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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48화 (149/222)

148. 황도로

로드릭이 떠난 지 2주째 되는 날. 플로라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아빠한테서 연락이 없어.”

“뭐?”

“황도에 도착했다는 편지는 받았는데, 그 후에 아무런 편지가 안 와.”

팔불출인 로드릭은 사흘에 한 번은 꼭 플로라와 아리사에게 편지를 보내곤 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이번에는 며칠간 아무런 연락이 없다고 한다.

‘바빠서 그런 걸까? 아니. 딸을 위해 어떤 짓이든 벌일만한 작자가 그럴 리 없지.’

그렇다면 가능성은 하나다.

로드릭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

플로라가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정말 네 말대로 폐하가 전쟁을 준비하는 거고…… 아빠는 회의에서 전쟁을 반대하다가 뭔가 잘못된 걸까?”

“그럴 가능성도 있지.”

“괜찮으시겠지?”

불안한 듯 흔들리는 플로라의 눈을 보며 이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은 괜찮으실 거야. 피에람 같은 대영주는 아무리 황제라도 대놓고 건드릴 수 없으니까. 나 같으면…….”

이안은 뒷말을 흐렸다.

당장은 괜찮아도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황제는 터무니없는 짓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를 수 있는 작자였다.

전쟁이 모두 준비될 때까지 로드릭을 감금해두거나, 더 극단적으로 가면 로드릭의 힘을 빼놓고 돌아가는 길에 암살자를 보내 처리하는 방법도 있다.

이안의 그런 침묵에서 불안함을 읽은 플로라의 얼굴이 더더욱 일그러졌다.

“어, 어떡하지. 엄마도 괜찮은 척하시지만, 엄청 걱정하시는 것 같고.”

“음…….”

이안은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 로드릭이라는 아군을 잃는 건 무척 큰 손실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로드릭은 피에람을 수십 년간 통치해온 영주.

그런 영주가 사라진다면 피에람도 안팎으로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렇게 두면 안 돼. 그리고 플로라를 생각해서도…….’

결심을 굳힌 이안이 플로라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가자. 황도로.”

“뭐?”

“정 걱정되면 직접 얼굴 보면 되는 거잖아?”

“아!”

플로라가 놀란 얼굴을 했다가 이내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도 돼?”

“뭐가?”

“너는 짜둔 계획이 있던 거 아니었어? 황도에 가면 계획이…… 그리고 황도는 너한테 위험하잖아.”

“정확히 말하면, 이제는 너한테도 위험하지.”

아직 플로라는 본인이 이안의 동료가 되었다는 자각이 부족했다.

이안은 플로라와 시선을 마주치며 이어 말했다.

“하지만 뭐. 위험은 언제나 감수하는 거고. 계획은 바꾸면 그만이니까. 걱정되잖아? 자식이 부모가 걱정된다는 데 가봐야지.”

“이안…….”

살짝 감동받은 얼굴로 플로라가 이안을 올려다봤다.

이안은 그런 플로라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여행 떠날 준비 해. 특히 황도를 불바다로 만들어야 할 수도 있으니까, 몸 관리 잘하고.”

“불…….뭐?”

“나는 들를 데가 있어서 가본다.”

멍하니 되묻는 플로라를 뒤로하고 이안은 분주히 걸음을 옮겼다.

***

이안은 예배당으로 가 아비게일에게 연락을 넣었다.

아비게일은 채 5분이 지나기도 전에 이안의 부름에 응답했다.

다크 서클이 진하게 내려앉은 눈가를 꾹꾹 누르며, 아비게일이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이안 님. 생각보다 빨리 찾아오셨군요.”

“예. 할 얘기가 있어서요. 그나저나 피로하신 모양이네요?”

“요즘 들어 황제 때문에 업무량이 급격하게 늘었거든요. 갑작스럽게 귀족들을 불러 전쟁에 대해 통보하다니. 이렇게 되면 귀족들의 반감이 커질 텐데…… 막무가내가 따로 없어요.”

“마침 제가 하려는 얘기도 그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눈가를 꾹꾹 누르던 아비게일이 안경을 고쳐 쓰더니, 흥미를 빛냈다.

“흐음. 무슨 말씀이신지?”

“지금 저는 로드릭에게 반쯤은 협조를 약속받은 상태입니다.”

“아. 그것참 힘이 되는 얘기군요. 피에람의 지원이라니. 좀 더 빨리 얘기했으면 정말 기뻤을 텐데요.”

