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탈출
“못 간다.”
그렇게 말한 흑기사가 자세를 잡았다.
흑색 갑주에서 퍼져나가는 사이한 기운에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이안은 이를 악물었다.
‘이걸 여기서 마주치다니…….’
흑기사는 게임에서도 후반부에 마주치는 적으로, 그 강함은 웬만한 초인조차 압도한다.
즉, 지금의 이안이 상대할 만한 적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여럿이서 합공하면 가능할까?’
이안이 시선을 끌고, 스텔, 플로라, 로드릭이 지원을 해주면 어쩌면 승산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강력한 흑기사라도 플로라의 불꽃에는 어쩔 수 없을 테니.
문제는 지금 플로라가 최선의 컨디션이 아니라는 것이다.
“플로라. 마법은 좀 쓸 수 있겠어?”
“……아까 황궁에 마법을 쓸 때 힘을 너무 많이 썼어. 평소 힘의 3할밖에 못 쓸 거 같아.”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로 맞서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대다.
지금은 승산이 너무 낮았다.
이안은 혀를 찼다.
“쯧. 싸워서는 답도 없어. 도망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야 해.”
“으, 응. 근데 어떻게?”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저 불길한 괴물과 싸워서는 안 된다고 느끼고 있었다.
문제는 도망치는 것도 쉽지 않다는 거다.
“어떻게든 일격을 먹여서 못 쫓아오게 해야지.”
평범한 공격으로는 흑기사에게 흠집조차 내지 못한다.
오직 검광이나 강력한 마법만이 흑기사에게 유의미한 피해를 줄 수 있다.
“내가 어떻게든 발을 묶어볼 테니까, 그때 플로라 네가 한 방 먹여.”
“아, 알았어.”
“스텔. 기적을 걸어줘.”
“응.”
“로드릭 님은 플로라를 지켜주세요.”
“알겠네.”
빠르게 지시를 내린 이안은 앞으로 걸어나갔다.
스텔이 기도를 올리자, 기적이 이안의 몸을 감쌌다.
몸에 활기가 솟고,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이안은 앞으로 걸어나가며 조용히 서 있는 흑기사를 쳐다보았다.
‘더럽게 크네요.’
다가갈수록 흑기사는 엄청나게 거대하게 느껴졌다.
실제로도 덩치가 크기도 했지만,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 때문에 마치 거인을 마주한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이네스가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청나게 강한 기세가 느껴져요…… 이안. 이번에는 도망치는 것도 목숨을 걸어야 할 거예요.]
‘예. 저도 느끼고 있습니다.’
흑기사가 뿜어내는 기세에 피부가 짜릿짜릿한 감각을 느끼면서, 이안은 몇 발자국을 더 앞으로 내밀었다.
아직 거리는 멀었다.
하지만 이미 흑기사의 공격 반경 안으로 들어왔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흑기사의 투구 속에서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안광은 이안을 훑었다.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한 영혼의 힘이 느껴진다. 검사, 이름을 밝혀라.”
“이안이다.”
“이안. 기억하겠다.”
“아니, 기억 안 해줘도 되는…… 흡!”
어느새 다가온 흑기사가 대검을 하늘로 들어 올렸다.
무식하리만치 단순하고 큰 동작이다.
하지만 이안은 안다.
저걸 피해내는 건 불가능하다고.
결국, 어쩔 수 없이 검을 가로로 세워 자세를 취했다.
칠흑의 검광이 둘린 대검이 이안의 검 위로 내리 처졌다.
깡!
검이 맞붙는 즉시 엄청난 충격이 전해졌다.
미처 다 흘리지도 못할 만큼 압도적인 힘이었다.
이안이 서 있던 바닥이 움푹 내려앉았다.
[괜찮아요? 이안!]
‘으으. 장난 아닌데요. 그나마 스텔이 장벽을 둘러줘서 이 정도였어요.’
단 일격으로 벌써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나마 성검이 튼튼해서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방금 그 일격으로 검과 함께 두 동강이 났을 테니.
“…….”
공격이 실패했지만, 흑기사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기계적으로 팔을 들어 올린 다음, 똑같이 이안을 내리쳤다.
쾅!
이안이 선 바닥이 좀 더 내려앉았다.
버티고 있던 이안의 하체의 떨림도 강해졌다.
흑기사는 오직 내려치기만을 반복했다.
쾅! 쾅! 쾅!
단순무식한 공격이지만 대처할 수가 없다. 반격할 틈도 없다.
그만큼 흑기사의 힘과 속도, 그리고 검광이 어우러진 일격을 받아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이안은 그저 이를 악물고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이안!”
이안이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플로라가 불꽃을 흩뿌렸다.
날아오는 마법을 본 흑기사가 뒤로 힘껏 물러났다.
