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황도로 (2)
성벽에서 조금 떨어진 수풀 속에 마차가 숨겨져 있었다.
감시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마련한 허름한 마차에 플로라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왜. 이런 허름한 마차로 여행하는 건 처음이야?”
“으응.”
“앞으로 걸어 다녀야 할 일도 많으니 이 정도는 익숙해져야 해.”
플로라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모험을 떠난다는 마음에 조금 들떴던 마음이 빠르게 가라앉고 있었다.
“어서 가자. 새벽 내내 부지런히 가야 해.”
이안이 마부석에 앉아 고삐를 쥐었다. 스텔은 주저 없이 그런 이안의 옆 좌석에 앉았다.
플로라의 미간을 좁혔다.
“잠깐. 이러면 내가 앉을 자리가 없잖아.”
“뒤에 타. 뒤가 편해.”
“…….”
플로라는 뭔가 마음에 안 드는지 팔짱을 끼며 스텔을 한참이나 쳐다봤다.
스텔은 멍한 얼굴로 플로라의 시선을 받아냈다.
한참 서 있던 플로라가 뭔가 결심한 듯, 이안과 스텔의 중간에 비집고 들어왔다.
“야. 뭐 하는 거야.”
“나도 앞에 탈 거야.”
“아니. 애냐?”
하지만 플로라의 태도는 완고했다. 이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에휴. 그래. 조금 불편한 수준이니까.’
설득을 포기한 이안은 호크를 소환해 말들의 앞을 매돌 게 시킨 뒤, 마차를 몰았다.
밤에도 밝게 빛나는 호크를 보며 플로라는 감탄했다.
“와아. 예쁘다…….”
“밤길을 달리면 자칫 말들이 발을 헛디디거나 걸려 넘어질 수 있거든. 제대로 불을 밝혀줘야 해.”
이안이니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이안은 한 손으로는 고삐를 쥐고, 다른 손으로는 지도를 펼쳐 들었다.
‘여기로 올 때 사용했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가는 게 안전하단 말이지.’
황도까지는 빠르게 간다면 닷새 만에 도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좀 더 안전한 루트로 돌아가면 여드레는 가야 했다.
지금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건 안전이다. 이안은 아비게일의 조언에 따라 안전한 경로로 가기로 했다.
계획을 다시 한번 되짚은 이안은 그렇게 밤새도록 마차를 몰았다.
분명 잠을 못 자 피로함을 느끼는 일은 이제 없었다.
향상된 신체 능력은 사흘을 잠을 자지 않아도 괜찮을 정도로 힘이 넘쳤다.
‘마음 같아서는 진짜 쉼 없이 가고 싶지만…….’
자신은 괜찮아도 마차를 모는 말들은 쉬어줘야 한다.
게다가 플로라의 상태도 영 좋지 않았다.
“우, 우웁. 너무 흔들리잖아.”
일부러 허름한 마차를 고른 만큼, 승차감이 그리 좋지 못했다.
난생처음 겪어보는 멀미에 힘들어하는 플로라의 얼굴이 검게 변했다.
마차를 멈춘 이안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기 가서 게워내고 와.”
“그, 그렇게 품위 없는 짓은…….”
“빨리. 어차피 주변에 아무도 없잖아.”
“……보면 안 된다?”
“보라고 해도 안 봐.”
슬쩍 이안의 눈치를 살핀 플로라가 어딘가로 총총 사라졌다.
한가해진 이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마차가 멈춘 곳은 일전에 샐러맨더를 마주쳤었던 장소였다.
강철 기사단과 흑기사가 사투를 벌였다던 폐허.
이안은 무너진 성벽에 남은 싸움의 흔적들을 다시 한번 살폈다.
검기가 지나간 듯한 자국이 어지럽게 얽혀 있었다.
이안은 그 흔적들을 꼼꼼히 눈에 숙였다. 그러자 어느 순간, 머릿속에서 상상이 되기 시작했다.
그날 있었던 일들에 대해.
어느새 나타난 흑기사 거대한 대검을 휘둘렀다.
‘범위가 넓은 커다란 공격이 대다수네. 이건 게임대로인가.’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흑기사를 향해 달려든다.
흑기사의 검광은 닿는 모든 걸 갈라 버리지만 주저하는 이는 없다.
검이 어지럽게 얽혀든다.
이안은 그다음을 상상했다.
‘이 흔적은…… 검광을 다루는 건 흑기사뿐만이 아니었어.’