아비게일의 눈동자가 한순간 날카로워졌다.

이안조차 찔끔할 정도로 살벌한 눈빛이었다.

“……그건 미안하게 됐어요.”

“괜찮습니다. 그래서요?”

“로드릭이 황도로 떠난 후로 연락이 끊겼습니다.”

“큰일이군요.”

아비게일은 지극히 건조하게 말했다.

“감금된 것일까요? 화제도 명분이 없는 한, 당장 해코지를 하지는 않았을 것 같지만…….”

“그 부분에 대해 조사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 황궁 쪽에 있는 정보원들에게 지시를 내려두겠습니다.”

아비게일은 재빨리 종이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그러고는 지나가는 어조로 물었다.

“그나저나 피에람의 가주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낸다면, 어쩔 작정이시죠? 설마 직접 황궁으로 쳐들어가 구출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으시죠?”

“그 설마가 맞습니다.”

툭.

아비게일의 손에 들려 있던 깃펜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안은 저게 아비게일이 경악했을 때 보이는 반응임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아비게일이 조금 날카로워진 어조로 말했다.

“위험합니다.”

“알아요.”

“황도는 적지입니다. 황제는 교단 내에서 결사대가 새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게 이안 님인 줄 모를 뿐이죠. 자칫 잘못하면 이안 님의 정체가 들통나고 맙니다.”

“예. 그 정도는 예상하고있습니다.”

“황도에는 괴물 같은 자들이 많습니다. 평생에 한 번 보기도 힘든 초인들이 제가 아는 것만 셋이 넘습니다. 그들을 이길 자신이 있습니까?”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는 몰라도 지금은 아니죠.”

“그렇다면 그 나중이 되었을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분명 로드릭을 잃는 건 뼈아픈 일이지만, 저희는 그 무엇보다 이안 님의 안위가 중요합니다. 당신에게 대륙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부디 재고해주십시오.”

아비게일은 고개를 푹 숙였다.

이안이 답을 해주기 전까지는 고개를 들지 않을 기세였다.

‘대륙의 운명이 달려 있다니…….’

부담스러운 얘기다.

오직 자신의 안위를 위해 악마와 싸울 결심을 하던 이안에게는 영 곤란한 말이기도 하다.

새삼 이런 중압감을 버텨내고 나아갔을 이네스가 존경스러워졌다.

이안이 머뭇거리자 이네스가 조언했다.

[앞으로 이런 부담감이 더 강해질 거예요. 하지만 한번 영웅이라는 걸 해보니…… 후회가 하나 남더라고요. 그냥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로 나아갔으면 어땠을까 하고요.]

천성적으로 심성이 고운 이네스는 남들의 부탁이나 기대를 외면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후회가 남았는가.

이네스는 이안이 자기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길 원치 않았다.

[그러니 이안도 이안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가세요. 저는 그게 제일이라고 봐요.]

이네스의 조언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사람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이 힘은 이네스의 목소리에 깃든 거인의 힘 덕일까, 아니면 그녀가 가진 영혼의 힘일까.

이안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네스 님 말이 맞아요. 욕 좀 먹더라도 제 뜻대로 해야죠. 어차피 욕먹는 건 익숙하고요.’

마음을 굳힌 이안이 아비게일에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그래도 가야겠습니다.”

“……뜻을 바꿀 생각은 없으십니까?”

“예. 그러니 교단에서는 제가 죽지 않게 최선을 다하세요.”

“터무니없는 지시를 내리시는군요. 아니, 협박이라 할까요?”

그렇게 말한 아비게일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권고를 듣지 않아 화를 낼 거라 생각했지만, 예상외로 아비게일은 별로 기분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그 부분이 의아해 이안이 물었다.

“별로 화가 안 나나 보네요?”

“화가 날 리가요. 이안 님은 신에게 선택받은 영웅입니다. 죽어서는 천국에 가 신의 옆자리에 오를 사람이지요. 이안 님의 뜻이 곧 신의 뜻을 대변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안이 검지로 볼을 긁적였다.

“음. 그렇게 거창하게 말하니 좀 부담스러운데. 고로 제가 하는 말은 무조건 복종한다는 건가요?”

“그런 셈이죠.”

“제가 지금 당장 죽으라고 말해도?”

“예. 하지만 이안 님이 그런 명령을 내리지 않을 거라고 믿습니다.”

