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황도로(3)
“전쟁은 추악한 짓이다! 얼마나 많은 무고한 생명들이 전쟁에 희생되는가!”
“전쟁은 악마의 재림을 앞당긴다! 신께서는 왕국의 만행을 용서치 않을 것이다!”
사제들의 연설에 광장에 모인 시민들이 열렬한 호응을 보였다.
“옳소! 전쟁 같은 건 악마나 하는 짓이라고!”
“멍청한 왕국 놈들!”
‘아무래도 순조롭게 여론을 움직이고 있군.’
아무리 황제라도 시민들의 의견을 완전히 무시하기 어렵다.
반전 여론이 퍼질수록 황제는 전쟁을 준비하는 게 더 부담스러워질 것이다.
광장을 지난 일행은 교단에서 준비해준 은신처로 향했다.
마차는 혹시 눈에 띌까 봐 우려돼 교단에 양도했다.
은신처는 골목 깊숙한 곳에 있었다.
겉보기로는 평범한 민가로 보이는 곳에 들어간 이안은 곧장 문을 걸어 잠근 뒤, 스텔과 플로라를 책상으로 모았다.
이안은 스텔과 플로라의 얼굴을 한번 살핀 뒤 말했다.
“로드릭의 위치를 알아냈어.”
“뭐? 어, 어디에 계시는데?”
“황궁의 별관에 감금되어 있대.”
“황궁…….”
플로라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녀도 잘 안다.
이 세상에서 황궁만큼 방비가 단단한 곳도 없다는 걸.
그곳에서 로드릭을 구출해내는 게 얼마나 힘든지도 잘 알았다.
“어떻게 하지…….”
“그걸 이제부터 고민해볼거야.”
원래라면 이안은 홀로 계획을 세우곤 했다.
하지만 이제 이안은 혼자서 움직이지 않는다.
동료가 둘이나 생긴 만큼, 그 의향을 존중해줘야 했다.
‘여럿이 고민하면 더 좋은 생각이 떠오를 수도 있고.’
잠깐의 침묵 후.
충분히 고민할 시간을 줬다고 생각한 이안이 우선 스텔에게 물었다.
“뭐 떠오르는 거 없어?”
스텔은 이안은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렇게 한참이나 쳐다본 스텔이 이내 입을 열었다.
“……나는 이안이 하자는 대로 할래.”
“아. 그래. 그거 고맙네.”
이안은 떨떠름하게 답했다.
자신에 대한 이 두터운 신뢰는 무척 감사할 일이지만, 의견으로서의 가치는 썩 없었다.
다음은 플로라의 차례였다.
허당이기는 해도, 기본적으로 머리가 좋은 플로라다.
어쩌면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을 수도 있다.
이안의 시선을 받은 플로라가 머뭇거리며 답했다.
“내부에서 협력을 받을 수 없을까? 안쪽에서 구출해내는 게 가장 가능성 있어 보이는데.”
“확실히.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안쪽에서 밖으로 나가는 게 더 쉽기는 하겠지.”
분명 황궁 안에도 교단의 정보원들이 있을 거다.
하지만 그들이 로드릭을 구출해낼 만한 역량이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기 힘들었다.
“좀 힘들 것 같은데. 결국에는 우리가 해야 해.”
“그런가? 끄응. 그나마 별관은 방비가 덜하겠지만…….”
여러 가지로 고민해봤지만 딱 떠오르는 건 없었다.
밤새도록 이어진 회의 끝에 나온 결론은 하나였다.
“결국은 과격한 방법으로 갈 수밖에 없는 건가.”
***
황궁의 별관.
그중 가장 안쪽에 위치한 방에서 로드릭은 답답하게 서성거리고 있었다.
‘황제는 완전히 미쳤어.’
설마 이렇게까지 과격하게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역대 황제들은 모두 피에람의 가주에게 그에 걸맞은 합당한 예우를 해주었다.
이번 황제는 아니었다.
‘아니. 이건 내 부족함 탓이야.’
시대를 막론하고 피에람의 가주들은 하나같이 천재적인 재능으로 초인의 영역에 오른 마법사였다.
역대 황제들은 가문의 힘과는 별개로, 그런 초인들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을 거다.
하지만 로드릭은 달랐다.
로드릭은 분명 일반 마법사치고는 뛰어났지만, 피에람의 가주라고 부르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그런 로드릭을 보며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흉을 보았다.
피에람이 지는 해라고 지껄이는 이들도 있었고, 호시탐탐 피에람의 이권을 넘보는 승냥이들도 있었다.
전부 로드릭이 강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문제였다.