검광을 다루는 기사가 적어도 하나나 둘이 있었다.
그렇기에 흑기사라는 절망적인 적을 상대로도 버텨낼 수 있었던 거다.
상상을 거듭하던 이안은 무아지경에 이르렀다.
성벽에 남은 싸움의 흔적들은 그날의 장면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흑기사가 단칼에 기사 셋을 갈라 버렸어. 패색이 짙다. 기사들이 후퇴하기 시작했어. 하지만 어떻게 도망치지?’
등을 보이고 도망치는 적은 손쉬운 먹잇감일 뿐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강철 기사단의 전멸할 터였다.
‘아니. 한 명이 뒤에 남았어. 검광을 사용할 수 있는…….’
그 뒤로 흔적이 끊겼다. 흔적이 없으면 더는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강철 기사단이 전멸하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건, 마지막에 남은 기사가 성공적으로 흑기사를 막아냈다는 뜻 일터.
“후우.”
상상을 끝낸 이안은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어느새 온몸이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정신을 집중해 상대의 검이 어디로 향할지 예상하는 기술은 이런 식으로 흔적을 읽고, 과거를 상상하는데에도 활용할 수 있었다.
늘어난 신체 능력으로도 버티기 버거울 정도가 체력 소모가 극심해서 문제였지만.
옆에 서 있던 스텔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괜찮아?”
“어. 그냥 조금 피곤한 거야.”
“기적, 걸어줄까?”
“그 정도는 아니야.”
스텔의 호의를 거절한 이안은 착잡한 얼굴로 주위 흔적을 살폈다.
‘그날 대체 이곳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싸움의 양상은 상상할 수 있어도, 구체적인 속사정까지는 알 수 없다.
이안은 무너진 성터를 멍하니 보았다.
한때 사람들이 살았을 곳이 텅 비어 있는 모습은 다시 봐도 씁쓸함을 불러일으켰다.
그때. 폐허의 구석진 자리에 하얀 꽃이 피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안은 그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자연적으로 자란 것이 아니라 누군가 심어놓은 꽃이었다.
게다가 흙의 상태를 보면 심은 지 얼마 안 된 상태였다.
‘누가 이런 걸 심어놓은 거지? 기사들이라도 왔다 간 건가?’
누가 심었는지는 몰라도 손재주가 영 별로였다.
아무렇게나 심긴 꽃들은 좋게 말해도 가지런한 모양새는 아니었다.
그래도 그런 투박함에서 오히려 그 사람의 정성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흥미를 빛내며 꽃을 살펴보던 이안은 꽃들에 가려진 성벽의 한 부분에 글자가 쓰여 있는 걸 발견했다.
이안은 조심스레 꽃을 밀어 글자를 읽었다.
“당신을 절대 잊지 않으리라 - E.W”
꽤나 비장한 말이었다.
‘연인이라도 되나 보지? 기사들중에서도 로맨티스트가 있는 모양이군. E.W가 누구지?’
당장 떠오르는 건 없었다.
이안이 끙끙거리며 고민하고 있던 그때, 많이 수척해진 플로라가 비척비척 걸어왔다.
“……기다렸지?”
“다 게워냈어?”
“어찌저찌.”
“옷에는 안 묻었지?”
“안 묻었어!”
과민하게 반응하는 걸 보니, 조금 묻긴 한 모양이다.
이안은 모르는 척해주는 관용을 베풀어주었다.
“가자. 좀만 더 가면 마을이 나오니 거기에서 좀 쉬자.”
“으응.”
“마차를 너무 거칠게 몰았나? 좀 천천히 가도 되는데.”
“아니야. 빨리 가야지.”
플로라는 수척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붙잡혀 있을 로드릭이 많이 걱정되는 듯했다.
오히려 플로라는 고개를 피며 허세까지 부렸다.
“이제 익숙해졌어. 더 거칠게 몰아도 상관없으니, 어서 가자고!”
“……진짜?”
“응! 이제 멀미는 다 극복했어!”
“흐음.”
고삐를 쥐고 잠시 머뭇거리던 이안은 기꺼이 플로라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마차가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플로라는 몇 분도 버티지 못하고 항복을 선언했다.
***
피에람을 벗어난 일행은 곧장 황도를 향해 북상했다.
최대한 속도를 올려 빠르게 나아간 결과, 일행은 황도의 남서쪽에 있는 도시. 리브네에 도착했다.
