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구출(4)
“폐하에 대해……?”
레아가 멈칫했다.
이안이 핵심만을 빠르게 쏟아냈다.
“황제는 제정신이 아닙니다.”
“말을 가려서 하세……!”
“황제는 악마 숭배자와 교류하고 있습니다.”
레아가 화를 내려 했지만, 이안은 말을 끊었다.
실랑이를 벌일 정도로 시간이 여유롭지 않았다.
“레아 님도 잘 아시는 테이오스는 악마 숭배자입니다. 강력한 마법사지요.”
“그건……!”
레아 역시 무언가 짚이는 게 있는지, 말을 잃었다.
이안이 이어 말했다.
“또, 황제는 흑기사를 다룰 수 있습니다. 아마, 오늘. 흑기사가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겁니다. 오늘이 아니라면…… 빠른 시일내에요.”
“흑기사는 이야기책 속의……!”
“똑바로 들으세요 레아 님.”
이안이 레아의 어깨를 힘주어 잡았다.
이안과 레아가 시선을 맞췄다.
레아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당장 믿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언젠가 진실이 드러나면, 레아 님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그게 대체 무슨.”
“황제가 악마 숭배자와 연관이 있다는 게 확실해지면, 곧바로 황궁을 빠져나오세요. 그때쯤이면 제국도 분열되었겠죠. 황제의 반대 세력의 구심점은 레아 님밖에 할 수 없습니다. 레아 님이 황제를 막아야 하는 겁니다.”
이안이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상상도 못 한 이야기에 레아는 뒷걸음질 치려 했다.
하지만 이안은 레아를 놓아주지 않았다.
“레아 님의 행동에 대륙의 운명이 걸려 있습니다. 부디 잘 생각하고, 행동해주세요.”
충격적인 얘기.
하지만 레아는 선뜻 이안의 말을 헛소리라고 부정할 수 없었다.
그만큼 이안의 목소리에는 사람을 설득하는 힘이 깃들어있었다.
기술적인 문제를 떠나, 진심이 아니면 낼 수 없는 힘이었다.
게다가 레아도 어느 샌가부터 느끼고 있었다.
황제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걸.
막연하게만 생각해오던 것들을 이런 식으로 직접 귀로 들으니, 충격이 컸다.
“그런…….”
레아가 말을 흐렸다.
그제야 이안은 레아가 걱정되었다.
‘너무 부담을 줬나?’
대륙의 운명이 레아에게 달려 있다니.
개인이 혼자 견디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말이었다.
이안에게는 부담감을 함께 짊어져 줄 이네스가 있지만, 레아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레아에게 그런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건…… 이안 밖에 없었다.
“믿기 힘든 사실인 걸 압니다. 설령 사실로 받아들인다 해도, 가족을 향해 칼을 들이밀라니. 쉽지는 않겠죠.”
“…….”
“하지만 레아 님이 마음만 먹으면, 저라도 기꺼이 함께 지탱해드리겠습니다. 어깨에 무엇을 짊어지든지요. 그러면 조금 가벼워하지 않겠어요?”
레아가 이안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아무런 대답이 없자 이안이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이제 진짜 시간이 없네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 보내주실 거죠?”
“…….”
여전히 대답이 없는 레아를 지나쳐 이안이 방문을 열었다.
방 안에서는 로드릭이 불안한 얼굴로 서성이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이쪽을 쳐다본 로드릭의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
“자네!”
“구하러 왔습니다. 안 늦었죠?”
“무슨 이리 무모한 짓을……! 대체 어떻게 잠입한 건가!”
“설명하자면 길고, 댁의 따님이 큰 활약은 보였다는 것만 아시면 됩니다.”
“플로라! 설마 플로라도 이곳에 황궁에 온 건가? 말렸어야지!”
로드릭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아아! 나 때문에 플로라가 위험한 일에……!”
“좌절은 다음에 하시고. 얼른 갑시다. 시간이 없어요.”
“아, 알겠네!”
이안은 로드릭을 데리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주저앉아 생각에 잠긴 레아가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레아를 지금 동료로 들이고 싶지만, 레아가 해줘야 할 일이 많다.
‘내 말이 제대로 전달되었을까?’
아마 그랬을 거다.
레아는 게임에서도 황제의 비밀을 알아채고, 저항 세력을 일으키던 인물이다.
그저 원래보다 조금 더 빨리 진실을 알았을 뿐이다.
그때.
이안의 등을 향해 레아가 물었다.
“이안.”
“예.”
이안이 고개만 뒤로 돌렸다.
레아는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이안의 목표는 뭔가요.”