그렇기에 플로라가 태어났을 때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그녀가 그 로잘리아에게도 비견될 정도의 천재라는 걸 깨달은 순간, 로드릭은 딸을 위해서 어떤 짓이든 하겠다고 맹세했다.
그게 딸을 통해 자신의 열등감을 해소하려는 한심한 행동이었다는 걸 이제는 깨달았지만…….
로드릭은 이마를 벽에 기대었다.
‘좀 더 신중했어야 해. 예전부터 기묘할 정도로 눈치가 빠른 분이라는 건 알았지만…….’
영지와 가족들이 걱정되었다.
아리사도 최소한의 영지 운영이 가능하지만, 가주인 로드릭에 비해서는 당연히 손색이 있었다.
게다가 곧 세상에 격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 거대한 파도에 맞서려면 준비할 게 너무나 많았다.
‘그 사내의 말을 믿었더라면……!’
이안의 얼굴이 떠오르며, 새삼 그가 뱉은 예언들을 믿지 못한 게 후회되었다.
분명 실력과 배경은 확실한 인물이었거늘…….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누구십니까.”
“황제.”
장난스러운 대답에 잠깐 굳었던 로드릭이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황제가 문 앞에서 멀뚱히 서 있었다.
“감금되어 있는 저에게 친히 노크까지 해주시다니. 참으로 자애로우시군요.”
“하하. 너무 그렇게 비꼬지 마시오. 그리고 감금되어 있다니! 이 문은 잠겨 있지 않다오!”
로드릭은 미간을 좁혔다.
그는 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황제의 말장난에 어울려주고 싶지 않았던 로드릭이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십니까?”
“그저 가주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나 싶어 찾아온 것뿐이오. 피에람은 제국의 역사와 함께해온 명문가가 아니오? 왜 나의 뜻에 반대하는 것이오?”
로드릭은 인상을 찌푸리며 즉답했다.
“전쟁을 막기 위한 전쟁이라니! 그런 명분이 통할 거라고 보십니까? 그것보다 귀족들을 그런 식으로…….”
말을 내뱉던 로드릭이 은은하게 미소짓는 황제를 보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설마 폐하께서도 다 아시고 벌인 짓입니까? 그렇다면 왜…….”
“글쎄. 대의를 위해서.라고 답하면 이해하겠소?”
“대의. 말씀입니까?”
황제는 대답 대신 장난스럽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영지에서 플로라 양의 모습이 안 보이더군. 대체 언제 빠져나간 것인지. 귀신같은 솜씨요.”
로드릭은 심장이 덜컥 내려 앉은듯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입은 곧바로 적당한 답을 만들어냈다.
“아마 코르디스로 돌아간 것이겠지요. 슬슬 공사도 끝날 시기라 하니.”
“그렇소? 그럴 수도. 나도 그러길 진심으로 바라오.”
황제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녀는 아름답고, 실력 있고, 천성적으로 선하지. 아쉽게도 내 반려로는 좀 부족하지만 말이오…… 나는 좀 더 기품이 있는 이가 좋소.”
“아주 다행입니다. 제 부족한 딸이 마음에 안 차시다니. 저도 황가의 피를 사위로 들이는 건 영 부담스러워 말이지요.”
로드릭의 뾰족한 대꾸에도 황제는 그저 웃어 보였다.
“어쨌든, 제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인재인 건 확실하지. 그런 사람을 내 손으로 베고 싶지는 않소. 그러니 다시 한번 묻겠소. 플로라 양은 어디로 간 것이오?”
황제의 두 눈이 밝게 빛났다.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
하지만 로드릭은 이제 저 눈빛에 대처하는 법을 대강 알아차렸다.
로드릭은 마음속 불꽃을 일으켜 속마음을 숨겼다.
그러곤 짧게 대꾸했다.
“글쎄. 여기서 내보내 준다면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하하. 그래도 피에람의 가주라 이거군. 알겠소. 예측 못 할 변수는 삶을 재미있게 해주는 법이지. 그대의 딸이 과연 어떤 짓을 저지를지. 기대해보겠소.”
그 말을 끝으로 황제는 방을 나섰다.
처음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위풍당당한 걸음걸이로.
문이 닫히자 로드릭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간신히 유지해오던 표정도 더는 통제할 수 없었다.
로드릭은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제발 못난 아빠를 위해 무모한 짓은 하지 말아주렴. 플로라.”
***
결국, 이안은 과격한 방법 외에는 답이 없다는 걸 인정했다.
긴 고민 끝에 이안이 말했다.
“자. 들어봐. 곧 있으면 제국 건국 기념제잖아?”
“……어. 확실히 얼마 안 남긴 했네.”