구체적인 계획이 정해지기 전까지, 일행은 리브네에서 머물 생각이었다.
이안은 스텔과 플로라에게 당부했다.
“알겠지? 로브는 벗으면 안 돼. 나와 스텔이야 얼굴이 안 알려져 있지만, 네 빨간 머리는 누가 보더라도 피에람이니까.”
“알았어 알았어. 몇 번을 잔소리하는 거야. 나를 못 믿는 거야?”
“……너라면 믿겠냐.”
“으윽.”
이안은 그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이렇게 자신감 넘치는 플로라는 꼭 헛발질을 한 번씩 한다는 걸.
“진짜 염색약을 사든지 해야지. 일단 검문받아야 하니까 조용히 있어.”
“……알았어.”
신신당부한 이안은 도시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경비병에게 교단에서 받은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흠. 교단의 사제님들이시군요…….”
신분증을 빤히 들여다보는 경비병이 뭐라 말하기 전에, 스텔이 경비병에게 치유의 기적을 걸어주었다.
몸을 감싸는 은은한 빛무리와 씻녀가나는 피로를 느끼며 경비병이 탄성을 내뱉었다.
“허, 허억!”
“놀라지 마십시오. 그저 시민들을 위해 불찰주야 일하시는 분들께 보이는 작은 호의니까요.”
이안이 미리 준비한 대사를 읊자 경비병이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아아! 감사합니다. 신의 축복이 함께 하시길!”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순식간에 경비병의 마음을 산 이안이 은밀하게 물었다.
“그나저나 요즘 리브네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남부의 왕국들은 전쟁 때문에 난리던데.”
경비병은 별 의심 없이 답했다.
“아아. 왕국 놈들. 그거 순 나쁜 놈들이죠. 욕심을 못 이겨 전쟁이나 벌여서 대륙의 평화를 어지럽히고. 지금도 매일 사제님들이 광장에서 왕국 놈들을 비난하는 연설을 계세요.”
“그렇습니까?”
아비게일에게 했던 요구가 잘 이뤄지고 있는 모양.
이안이 경비병의 말을 받았다.
“하긴. 제국민처럼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잘 없지요.”
“예! 왕국 놈들도 우리 제국의 반만 닮았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쨌든 리브네에는 별일 없다는 거죠?”
“예. 요즘 강철 기사단 분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시고 검문이 까다로워진 걸 제외하면…… 아. 마침 저기 오시네요.”
경비병이 이안의 뒤쪽을 가리켰다.
전신을 판금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이 말을 몰고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갑옷에는 두 자라의 검과 창 한 자루가 교차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강철 기사단의 문양.
이안은 황급히 말했다.
“저희는 일이 바빠서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 리브네에서 평안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이안은 마차를 몰아 얼른 성안으로 들어갔다.
괜히 황제의 측근인 강철 기사단과 마주쳤다가는 골치 아파질 가능성이 컸다.
‘원래 이곳에 강철 기사단의 본부가 있었다고 했지.’
당분간 숨어지낼 때 매우 조심해야 할 이유였다.
이안은 가장 먼저 교단의 예배당에 들렀다.
미리 얘기를 전해 받은 사제들은 이안 일행에게 숨어 지낼 은신처와 아비게일이 보낸 편지를 건네주었다.
이안은 편지를 한번 쭉 읽고 그대로 태워 버렸다.
편지에는 로드릭의 소재에 대해 적혀 있었다.
‘로드릭이 황궁의 별관에 감금되어 있다라.’
구체적인 위치를 알아냈다.
이제는 구출 계획을 세울 때다.
***
“왜 그러십니까?”
강철 기사단원은 말을 몰다 말고 성문 쪽으로 시선을 고정한 동행을 향해 물었다.
웬 허름한 마차가 도시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수상한 사람들입니까? 당장 데려오겠습니다!”
기사가 당장에라도 달려나갈 듯이 굴자, 동행이 황급히 말렸다.
“아뇨. 아닙니다. 혹시 아는 사람일까 싶어 살펴본 건데, 잘못 본 거겠지요.”
“그렇습니까? 그러면 오늘은 그만 들어가서 쉬시지요. 곧 황궁으로 떠나셔야 하니 말입니다.”
“저는 딱히 황궁으로는…….”
“폐하의 명입니다.”
몹시 공손한 어조지만 반박을 허용하지 않는 목소리.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승낙을 받았다고 여긴 기사가 말했다.
“그러면 이만 안으로 드시지요. 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