짧은 문장에서 많은 의문이 담겨 있었다.
평민 신분으로 코르디스에 입학해,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이안이 원하는 건 무엇인가.
대체 이안은 어떤 사람인가.
그런 혼란 가득한 눈동자를 마주 보며, 이안도 마찬가지로 짧게 답했다.
“악마를 토벌해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
처음부터 끝까지 이안이 바라왔던 염원.
몇 번이고 스스로 되뇌었던 말을 입밖에 뱉어낸 이안은 인사도 없이 로드릭과 함께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보던 레아가 복도 바닥에 드러누웠다.
평소에는 체면을 생각해 상상도 못할 행동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이런 자그마한 자유라도 누리고 싶었다.
생각할 게 너무 많았다.
‘오라버니…….’
레아의 머릿속에 남은 가장 오래되고 강렬한 기억은 현 황제에 대한 것이었다.
아직 레아가 많이 어렸던 시절.
유달리 비가 거세게 내리치던 밤에 현 황제. 레온 클로딘이 레아의 방에 찾아온 적이 있었다.
―오라버니!
아직 어렸던 레아는 이 뜻밖의 방문에 순수하게 기뻐했다.
그런 레아를 보며 레온은 서글픈 미소를 띠었다.
둘은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눴다.
승마를 처음 배운 일. 레아가 실수로 황제가 아끼는 꽃병을 깨 먹어서 혼난 일. 검술을 빨리 배운다고 칭찬받은 일.
레아는 쉼 없이 재잘거렸고, 레온은 말없이 들어주었다.
그러다 갑자기, 레온이 레아의 어깨를 힘껏 잡았다.
레아는 레온의 진지한 눈빛에 굳어 버렸다.
레온이 말했다.
―레아.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사명이 있어.”
사명. 아직 어린 레아에게는 조금 어려운 단어였다.
―신께서는 너에게 검에 대한 천재적인 재능을 주셨어. 그리고 그만큼 위대하고 커다란 사명을 주셨어.
―언젠가 네 힘이 꼭 중히 쓰일 거야. 그러니 재능을 연마해. 죽을 힘을 다해서. 이제 어린애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끝났어.
레온은 그 뒤로도 많은 말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레온과 레아는 변했다.
황위 계승서열이 낮았던 레온은 본격적으로 정치에 발을 들였다.
레아는 진심을 담아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렀다.
레아는 팔을 얼굴에 올려 복도의 화려한 조명으로부터 눈을 가렸다.
“함께 짊어져 준다니…….”
당장 고민할 게 너무 많았다.
하지만 레아의 머릿속에는 이안이 한 말만이 계속 떠돌았다.
그도 그럴 게…… 여태껏 레아가 너무나 듣고 싶었지만, 그 누구도 해주지 않았던 말이기 때문이다.
***
연설을 마친 황제에게 테이오스가 다가왔다.
“폐하. 문제가 조금 생겼습니다.”
“문제?”
“황궁이 습격당했습니다.”
“음?”
황제는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황도가 습격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기 때문이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소?”
“예. 궁전에 불이 붙었다 합니다. 다행히 화재는 쉽게 진압할 수 있다지만…….”
“작은 불이라도 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지. 안 그렇소?”
“예.”
제국은 긴 역사 동안 악마와 싸워왔다.
당연히 황제가 거처하는 황궁은 상황이 안 좋아졌을 때를 대비해, 과하다 싶을 정도로 튼튼하게 지어졌다.
그런데도 불이 났단다.
황제는 이 상황이 유쾌한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이거 골때리는군!”
“습격범은 아직 잡지 못했습니다.”
“음. 뭐. 안 봐도 뻔하지 않소. 설마 피에람의 어린 천재가 이 정도였을 줄이야. 나도 아직 많이 부족하군.”
“그게 전부입니까?”
“음?”
황제가 되물었다.
“무슨 의민가?”
“플로라 피에람 혼자서 이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습니다. 조력자와 동료들이 있겠죠. 왠지 폐하라면 전부 알고 계실 것 같습니다만.”
어딘가 추궁하는 듯한 테이오스의 어투에 황제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나라고 모든 걸 아는 건 아니오. 테이오스 공은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소.”
“폐하께서 어떻게 그 자리까지 올라갔는지. 어떻게 판을 짜고 흔드는지를 본 사람이라면 다 저처럼 될 것 같습니다.”
“그게 과대평가라는 것이오. 내가 이 자리까지 올라온 건 내 역량이기도 하지만, 운이 크게 작용했거든.”
“그렇습니까.”
