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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57화 (158/222)

157. 구출(3)

굉음과 함께 지축이 흔들렸다.

멀리서 들어도 심상치 않은 위력이었다.

아무리 튼튼하게 설계된 황궁이라도 무사하기 힘들 거라는 건 느낄 수 있었다.

‘좋았어 플로라. 그대로 무사히만 빠져나가라.’

고요하던 주위가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다들 어디 있었는지 병사나 사용인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황궁을 향해 달려갔다.

“무, 무슨 일이야!”

“불이래 불! 황궁에 불이 붙었데!”

“모두 물 준비해! 아니, 마법사. 마법사를 찾아!”

“왜 하필 내가 당직일 때!”

아무래도 플로라의 마법에 황궁에 불이 붙은 모양이다.

축제 분위기에 느슨해져 있던 사람들이 다급하게 달려갔다.

이안도 그 사이에 끼어 함께했다.

그렇게 달리다 보니 내성이 눈에 들어왔다.

원래라면 통행인을 엄격히 조사해야 할 병사들이었지만, 워낙 다급한 상황에 사람들을 그냥 통과시켜주었다.

보호해야 할 황제나 주요 귀족들은 대부분 광장에 나가 있어서, 경계가 더 느슨했던 것도 있다.

덕분에 이안도 손쉽게 내성을 통과할 수 있었다.

‘플로라가 말해준 대로라면, 내성을 통과해서 직선으로 달리다 호수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된다고 했지.’

인파 속에 섞여 달리던 이안은 적절한 기회를 봐 중간에 빠져나와 달렸다.

주위에 보는 눈도 없으니, 마음껏 속도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별관까지 거리가 생각보다 멀었다.

‘씁. 더럽게 넓네요.’

[황궁은 웬만한 도시 크기니까요. 돌아갈 거리를 생각하면 좀 더 서둘러야 해요.]

‘네!’

하지만 더욱 걸음을 서두르려던 이안은 속도를 늦춰야 했다.

앞쪽에서 한 무리의 강철 기사단원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가장 앞에서 달려오던 자가 이안에게 급하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이안은 곧장 당황한 목소리를 연기했다.

“부, 불! 황궁에 불이 났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사악한 마법사가 습격한 것 같습니다!”

“마법사? 그럴 수가……! 그럼 방금 그 굉음은 마법이었단 말인가!”

“그, 그런 것 같습니다.”

“알겠다! 아직 황궁에 마법사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당장 가자!”

“옙!”

기사는 부하들을 이끌고 그대로 이안을 지나쳤다.

안심한 이안은 다시 뛰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돌연, 기사가 걸음을 멈췄다.

“근데 이상하군. 황궁에 불이 났는데 너는 왜 반대쪽으로 가고 있지?”

“…….”

기사가 슬그머니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식은땀이 이안의 목을 타고 흘렀다.

‘역시 호락호락하지는 않는다 이건가.’

이안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짧은 시간 내에서 가장 그럴듯한 거짓말을 떠올리고는 즉시 뱉었다.

“넵! 리어폴드 경의 명령을 받고 별관에 있는 요인을 구출하러 가고 있었습니다! 현재 리어폴드 경과 다른 부대원들은 황궁 쪽으로 향했습니다!”

“……리어폴드가?”

기사의 투구 속 안광이 이안을 훑었다.

‘먹힐까?’

거짓말이 먹히지 않았다면 최대한 빠르게 제압해야 한다.

이안에게는 여유가 없었다.

이안이 먼저 공격할까, 아니면 기다릴까 고민하던 그때.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리어폴드 그 자식이 그런 부분까지 신경 쓸 줄이야. 성장했군. 놈들이 공을 독차지하게 둘 수 없지! 우리도 당장 간다!”

“옙!”

“너도 수고하도록.”

“옙!”

이안이 절도 있게 경례를 올렸다.

고개를 끄덕인 기사가 다시 황궁을 향해 달려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이안도 다시 달렸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별관.

별관이라는 이름을 듣고 상상했던 것과 달리, 생각보다 더 큰 건물이었다.

이안은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역시, 지키고 선 사람이 몇 명 없어요. 전부 황궁 쪽으로 간 모양이에요.’

이 정도 숫자라면 빠르게 제압할 수 있다.

그렇게 결론 내린 이안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별관을 지키고 서 있던 기사들이 이안에게 말했다.

“뭐야. 아직 교대할 시간 아닌데. 그보다 너 누구…… 컥!”

“끄악!”

순식간에 기사 둘을 제압한 이안은 그들의 몸을 수풀 속에 대강 던져놓았다.

그러고는 빠르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저택이 넓어. 로드릭은 어디 갇혀 있지?’

