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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51화 (152/222)

151. 황도로(4)

기사들이 집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처음 문을 열었던 기사가 이안과 스텔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늦게 나온 거지? 혹시 뭐 숨길 거라도 있었나?”

투구 속에서 날카로운 안광이 엿보였다. 이안은 곧바로 대꾸했다.

“……남녀 사이의 일인지라, 대답하기 곤란하군요.”

“뭐?”

기사는 이안과 스텔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깨달았다. 둘의 머리나 옷이 흐트러진걸.

이안의 말뜻을 이해했는지, 기사가 헛기침을 하며 미안한 기색을 보였다.

전부 이안의 계산대로였다.

“흠흠. 아무래도 좋은 시간을 방해한 것 같군. 하지만 이해해줘. 우리도 일이라서.”

“이해합니다.”

“그러면 우선 신분 조사부터 하지.”

이안은 교단의 상징과 신분을 증명해줄 증명서를 보여주었다.

기사는 증명서를 꼼꼼히 살폈다. 혹여나 조작되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듯했다.

그렇게 한참을 조사하던 기사는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분은 사제셨군. 그리고 그쪽은 호위?”

“어렸을 적부터 수도원에서 함께한 사이지요.”

“선교를 위해 대륙을 돌아다니다, 마침 건국제라 황도로 가고 있다라…… 이곳은 미리 황도로 여행 간 친척의 집이라는 거지?”

기사는 교단에서 미리 준비해 둔 거짓말을 곱씹었다.

딱히 흠잡을 만한 곳은 없었다.

이안은 그런 기사에게 역으로 물었다.

“그나저나 대체 누구를 찾으신다는 건지…… 그리고 왜 하필 이 집에 찾아오신 겁니까? 혹, 친척이 무언가 잘못이라도 한 겁니까?”

“아냐아냐. 그냥 신고가 들어왔을 뿐이니까 신경 쓰지 마.”

이안의 완벽한 연기에 기사는 속으로 혀를 찼다.

‘허탕인가.’

아무리 봐도 이상한 건덕지가 없었다.

사제가 신성을 쓰는 것까지 확인했으므로, 신분은 진짜일 터.

헛수고를 했다는 생각에 골치 아파하는 기사를 보며 이안은 속으로 생각했다.

‘신고가 들어갔다고 하네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교단에서는 황궁에 정보원을 두고 있다면, 그 반대도 당연히 있지 않겠어요?]

‘역시 그런가요.’

즉, 이곳 리브네의 예배당에 배신자가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이안은 천천히 상황을 살폈다.

‘자, 이제 어떻게 한담.’

이안의 예상으로 그들이 찾고 있는 건 바로 플로라일 것이다.

아무리 꽁꽁 숨겨도, 지금쯤 플로라가 영지에 없다는 걸 알아차렸을 테니 말이다.

‘플로라처럼 움직이는 병기에는 특히 관심을 더 기울였겠지.’

감금된 로드릭과 곧이어 사라진 플로라.

누가 봐도 이 둘 사이에는 관계가 있었다.

황제가 비공식적으로 수배를 내리는 건 당연할 것이다.

‘웬만하면 안 들킬 것 같긴 한데…….’

잘 만들어진 은신처다.

플로라가 숨은 공간도 신성을 이용해 그 입구가 은폐되어 있다.

웬만큼 뛰어난 직감이 아니면 발견할 수 없을 터.

그걸 생각한다면 가만히 있는 게 맞았지만…….

‘과연 없다고 그냥 순순히 돌아갈까?’

이안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눈에 집중해 상대의 영혼을 살폈다.

탁하고 흐린 영혼.

명확하게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지만 계속해서 색이 변하고 있다.

이런 모호한 사람일수록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안은 내심 긴장하며 기사들이 그냥 나가주기를 기대했다.

긴 수색이 끝나고.

온 집안을 헤집은 끝에 기사들이 다시 돌아왔다.

“리어폴드 경! 수상한 건 없습니다! 정말로 평범한 민가입니다!”

“끄응.”

보고를 받은 리어폴드라는 이름의 기사가 침음을 흘리며 투구를 툭툭쳤다.

“아 이거 곤란한데. 너네들 끌고 나갔다가 별 성과 없으면 위에서 지랄한다고.”

“죄, 죄송합니다.”

“아니아니. 너희 탓하는 건 아니고. 흠…….”

무언가를 생각하던 기사가 이안에게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향하는 건 이안의 허리춤에 메인 검집.

기사가 물었다.

“검사인가 보지?”

“예, 그렇습니다.”

“실력은?”

“성기사를 목표로 하고 있지만 아직은 미숙합니다.”

“좋네. 예비 성기사와 사제 부부라. 아주 축복받은 인연이야! 음음!”

이안은 갑작스럽게 화제를 돌리는 기사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어, 그, 감사…….”

