워 버리는 거죠. 이 정도로는 눈도 깜빡 안 하려나?”

“……왜 전부 그런 쪽인가요?”

초조해하던 기색이 사라진 건 보기 좋았다.

하지만 그 결과가 상당히 과격하게 드러나는 걸 보며, 이네스는 내심 실수한 게 아닐까 후회가 들었다.

***

황제의 부름을 받은 로드릭은 닷새간 마차를 몰아 황궁에 도착했다.

이미 와 있던 귀족들이 로드릭에게 아는 체를 해왔다.

“피에람 공. 오랜만이오!”

“어째 피에람 공은 나이를 안 먹는 것 같군.”

“허허.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로드릭은 귀족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에 일일이 화답했다.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고위 귀족들이 전부 이곳에 모여 있군.’

황제의 부름은 갑작스럽고 무례했다.

하지만 귀족들은 황제가 어떤 인물인지를 잘 알았다.

그가 어떻게 형제들과 선대 황제를 제치고 옥좌를 차지했는지도 잘 알았다.

그렇기에 황제의 부름에 귀족들은 모두 마음속에 불만을 품고 있었지만, 그걸 내색하는 이는 없었다.

황제의 미움을 산다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잘 아는 것이다.

“그나저나 갑자기 전쟁이라니.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혹, 짐작 가는 게 있으시오?”

“저도 잘…… 남부에서 벌어진다는 왕국 놈들의 전쟁에 대해 얘기하려는 것 아닙니까?”

귀족들도 황제의 소집 의도를 몰라 의아해하고 있었다.

그나마 이안에게서 예언을 전해 들은 로드릭만이 혹시나 하는 마음을 안고 있을 뿐.

‘왜인지 분위기가 어수선하군.’

갑작스럽게 불려온 귀족들은 물론, 황궁을 지키는 기사들이나 사용인들의 눈동자에서도 기묘한 낌새를 느낄 수 있었다.

로드릭이 이마를 쓸어내렸다.

‘설마 예언이 진짜라면…… 아니. 너무 그런 쪽으로만 의식하다 보니 이상하게 느껴지는 걸 수도 있어.’

다시 머리를 단정히 한 로드릭은 걸음을 옮겨 회의실의 한구석에 조용히 있는 오테르에게 다가갔다.

‘나는 지금 몹시 불만이 많다’하는 표정으로 앉아 있던 오테르는 로드릭이 다가오자 표정을 조금 풀었다.

로드릭이 공손히 인사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강녕은 무슨. 오래 살면 못 볼 꼴만 계속 본다는 걸 깨닫고 있는 참이오. 어서 빨리 누울 자리를 알아보든지 해야지 원…….”

자조적인 농담에 쓰게 웃은 로드릭이 물었다.

“혹, 황제 폐하께서 무슨 얘기를 하시려는지 아십니까?”

“……직접 듣는 게 나을 거요. 정말이지. 폐하께서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건지. 웬 근본 없는 놈이나 싸고돌고.”

“혹시 그 근본 없는 놈이 나를 말하는 건가?”

쇠를 긁는듯한 목소리가 갑자기 뒤쪽에서 들려왔다.

로드릭이 놀라 뒤를 돌아보자, 머리를 짧게 민 사나운 인상의 마법사가 반갑게 인사를 건네왔다.

“오랜만이군. 로드릭 피에람.”

황제의 측근 중 하나, 테이오스였다.

오테르는 테이오스의 등장에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피에람의 가주되시는 분이다. 그에 걸맞은 예를 취해라.”

“내가 예를 표하는 건 오직 폐하뿐이다 영감. 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 거지? 노망이라도 든 건가?”

“이 건방진 놈이!”

둘이 서로를 살벌하게 노려봤다.

주위 공기가 갑자기 조금 무겁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만은 아닐 거다.

“왜, 왜들 그러십니까.”

로드릭은 곤란한 척을 하면서도 테이오스를 유심히 관찰했다.

‘수상쩍고 건방진 놈이지.’

출신도, 나이도, 가문도 무엇 하나 알려지지 않은 사내.

그리고 황태자가 아직 힘이 없을 때부터 오테르와 함께 보필해오던 측근.

‘실력 하나는 뛰어나다고 하던가.’

오테르는 황태자의 명령이 내려지면 아무리 위험한 임무라도 기꺼이 뛰어들어, 결국 성공해내곤 했다.