마침 쟁반을 든 하녀가 저 앞에 지나가고 있었다.

이안은 하인을 불러 세웠다.

“이봐요. 로드릭 님의 방은 어디 있죠?”

“네?”

“피에람의 가주 말이에요. 여기 갇혀 있잖아요.”

“아. 그 2층의 가장 안쪽 방에…….”

그 순간, 뒤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정문을 지키던 놈들 어디 갔어.”

“기, 기절해 있습니다.”

“……침입자? 잠깐. 거기 너! 왜 거기 서 있는 거지? 소속을 밝혀라!”

‘이런. 생각보다 빨리 들켰네.’

기사들이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이안은 성검을 뽑아 곧장 거리를 좁혔다.

“뭐, 뭐가 이렇게 빨라!”

생각보다 더 빠른 이안의 움직임에 기사들이 크게 당황했다.

정작, 이안은 갑옷 때문에 움직이는 게 영 어색하다 생각했지만.

검이 얽혔고, 기사들이 쓰러졌다.

이전에 상대했던 기사들보다는 실력이 있었지만, 리어폴드 정도는 아니었다.

“꺄아아악!”

“2층 가장 안쪽 방 맞죠?”

“예? 예.”

“혹시라도 알릴 생각은 하지 말고, 어디 틀어박혀 있어요.”

슬쩍 검을 들어 올려 하녀에게 겁을 준 이안은 그대로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이미 이변을 알아챈 별관의 몇 안 되는 병력들이 모여들었다.

“침입자를 막아야 한다!”

“목숨을 걸고 막아! 위에 계신 분을 생각해서라도!”

기사들의 기세가 상당히 매섭다.

몇몇은 심한 부상을 입고서도 이안을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이안은 이해할 수 없는 집념이었다.

‘뭐야. 가주를 감금해놓은 주제에, 무슨 황족이라도 되는 것처럼 목숨 걸고 지키네.’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이안은 기사들을 빠르게 제압했다.

몇 안 되는 기사들은 순식간에 바닥에 쓰러졌다.

이안은 기사들을 넘어 2층으로 올라갔다.

하녀가 말했던 방은 크게 헤매지 않고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방 앞에는 갑옷을 입은 기사 한 명이 서 있었다.

‘아까 다 몰려온 거 아니었던 건가?’

기사는 불안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이안을 발견하고는 외쳤다.

“누구냐!”

왜인지 귀에 익은 목소리.

하지만 목소리는 투구 속에서 한번 울려서 나오는 거라 정확히 구별해낼 수 없었다.

이안은 그대로 검을 쥐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멈추고 정체를 밝혀라!”

“비켜.”

“말로 해서 안 된다면…….”

이안은 기사가 검을 뽑기 전에 땅을 박차 빠르게 파고들었다.

이대로 주먹으로 투구를 때려 기절시킬 생각이었다.

퉁!

하지만 막혔다.

어느새 뻗어온 손바닥이 이안의 팔꿈치를 밀쳐 주먹의 궤도를 틀었다.

‘어라.’

설마 막힐 줄은 몰랐던 이안은 잠시 굳어 버렸다.

상대는 큰 공격의 실패로 생겨난 틈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까강!

검이 매서운 궤도로 휘둘러졌다.

이안이 급하게 피하지 않았다면, 분명 갑옷의 틈을 찔렸을 거다.

공격의 실패에도 상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연격을 이어갔다.

이안은 이 예상치 못한 복병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리어폴드…… 보다 뛰어난 실력. 그렇다고 기사단장도 아니고. 기사단에 이런 실력자가 또 있을 줄은 몰랐네요.’

자세히 보니 상대가 휘두르는 검도 예사 물건이 아니었다.

새파란 예기를 흩뿌리는 명검.

저런 거에 잘못 맞았다가는 팔다리 한두 개는 우습게 잘리는 법이다.

[적당히 봐주면서 할 상대가 아니에요.]

‘네.’

계속 공세에 몰리던 이안은 한 걸음 앞으로 크게 내디뎌 상대의 흐름을 끊은 뒤, 마주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윽!”

예상치 못한 대응이었던지, 상대하던 기사 역시 신음을 흘리며 역으로 이안의 공격에 대응해 나갔다.

이안은 온 힘을 쏟아 맹공을 펼쳐나가면서 생각했다.

‘왜인지 자기 실력을 다 보이지 않고 있어. 속에 있는 걸 끄집어내라.’

이안은 시간을 오래 끌 생각이 없었다.

상대가 속에 숨기고 있는 걸 끄집어내기 위해 거침없이 밀어붙였다.