그 순간.

이안은 곧바로 성검을 뽑았다.

카앙!

빠르게 휘둘러져 오는 검이 성검에 부딪혔다.

이안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상대를 노려봤다.

기사가 폭소를 터트렸다.

“하하하! 그래! 이럴 줄 알았어! 역시 평범한 놈이 아니었구나?”

“무슨…….”

“성기사 지망? 내 기습을 막아낸 놈이 겨우 그 정도 일 리 없지. 진짜 정체를 밝혀 이 자식아!”

리어폴드의 외침과 함께 보고 있던 다른 기사들도 일제히 검을 뽑았다.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어이없는 표정을 한 이안이 기사에게 물었다.

“내가 실력이 떨어지거나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어쩔 작정이길래 이렇게 막무가내로 검을 휘두르는 거야.”

“그거야…… 뭐. 일어나지 않은 일을 가지고 고민하는 건 나답지 않아서 말이야.”

리어폴드가 어깨를 으쓱하자, 이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막연하게 강철 기사단을 좋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한때 이안이 종자 노릇을 하던 에스테반도 강철 기사단 소속이었다.

에스테반은 머리에 나사가 빠진 인간이었지만, 그래도 따뜻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기사들에게서 그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리어폴드가 말했다.

“아무래도 순순히 정체를 불 생각은 없나 보지? 좋아 좋아. 간만에 몸을 풀 수 있겠어. 일단 팔다리만 베어서…… 컥!”

리어폴드가 주절거리고 있을 때.

다리를 한 걸음 뻗은 이안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뒤, 그대로 리어폴드의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댕!

기사들이 입은 판금 갑옷은 분명 단단하다.

하지만 모든 충격을 분산해줄 수는 없었다.

이안에게 얻어맞은 기사의 몸이 붕 떠서 뒤로 밀려났다.

“무슨 힘이……!”

이안은 땅을 밟은 뒤 곧장 기사를 향해 성검을 휘둘렀다.

기사가 급하게 검을 들어 응수했다.

하지만 발이 땅에서 떨어져 제대로 힘을 실을 수 없었다.

이안은 기사가 균형을 잡을 틈을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

“마, 말도 안 돼. 리어폴드 경이 저렇게 밀려나다니.”

“일단 도와!”

기사들이 궁지에 몰린 상사를 돕기 위해 달려나가려 하던 그때.

“끄아악!”

기사 하나가 빛으로 된 거대한 손바닥에 얻어맞아 멀리 튕겨 나갔다.

날아간 기사는 벽에 세게 부딪힌 뒤, 그대로 의식을 잃고 스르륵 흘러내렸다.

기사들의 시선이 돌아갔다.

스텔이 무표정한 얼굴로 기사들에게 말했다.

“못 가.”

높낮이 없는 평탄한 목소리.

겉보기에는 가냘파 보이기만 하는 여인의 선언에 기사들이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강한 신성이 주위에 깔려 그들의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멀찍이서 확인한 리어폴드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건 무슨 말도 안 되는…… 네놈들. 진짜 정체가 뭐야.”

“딴 곳 보고 여유가 있나 봐?”

“큭!”

안쪽으로 파고든 이안이 리어폴드의 배에 주먹을 먹여주었다.

판급 갑옷을 향해 날리는 주먹.

평범한 상황이었으면 무모하고 의미 없는 행동이었을 거다.

하지만 지금 이안의 신체 능력은 명백히 평범을 넘어서고 있었다.

배 쪽에서 갑옷 전체로 퍼져나가는 충격에 리어폴드가 한순간 움찔했다.

그 빈틈을 향해 이안의 성검이 매섭게 파고들어 왔다.

리어폴드는 가까스로 몸을 틀어 성검이 갑옷의 틈새에 파고드는 걸 막았다.

심장이 조여드는 기분에 식은땀이 이마에 맺혔다.

‘무슨 이런 검술이!’

이런 긴장감을 느껴본 게 얼마 만인가.

강철 기사단 내에서도 그 실력을 인정받아 간부의 자리에 오른 그였다.

여태껏 그를 이런 식으로 몰아붙인 이는 몇 없었다.

‘최소 부단장님 급. 어쩌면 단장님에게도 필적할…….’

갑옷이 없었다면 진즉에 목이 날아갔을 거라 생각하니,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 역시 명예로운 강철 기사단의 일원.

두려움은 곧 호승심으로 변했다.

‘좋아! 실력에 비해 아직 검광은 못 다루나 보군!’

그나마 다행인 부분이었다.

검광이 없다면 단단한 갑옷을 뚫어낼 수는 없다.

갑옷만 잘 활용한다면 어쩌면 이길 수도 있을 거라는 계산이 섰다.

“죽어!”

리어폴드가 이안을 향해 검을 힘껏 던졌다.