“강한 마법사. 이름을 밝혀라.”
“알아서 뭐하게!”
이안이 욱신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흑기사에게 달려들었다.
‘흑기사와의 싸움은 거리를 잘 재는 게 중요해.’
흑기사와 멀리 떨어져 있으면 대검이 최대 위력으로 휘둘러진다.
그걸 막기 위해 거리를 좁혀 버리면, 흑기사의 두 번째 공격 패턴이 나온다.
지금처럼.
“아차!”
이안이 거리를 좁히려 들자 흑기사가 앞으로 돌진했다.
흑기사의 몸이 세로로 갈라지더니 마치 짐승의 아가리처럼 쩍하고 열렸다.
이안은 흑기사의 몸통 안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꺄아아아악! 꺄아아아악!
―살려줘! 제발 날 여기서 꺼내줘!
―배, 배고파. 추워…….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심연 속에서 끔찍한 비명들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안마저 그 광경에는 무심코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안!]
“아!”
벌려진 아가리에서 어느새 튀어나온 촉수를 쳐낸 이안이 흑기사의 몸을 발로 차 뒤로 물러났다.
흑기사의 아가리가 다시 닫혔고, 이안은 간발의 차이로 벗어날 수 있었다.
‘주, 죽는 줄…….’
멀리서 있으면 대검이. 가까이 다가오면 아가리가.
그렇기에 흑기사를 상대할 때는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절묘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흑기사가 지랄 맞은 이유지.’
하지만 다행인 점은, 싸울수록 거리감을 어떻게 조절해야 할지 감이 잡힌다는 것.
이안은 성검으로 간간이 반격을 하며, 드디어 흑기사를 잡아두는 역할을 조금씩 해내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로드릭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대, 대단하군. 저런 괴물을 혼자서 붙들고 있다니……!”
“그럼! 누구 동료인데.”
플로라는 괜스레 뿌듯해하면서, 서둘러 마법을 준비했다.
이안이 분투하고 있다고는 하나,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할 것임을 잘 알았다.
로드릭도 마찬가지로 부족한 화력이라도 보태기 위해 불꽃을 만들어냈다.
마침내 마법이 완성되었다.
플로라가 손 위로 불덩이를 집어 들었다.
“이안! 준비됐어!”
그리고 그 순간.
흑기사의 고개가 플로라를 향해 돌아갔다.
이안의 눈이 커졌다.
‘설마……!’
불길한 예측이 맞았다.
흑기사가 이안을 무시하고 플로라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안이 이를 악물고 따라붙으며 성검을 휘둘렀지만, 흑기사의 갑옷을 무의미하게 때릴 뿐이었다.
이안은 아예 흑기사의 몸을 붙잡고 있는 힘껏 끌어당겼다.
하지만 흑기사의 힘이 너무 강했다.
이안을 매달고 흑기사는 그대로 플로라를 향해 성큼성큼 거리를 좁혔다.
이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안 돼!’
이대로라면 모두 잃고 말 것이다.
스텔과 플로라, 로드릭.
기껏 얻은 아군.
이들을 잃는다는 건 곧 미래를 잃는 것과 같다.
‘그것만은 절대로 안 돼.’
절실함.
오직 그 감정만이 이안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막아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든 흑기사가 위협을 느낄 공격을 날려야 해. 하지만.’
하지만 이안에게 마땅한 수가 없었다.
태양의 활도. 피에람의 긍지도. 이토록 빠르게 달리는 흑기사는 손쉽게 피해낼 거다.
결국, 남은 건 성검 뿐.
‘하지만 검으로 타격을 입히려면 최소한 검광을…….’
어느새 흑기사가 플로라의 지천에 다다랐다.
당황한 플로라는 마법을 사용할 생각도 못 하고 굳어 있었다.
이제 흑기사의 대검이 동료들의 몸을 반으로 갈라 버리기까지 남은 시간은 찰나.
이안이 흑기사의 대검 앞에 스스로의 몸이라도 밀어 넣으려 하던 그 순간이었다.
단기간에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기 때문일까?
이안의 시야가 온통 검게 물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같은 어둠이었다.
‘흑기사한테 먹혀 버린 건가?’
순간 그런 착각마저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흑기사의 몸이라기에 주위가 너무 평온했다.
이안은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윽고 어둠뿐인 공간에서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는 빚덩이를 발견했다.
‘이건…….’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찬란하고 고결한 빛이었다.
빛은 살짝만 건드려도 흩어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이안은 잠시 그 빛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홀린 듯이 그 빛을 향해 손을 뻗어 움켜쥐었다.
파앗!
섬광이 퍼져나갔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타 버릴 정도로 밝은 빛이었다.
머지않아 빛이 사그라들었다.