속절없이 밀려나던 기사도 더는 여유가 고갈 난 모양.

그 순간 기사의 움직임이 변했다.

더 빠르고, 날카롭고, 절묘하게 뻗어오는 검.

특히 이안이 놀란 건 검의 정교함이었다.

매일 수천, 수만 번의 검을 휘둘러야만 얻을 수 있는 기계적인 느낌이 상대에게 있었다.

상대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지독한 연습벌레라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다만, 실력에 비해 실전 경험이 부족한 게 여실히 느껴졌다.

‘노련함이 부족해. 기사단에서 키우는 유망주라도 되는 건가?’

하지만 이안은 검을 맞댈수록 상대에 대한 감탄 대신, 애매한 기시감을 느꼈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움직임.

갑옷으로 감춰졌지만 익숙한 체격.

그리고…….

‘이 검술은 분명…….’

[황족에게 내려오는 검술이네요.]

‘아!’

그제야 떠올랐다.

눈앞의 기사가 펼치는 건 황족의 검술이다.

‘근데 왜 황족이 여기에? 설마…….’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딱 하나 있었다.

한때 검을 섞어도 보았고, 대화도 나눠봤던 황족.

이안은 급하게 말을 걸려 했다.

하지만 불리해졌다는 걸 깨달은 상대는 다음 일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분위기나 낌새로 보아, 도박수를 준비하고 있다는 건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이대로 가면 한쪽은 크게 다친다.

이안이 다급히 외쳤다.

“자, 잠깐! 레아, 레아 님이시죠!”

“……?”

상대의 움직임이 멎었다.

아무래도 정답인 듯했다.

“……역시 내가 목적이었군요. 순순히 붙잡혀 인질이 될 바에, 차라리 죽겠어요!”

하지만 이름을 부르는 건 오히려 역효과였다.

뭔가 오해를 했는지, 레아가 곧장 달려들었다.

준비해두던 일격.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도박수.

어설프게 흘려 넘길만한 공격이 아니었다.

막으려면 레아를 다치게 할 수밖에 없었다.

“쯧.”

혀를 찬 이안은 성검을 놓은 뒤, 그대로 앞을 향해 몸을 던졌다.

예상치 못한 대응에 레아가 당황했다.

하지만 검은 멈추지 않았다.

촤악!

이안의 갑옷 틈새를 레아의 검이 찔러 들어왔다.

마지막 순간 이안이 몸을 틀어 깊은 상처는 아니었지만, 피가 바닥에 흘러내렸다.

이안은 고통을 참으며 그대로 레아에게 파고들어 허리를 힘껏 밀었다.

쿵!

균형을 잃은 둘이 바닥에 넘어졌다.

레아와 이안은 어떻게서든 위를 차지하기 위해 이리저리 뒹굴었다.

하지만 힘은 이안의 우세였다.

세 바퀴 정도를 구른 뒤.

이안은 격렬히 저항하는 레아의 몸을 누르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 후우. 더럽게 힘드네 진짜.”

“놔라! 네놈이 뭘 원하든, 얻을 수 없을 거다!”

“접니다. 저. 레아 님.”

“어?”

이안이 투구를 벗자 레아가 얼빠진 목소리를 흘렸다.

“무, 무슨. 어, 오랜만…… 아니. 그것보다 대체 왜 이안이 이곳에. 설마!”

눈동자에 깃드는 배신감.

이안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얘기를 하자면 긴데, 짧게 말하면 이 안에 있는 사람을 구하러 왔는데요.”

“피에람 가주를?”

여기서 레아와 마주하는 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원래 계획이라면, 레아와 얘기하는 건 전쟁이 벌어지고 난 후.

‘하지만 오히려 잘 된 걸 수도 있어. 시간 여유가 없지만…….’

결심을 굳힌 이안이 운을 뗐다.

“레아 님. 아니, 저하. 황제에 대해서 말할 게 있습니다.”

***

하늘에 다시 오로라가 피어올랐다.

오테르는 마법을 거둬들였다.

대규모 마법의 사용은 늙은 그의 육신에는 크나큰 부담이었다.

“쿨럭. 쿨럭.”

오테르는 피 섞인 침을 토해냈다.

하지만 그를 괴롭게 하는 건 신체의 아픔이 아니었다.

그가 공간 이동시켰다가 다시 되돌린 저 끔찍한 존재가 풍기는 피 냄새가.

저 괴물이 저질렀을 죄업이 너무나 마음을 괴롭게 해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흑기사는 그런 오테르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대신, 황궁 쪽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강한 영혼이 느껴진다.”

“잠깐……!”

오테르가 황급히 흑기사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때, 흑기사는 이미 저 앞에 달려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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