구체적으로 그가 어떻게 싸우고 어떤 마법을 다루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는 기본적으로 혼자 싸우며, 그가 한번 싸우기 시작하면 생존자는 단 하나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마음에 안 드는 놈이야.’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로드릭은 특히 테이오스가 껄끄러웠다.

그 핥는 듯한 눈빛이 가끔 자신을 탐욕스럽게 훑어보았기 때문이다.

로드릭이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신경전을 벌이던 오테르와 테이오스는 이내 서로에게서 멀어졌다.

“하! 영감이랑 말 섞어봤자 시간 낭비지.”

“내가 할 소리다. 그나저나…….”

고개를 돌린 테이오스는 특유의 뱀처럼 핥는 눈으로 로드릭을 훑었다.

“로드릭. 변했군.”

“……뭐?”

“전에는 불꽃에 좀 더 끈적한 느낌이 있었는데 말이야. 나랑 비슷한 느낌이. 그게 없어지니, 그냥 평범한 마법사가 되어 버렸어. 개인적으로 실망이 커.”

로드릭은 심장이 철렁하는 기분을 느꼈다.

‘설마 로잘리아 님의 불꽃이 사라진 걸…… 아니. 이전에도 알고 있었다고? 본인과 비슷하다는 건…….’

머리가 복잡했지만 정작 테이오스는 로드릭에게 흥미를 잃었다는 듯.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때.

황제, 레온 그레이스 클로딘이 들어왔다.

귀족들은 대화를 멈추고 황제를 향해 몸을 낮추며 극진한 예를 표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황제가 입을 열었다.

“내가 왜 불렀는지 혼란스럽겠지.”

황제는 귀족들의 표정을 훑어보며 분개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남부 왕국 놈들이 내 권고를 무시하고 전쟁을 지속하는 걸 참을 수 없네. 이건 감히 제국의 권위를 짓밟는 행위이자, 나를 무시하는 행위야. 반인반신인 이 나를! 고로 나는 조만간 왕국들을 향해 마지막으로 경고할 것이다.”

당황한 귀족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웅성거렸다.

황제는 그런 반응에 신경 쓰지 않으며 이어 말했다.

“만약 왕국이 내 경고를 따르지 않으면, 나는 직접 그들에게 제국의 권위를 보여주겠다. 실로 오랜만의 전쟁인 것이지.”

“폐하!”

“그대들도 제국의 일원으로서 미리 전쟁을 준비하도록.”

그걸 황제는 입을 다물었다.

이견은 받지 않겠다는 완고함.

귀족들은 그 태도에서 그들을 불러모은 게 회의를 위해서가 아닌, 그저 통보하기 위함임을 깨달았다.

황제가 손을 내저었다.

명백한 축객령에 서로 눈치를 살피던 귀족들이 우르르 몰려나갔다.

로드릭도 혼란스러운 마음을 부여잡고 걸음을 옮겼다.

‘젠장! 이번 황제는 미쳤어! 전쟁을 막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다니! 정녕 그 사내 말대로 된단 말인가!’

뭐가 됐든 어서 영지로 돌아가야 한다.

황제에 맞설 대책을 꾸리려면 생각해야 할 게 너무 많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권태롭게 앉아 있던 황제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로드릭.”

화들짝 놀란 로드릭이 몸을 돌렸다.

어느새 다른 귀족들은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그대. 무언가 바뀐 것 같군.”

테이오스와 비슷한 말이었다.

로드릭은 속으로 신음을 삼키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하. 나이가 들면 사람은 변하는 법이지요.”

“흠. 뭐가 바뀐 걸까. 나는 그대 마음속에 그림자가 있다는 걸 알았네. 그 그림자가 걷혔어. 사람은 큰 사건을 겪지 않으면 변하지 않는 법인데……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피에람에서 흥미로운 일들이 일어났다고 하던가?”

로드릭은 침을 꿀꺽 삼켰다.

황제의 눈은 마치 그의 영혼을 꿰뚫어 보듯, 날카롭게 번뜩이고 있었다.

마치 달빛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눈동자.

로드릭은 저것과 똑같은 눈동자를 본 적이 있다. 그것도 최근에.

‘그런……!’

로드릭이 아무 말도 못 하자 황제가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게다가 지금은 불안감에 벌벌 떨고 있지. 아무래도 내 지시가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야. 그리고 마음이 조급해 보이는군. 어서 영지로 돌아가고 싶나 보지?”

“…….”

“말해보게 로드릭. 영지에 가서 무얼 할 작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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