어느새 주위를 메우던 어둠도 사라지고, 이안의 시야가 되돌아왔다.
하지만 아직 남아 있는 빛이 있었다.
성검 위에는 순백의 검광이 둘려 있었다.
***
테이오스는 뒤늦게 싸움 현장에 도착했다.
그는 엉망진창이 된 주위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난장판이군.’
흑기사가 지나간 곳이 쑥대밭이 되는 건 그리 이상하지는 않은 일이다.
다만, 이렇게 주위가 엉망이라면 그가 원하는 것들을 찾기 힘들어진다는 게 문제였다.
‘보나 마나 시체까지 흑기사놈이 먹어치웠겠지. 대체 어떤 간 큰 놈들이 황궁을 습격했는지,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는데.’
마법사로서의 호기심과는 별개로, 테이오스는 이번 습격범들에게 큰 관심이 있었다.
황제와 자신이 준비하고 있는 대업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이 될 거라는 본능적인 직감 때문.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던 테이오스는 한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는 흑기사를 발견했다.
테이오스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남들에게 들키기 전에 이만 들어가시지요.”
흑기사는 새빨간 안광을 붉히며 테이오스를 주시하다, 물었다.
“강한 마법사. 이름을 밝혀라.”
“……!”
그제야 테이오스는 흑기사의 상태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를 못 알아본다? 심지어 지금 나를 먹으려 하고 있어.’
흑기사가 굶주렸다는 증거다.
하지만 텔 왕국에서 흑기사는 실컷 포식하고 왔을 터.
그렇다면…….
‘설마 흑기사가 상처를 입었다? 아무리 플로라 피에람의 재능이 뛰어나다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야.’
흑기사는 빠르다. 웬만한 마법은 모조리 피할 수 있을 정도로.
아무리 강한 마법이라도, 닿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법이다.
‘그렇다면 조력자 중에 누군가가 흑기사를 붙잡아뒀군. 하지만 실력이 뛰어난 기사가 10명 정도는 달려들어야 잠시 붙잡을 수 있는 게 바로 흑기사인데…….’
테이오스 생각에 깊이 빠지려 하다, 흑기사가 뿜어내는 기세에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우선 오해부터 풀어야 했다.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진정하십시오. 저는 폐하의 측근입니다. 즉, 당신의 아군인 것이지요.”
“아군…… 너처럼. 불쾌한 기운을 풍기는 놈이?”
‘적어도 너한테 들을 얘기는 아니다 괴물 놈아.’
땀을 삐질 흘린 테이오스가 조심히 마법을 준비했다.
여차하면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다행히 흑기사는 상태가 차츰 좋아지는 것 같았다.
테이오스가 기억이 났는지, 흑기사가 바닥에 다시 주저앉았다.
테이오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 여기서 누구랑 싸웠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던진 질문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흑기사는 대답해주었다.
“이안이라 했다.”
“예?”
“강한 검사. 이름은 이안이었다. 강한 마법사와 사제의 이름은 듣지 못했다.”
“잠깐. 셋? 지금 당신을 상대한 게 셋이었다는 겁니까? 그것도 검사는 하나?”
“…….”
하지만 더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테이오스는 거칠게 얼굴을 쓸었다.
‘검사 혼자서 흑기사를 상대했다고? 기사단장 정도의 실력이 아니라면야…….’
더욱 충격인 건 그들이 흑기사의 추격을 뿌리치고 무사히 빠져나갔다는 거다.
실력이 뛰어난 사제. 검사. 마법사. 듣자마자 떠오른 단어가 하나 있었다.
‘결사대……!’
신에게 선택받아 악마 토벌이라는 사명을 가지는 이들.
즉, 악마를 숭배하는 테이오스가 증오해 마지않는 숙적이라는 거다.
‘이안이라 했던가.’
테이오스는 그 이름을 곱씹었다.
왠지 낯이 익은 이름이다. 분명 어디선가 들어봤던 듯한…….
그러다 기억 속 한 장면이 갑자기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황제와 같이 코르디스에 가 시찰을 하던 당시.
놀라운 검 솜씨를 보여주던 검은 머리의 평민 검사의 얼굴을.
‘설마!’
테이오스는 이안이 코르디스에 악마와의 싸움으로 전사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죽었다고 믿었던 사람이 사실 살아 있었다니.
믿기 힘든 일이다.
애당초 그가 맞긴 할까?
이안은 흔한 이름이니, 동명이인일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을까?
하지만 왠지 테이오스는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는 그 사내가 맞다고.
테이오스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위협이 될 싹은 미리 쳐내야 했는데…….’
가슴속에 살의와 적의가 가득 찼다.
테이오스는 그 감정을 곱씹으며 중얼거렸다.
“다음에는 그냥 보내주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