“축제 동안은 황도가 시끌시끌할 거란 말이지. 황제는 아마 이곳에서 전쟁 준비를 선포할 거고. 이때를 노려야 해.”
“감시가 느슨해지니까 말이지?”
“그래.”
건국 기념제가 되면 온 제국이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다.
이안이 아직 칼날 형제단에 붙잡혀 노예 생활을 하던 그때에도 건국 기념제에는 제대로 된 음식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그런 깡촌 마을도 그랬는데, 제국의 황도가 어떤 분위기인지는 말할 것도 없을 터.
‘평소보다 많은 손님을 받아야 하는 황궁은 경계를 더 단단히 하겠지만, 당연히 한계는 있겠지.’
냉정하게 계산을 마친 이안이 말했다.
“새벽. 축제의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 네가 황궁의 본관을 향해 마법을 날려.”
“뭐, 뭐?”
“아무리 마법적인 방비가 잘 되어 있어도, 네 한방에 얻어맞으면 멀쩡할 리가 없잖아. 그렇지?”
“그렇긴 한데…….”
플로라는 썩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
평생을 제국의 일원으로써 긍지를 갖고 있던 만큼, 황궁에 테러를 가한다는 것에 거부감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플로라는 이내 마음을 다 잡았다.
‘어리광을 부릴 수 없지.’
플로라는 안다.
굳이 이안이 위험을 감수하고 로드릭을 구축하려는 데에는 자신의 심정을 고려한 것이기도 하다는 걸.
그렇기에 더는 어리광을 부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알았어. 큰 거 한 방 먹이면 되는 거지?”
“그래. 네가 시선을 끌어주면 그때 내가 별관에 잠입해서 네 아빠를 구출할게. 일단 기본 골자는 이거야.”
단순한 계획이다.
하지만 쓸데없이 복잡한 계획보다는 오히려 이쪽이 가능성 있어 보였다.
물론 계획의 성공 확률을 올리기 위해서라면 세세하고 꼼꼼한 준비가 필요하겠지만…….
그건 지금부터 생각해 나갈 문제였다.
“좋아. 그럼 계획을 교단 쪽에 전달해놓을게. 집 잘 지키고 있어…….”
이안이 일어서려던 그때였다.
똑똑.
“계십니까?”
갑작스럽게 들려온 소리에 모두가 굳었다.
이안과 플로라가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누, 누구지?”
“교단 쪽 인물은 아니야. 정해진 암구호를 안 말하니까. 골목길을 빙빙 돌아야 올 수 있는 이곳에 굳이 찾아온 거 보면…… 평범한 놈들은 아닐 확률이 높고.”
“안에 계신 거 다 압니다! 굴뚝에서 연기 피어오르는 거 다 알고 온 겁니다!”
문을 두드리는 낯선 이가 점점 재촉해온다. 이안은 감각에 온 신경을 집중해 주위의 기척을 느꼈다.
‘문 앞에 세 명. 그 외에 여섯 명 정도가 집을 포위하고 있어. 걸을 때마다 금속 부딪히는 소리가 나. 갑옷인가? 그렇다면 기사라는 소린데.’
이안은 고민했다.
‘곧바로 도망칠까? 아니. 그러면 오히려 더 많은 기사들에게 추격당할 수 있어.’
답은 빠르게 나왔다.
이안은 플로라에게 손짓했다.
“숨겨진 방으로 가. 너는 너무 눈에 띄어.”
“너, 너랑 스텔 씨는?”
“아무리 기사라도 사제를 함부로 건드릴 순 없으니 걱정 마. 빨리 숨어!”
플로라는 바닥에 깔린 카펫을 들춘 뒤, 그 아래에 있는 문을 잡아당겼다.
그 사이, 이안과 스텔은 서둘러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 안 여시면 부숩니다?”
“잠깐 기다려주십시오! 바로 열겠습니다!”
이안은 다급한 척 연기하며, 플로라와 자신의 옷과 머리를 일부러 마구 헝클어트렸다.
스텔은 그런 이안을 의아하게 쳐다봤지만, 이안의 손길에 순순히 몸을 맡겼다.
이내 준비가 끝나고 문을 열자 판금 갑옷을 입은 기사의 몸이 드러났다.
투구를 써 완전히 얼굴을 가린 기사가 이안을 보며 말했다.
“아. 딱 문을 부수기 전에 나오셨군.”
“기, 기사님께서 무슨 일입니까?”
이안의 연기에 비웃음을 흘린 기사가 말했다.
“자세히 말해주기는 힘들고, 수배 중인 사람을 찾고 있다는 것만 알도록.”
“무슨……!”
이안은 항변하려 했지만, 그 전에 다른 기사들이 우르르 집안으로 몰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