내뱉은 말과 달리 테이오스는 황제의 말에 전혀 수긍하지 않은 눈치였다.
황제는 그런 반응을 무시하며 말했다.
“뭐, 요즘 교단 쪽에서 움직임이 심상치 않소. 조력자라 한다면 그쪽이겠지.”
“아시면서 방치하신 거군요.”
“나도 확신했던 건 아니오. 그래서 일부러 꼬리를 흘려본 것이지. 한번 붙잡아 볼 테면 해보라고. 한데, 웬걸? 꼬리를 통째로 뜯어갈 줄이야!”
여전히 황제는 이 상황이 너무 재밌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무표정하게 쳐다보던 테이오스가 말했다.
“뭐. 아까 흑기사가 소란이 들려온 쪽으로 달려갔습니다. 냄새 하나는 잘 맡는 놈이니, 만에 하나라도 습격범들이 살아나갈 일은 없겠지요.”
“흠. 흑기사라…….”
흑기사라는 얘기에 황제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흑기사의 추격까지 뿌리친다면, 그게 누구든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소.”
***
“어, 어디로 가는 건가!”
“모이기로 한 장소가 있어요! 아마 걔네들도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이안과 로드릭은 빠른 속도로 달려나갔다.
점점 주위에 인기척이 많아지고 있었다.
‘황궁 쪽 혼란이 수습된 거야. 불을 끈 거겠지.’
그리고 혼란이 수습되었으니 기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습격한 범인을 찾으려고 할 거다.
이대로 쭉 도망쳐 황도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 벌써부터 꼬리가 달리면 곤란하다.
“서둘러요!”
“최선을 다하고 있네!”
이안은 바닥이 패일 정도로 빠르게 달려나갔다.
그 뒤를 발에 불꽃을 두른 로드릭이 간신히 뒤따랐다.
어느새 약속했던 목적 장소가 눈앞에 보였다.
이안은 호크를 역소환 한 뒤, 다시 손 위에 불러들였다.
“핍!”
“애들 어딨어! 안내해!”
“핍!”
경례를 척! 하고 올린 호크가 빠르게 비행해 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호크가 남긴 빛의 궤적을 찾아 복도를 통과해 어떤 방 안으로 들어가더니, 바닥으로 쏙 사라졌다.
이안과 로드릭의 시선이 자연스레 아래로 내려갔다.
바닥에 보자기 같은 게 놓여 있었고, 그 보자기를 들추자. 뻥 뚫린 구멍이 눈에 들어왔다.
구멍 아래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어! 이안 왔다! 아빠도!”
“이안.”
“그래. 나 왔다.”
“플로라!”
로드릭이 구멍으로 내려가 곧장 플로라를 껴안았다.
“플로라! 어쩜 이리 위험한 짓을 벌이는 거니! 네가 잘못되기라도 했다면 아빠는…… 흐흑.”
“으윽. 답답해.”
“감동적인 해후를 나누는 건 좋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어요. 어서 황도를 빠져나가야 해요.”
플로라를 꽉 껴안고 눈물을 흘리던 로드릭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 그래! 어서 영지로 돌아가야 하네!”
“서두르죠.”
이안을 선두로 빠르게 이동한 일행은 하수구를 빠져나온 뒤. 인파 사이에 섞여들었다.
모두가 가면을 쓰는 축제는 몸을 숨기기에는 제격이었다.
그렇게 미리 준비한 퇴각로대로 이리저리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황도를 둘러싼 성벽이 눈에 들어왔다.
축제 기간인지라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저, 저것만 통과하면 이제 안전하네.”
“예상보다 쉽게 빠져나왔네. 잠입할 때는 고생이었는데…….”
피에람 모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안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왠지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뭐지? 뭔가 엄청나게 쎄해요. 뭔가 위험한 게 이쪽을 향해 오는 것 같은 기분이…….’
그리고 그 순간.
이안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무언가 새카만 게 이곳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이안이 급하게 외쳤다.
“모두 물러나!”
콰앙!
이안은 급하게 일행들에게 몸을 날려 뒤로 밀쳤다.
그와 동시에 이안이 서 있던 곳으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아, 아야. 갑자기 무슨 일이…….”
“……모두 싸울 준비해.”
이안은 주저 없이 성검을 뽑아 들고, 앞을 주시했다.
자욱하게 퍼져나갔던 먼지구름이 잦아들었다.
이윽고 눈에 들어오는 무식하게 큰 대검과 검은색 갑주.
“못 간다.”
원래라면 지금 시점에서 마주치지 말았어야 할 적.
흑기사가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