능숙하게 이안의 말을 받아낸 아비게일이 홀로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한동안 숙면하기는 그른 것 같네요. 우선 황도로 가는 안전한 경로와 은신처, 현지 협력자랑 준비를…….”

“그리고 또 부탁할 게 있어요.”

“진짜 저를 과로로 죽일 작정이시군요.”

“황제가 전쟁을 벌이는 걸 최대한 방해해주세요. 적어도 올겨울까지는 버틸 수 있게.”

“겨울이라…… 이것 또한 어려운 지시군요.”

깃펜으로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인 아비게일이 말했다.

“교단을 통해 시민들 사이에서 반전 여론을 부추기겠습니다. 교황님께 건의해 왕국들을 직접 비난하게 할 거고요.”

“그 정도만 해도 큰 도움이 될 것 같네요.”

당장 교단이 왕국들을 비난하며 전쟁을 반대하는 스탠스를 강력하게 취해주면, 전쟁을 준비하는 황제에게도 압박이 될 것이다.

“왕국 내 교단 세력은 박살이 나겠지만, 어쩔 수 없는 희생이겠지요. 다만,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거, 잘 아시죠?”

“예. 저도 저 나름대로 방안을 생각해볼 겁니다.”

“방안이라…… 뭐가 됐든, 실행하기 전에 우선 저한테 연락해주시길.”

대화가 끝나자마자 아비게일은 연락을 끊었다.

그 깔끔함과 칼 같은 면이 오히려 더 믿음직스러웠다.

이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

새벽.

이안과 플로라, 그리고 스텔은 조심스럽게 저택을 빠져나왔다.

황제의 눈이 이쪽을 감시하고 있을 수도 있다.

낮에 대놓고 길을 나서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커다란 배낭을 짊어진 플로라는 긴장한 듯하면서도 묘하게 설렌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뭐, 뭔가 모험을 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하네.”

그런 플로라에게 이안이 핀잔을 주었다.

“애냐? 그보다 뭔 짐을 그렇게 많이 챙겼어. 꼭 필요한 것만 챙기라고 했잖아.”

“필요한 것만 챙긴 거야! 너랑…… 스텔 씨가 이상할 정도로 짐이 적은 거라고.”

플로라는 스텔을 슬쩍 쳐다본 뒤,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둘은 아직 많이 어색한 사이였다.

‘어쩔 수 없나. 워낙 성격이 극과극이니.’

과묵하고 무감정한 스텔과 다혈질이고 수다스러운 플로라는 서로의 대척점에 선 듯한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친해지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할 터.

‘아니. 친해지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아요. 적어도 서로 소통이 되는 수준은 됐으면 싶지만…….’

[사람 관계는 강요한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요. 어린애도 아니고요.]

어째 갈수록 신경 써야 할 게 늘어나는 기분이다.

한숨을 푹 내쉰 이안은 플로라에게서 가방을 뺏어 들고는 성큼성큼 앞서나갔다.

“빨리 가자. 이러다 해 뜨겠다.”

“어, 어. 고마워…….”

몰래 저택을 나서고, 도시의 골목길로 움직여 성벽까지 다다랐다.

성벽에는 본래 보초를 서고 있어야 할 경비병들이 없었고, 줄 사다리 하나가 걸려 있었다.

미리 얘기된 대로였다.

“먼저 올라가서 살펴볼게. 내가 신호 주면 따라서 올라와.”

이안은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타고 올랐다.

역시나 보초는 보이지 않았다.

이안은 아래쪽을 향해 신호를 보냈다.

곧 플로라와 스텔이 차례대로 성벽 위로 올라왔다.

“와아.”

플로라가 작게 감탄했다.

달빛에 비친 밭과 숲, 그리고 민가들.

이렇게 성 위에 올라 도시의 주위를 둘러본 건 어렸을 적 이후로 처음이었다.

플로라가 조금 복잡한 감정을 담아 말했다.

“뭔가 오늘 떠나면 다시는 이 풍경을 못 볼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

이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꽤 정확한 직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되면, 이런 평화로운 분위기는 더는 보지 못할 테니.

“마음 단단히 먹어. 이런 평화로운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유지하려면, 네 아빠를 구해야 하니까.”

“……응.”

이제는 위험한 여정을 떠나야 할 시간이다.

셋은 적지라 할 수 있는 황도로의 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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