예비 동작은 짧았지만 아무렇게나 던진 게 아니다.

검이 정확하고 궤적과 계산된 속도로 날아왔다.

이안은 성검을 비스듬히 빗겨 올려, 검을 쳐냈다.

완벽한 대처.

하지만 잠깐의 머뭇거림이 생기는 것까지 어찌할 수는 없었다.

리어폴드는 미친 듯이 달려와 이안에게 접근했다.

둘 사이의 거리가 성검의 검신보다 짧아졌다.

‘이렇게 가까우면 제대로 못 휘두르겠지!’

딱 붙은 거리에서는 검을 정교하게 제어하기 힘들다.

갑옷의 틈에 검날이 들어오는 것만 막으면 된다는 계산하에서 행해진 과감한 전술이었다.

‘게다가 나는 이래 봬도 박투술이 특기라고!’

리어폴드는 자신만만하게 오른팔을 내뻗었다.

명치를 정확히 노리는 일격이었다.

하지만 이안은 오른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어, 오른팔의 궤도를 절묘하게 옆으로 꺾은 뒤.

그대로 리어폴드의 머리를 향해 왼 주먹을 내질렀다.

쩡!

“컥!”

투구에 전해진 충격에 머리가 흔들렸다.

하지만 기절할 정도는 아니다.

이를 악문 리어폴드가 이번에는 이안의 팔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이안의 움직임이 두 호흡은 빨랐다.

이안은 리어폴드의 투구에 양 주먹을 번갈아 내질렀다.

급하게 수비하려는 리어폴드의 왼 주먹을 가볍게 흘리고, 명치를 타격.

그대로 자세를 낮춰 다리를 뱀처럼 휘감아 리어폴드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쿵!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리어폴드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귀신에라도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너무 놀라 낙법조차 취하지 못했다.

‘뭐, 뭐지 이 박투술은?’

이안이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검사와 매일같이 대련을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검사의 검술과 박투술이 황실의 검술에 영향을 줄 정도로 뛰어나다는 걸, 리어폴드가 알 리가 없었다.

이안은 쓰러진 리어폴드의 팔을 뒤로 꺾은 뒤, 곧바로 투구를 벗겼다.

색이 바랜 노란 머리를 길게 기른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이안은 리어폴드의 머리카락을 쥐고 물었다.

“항복할 거야?”

머리를 붙잡힌 리어폴드가 씩 웃으며 말했다.

“항복하면 살려줄 거야?”

“글쎄. 너 하는 거 봐서.”

“흠.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도 괜찮으니, 부하들은 살려 보내 주겠어?”

예상치 못한 발언이었다.

의외의 태도에 이안이 말했다.

“설마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 몰랐는데. 다짜고짜 검이나 휘두르는 미친놈이.”

“원래 팔은 안으로 굽는 거 아니겠어? 어때. 부하들만 살려주면 포로든, 정보든 다 불게.”

“꼴에 기사라 이거냐.”

리어폴드의 말에 여전히 신성에 짓눌려 있던 기사들이 아우성쳤다.

“리어폴드 경! 그러면 안 됩니다!”

“저희 따위보다 경 한 명이 더 중요합니다!”

기사들이 안간힘을 썼지만 그래도 스텔의 신성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이안은 그 모습을 보며 의아함을 느꼈다.

“강철 기사단이 이것밖에 안 돼? 아무리 스텔의 신성이 강하다 해도 저만한 숫자를 이렇게 오래 짓누르고 있는 건 이상한데…….”

리어폴드가 멋쩍은 얼굴로 답했다.

“하하…… 다들 들어온 지 기껏해야 몇 년인지라 그래. 예전에 있었던 일 때문에 기사단은 언제나 인력 부족이거든.”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코르디스에서 황제도 신분이 확실치 않은 이안을 기사단에 영입하려 했었다.

그만큼 기사단의 전력이 크게 줄어 있었다는 증거겠지.

‘그리고 이놈이 말한 그 일이라는 건 아마 흑기사와의 전투였겠지.’

기사들을 미묘한 얼굴로 쳐다보는 이안에게 리어폴드가 재촉했다.

“그래서 살려줄 거야 말 거야.”

“얼씨구. 목숨 맡겨놨어?”

“안됩니다. 리어폴드 경! 이런 수모를 겪느니 죽는 게 낫습니다!”

“아니, 이거 내가 나쁜 놈이 된 것 같잖아…….”

머리를 긁적인 이안이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갑작스럽게 몸을 짓누르던 힘이 없어지자, 리어폴드가 어리둥절해 했다.

“뭐야. 풀어주는 거야?”

“대화를 좀 해보자고. 네 부하들의 목숨은…….”

한 호흡 뜸을 들인 이안이 말했다.

“너 하는 거 보고 결정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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