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 검광
흑기사의 추격을 피해 달아난 일행은 황도에서 거리를 좀 벌리고 나서야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
비로소 여유가 생기자 모두가 이안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은 눈치였다.
이안이 물었다.
“뭘 봐.”
플로라가 솔직하게 물었다.
“마지막에 검에 씌운 빛. 정령이 아니라 검광 맞지?”
흑기사가 플로라를 단칼에 베내기 직전.
뒤에서 내질렀던 이안의 성검에는 하얀빛이 서렸다.
이안을 무시하며 달려나가던 흑기사는 뒤를 돌아보았고, 황급히 이안의 검을 막았다.
덕분에 플로라는 흑기사에게 마법을 쏟아낼 수 있었고, 타격을 입은 흑기사를 따돌리고 도망칠 수 있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것 같아. 아마도.”
“아마도는 뭐야.”
“진짜라면 대단한 것이네! 다시 한번 보여주게나!”
로드릭의 성화에 이안은 성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흑기사를 상대로 검광을 사용했을 때의 감각을 되새겼다.
성검 위에 흐릿한 아지랑이 피어올랐다.
로드릭이 감탄했다.
“오오! 진짜로 검광이 맞았군! 그 어린 나이에 벌써 검광을 사용할 수 있다니, 놀랍다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군.”
희미했던 검광은 금방 흩어져 버렸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래도 아직 많이 부족한 거 같네요. 조금밖에 유지 못 하겠어요.”
“사용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걸세. 그리고 내가 놀란 건 그것뿐만이 아니야. 검광의 색이 아주 인상 깊어.”
이안이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쳐다보자, 로드릭이 이어 말했다.
“검광이란 경지에 다다른 검사가 자신의 마음속 검을 현실에 벼려내는 기적 같은 힘일세. 때문에 검광에는 검사의 성격, 의지, 삶, 경험 등 모든 게 깃들어있네. 검광만 봐도 그 사람을 알 수가 있는 걸세.”
“아! 이안이 뿜어낸 검광은 엄청 깨끗했어! 뭔가 숭고하고, 고결한 느낌도 있었고…….”
“나도 그 점이 놀랐단다.”
로드릭과 플로라가 들뜬 어조로 얘기를 나누었다.
그만큼 이안이 보인 검광이 그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이안도 그 감정을 잘 이해했다.
처음 검광을 봤을 때, 그 역시 비슷한 기분이었으니까.
유일하게 차분한 건 스텔이었다.
스텔은 언제나처럼 무감정한 얼굴로 이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스텔이 중얼거렸다.
“……그 빛. 이안 같지 않았어.”
그 말에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건 내 검광이 아니야.”
“뭐?”
“뭐라고?”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플로라와 로드릭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안은 대답 대신 바닥에 드러누웠다.
“피곤하네. 잠시만 눈 좀 붙일게.”
“어? 어…….”
이안은 곧장 눈을 감아 버렸다.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던 부녀는 서로를 쳐다보며 입맛만 다셨다.
***
이안은 이네스와 마주했다.
이네스는 맑게 웃으며 이안에게 축하를 건넸다.
“축하드려요. 이안. 드디어 검광을 사용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네요.”
이안은 기뻐하는 대신, 곧장 궁금한 걸 물었다.
“이건 이네스 님의 검광이잖아요. 맞죠?”
흑기사를 막기 위해 어떻게든 검광을 피어 올렸을 때. 이안은 곧바로 깨달았다.
이게 자신의 검광이 아니라는 것을.
그도 그럴 게, 검광에는 그 사람의 인생과 마음이 담긴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똑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없다.
즉, 세상에 똑같은 색의 검광은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다.
하지만 성검 위에 덧씌워진 검광을 이안은 이미 본 적이 있었다.
이네스에게서.
“이안의 생각이 맞아요. 그건 제 검광이었어요.”
“이게 가능한 일인가요?”
“저도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이안이 검광을 피어 올렸을 때 무엇보다 가장 놀란 건 이네스였다.
이네스는 어떻게 이게 가능했는지에 대해 긴 시간 고민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저번에 이미 이안이 검광을 다룰만한 역량을 가졌다고 말한 적이 있었죠?”
“예…….”
“늘 이안에게 부족한 건 믿음이었어요. 검광을 피워 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과 검광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믿음이요.”
이곳이 아닌 지구에서 삶 대부분을 살아왔던 이안이다.
마법, 검광, 신성 등의 신비에 대해 이제는 머리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아직 무의식의 한 구석에서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흑기사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검광이 필요했어요. 동료를 살리고 싶다는 간절함은 필사적으로 해결책을 찾아 헤맸어요. 인간은 위기의 순간에, 엄청난 잠재력을 보이잖아요?”
“그래서 찾은 게 이네스 님의 검광이라는 건가요?”
“저희들의 정신은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이네스가 설명했다.
“예전보다도 더. 무의식의 영역으로 들어가, 저와 이안의 정신이 연결된 지점을 찾아내고, 검광을 끌어냈을 거라는 게 제 추측이에요.”
즉, 이안의 마음속에서 검광을 만들어낸 게 아닌, 이네스의 검광을 반쯤 빼앗듯이 사용했다는 얘기다.
다시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이안과 이네스의 마음이 통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좋아해야 하나.’
둘은 똑같은 생각을 했다.
검광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보이는 세상이 달라지는 법. 즉, 경지가 오른다.
하지만 애초에 자신의 것이 아닌 검광을 제대로 다룰 수 있을 것인가?
혹시라도 무언가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닐까?
여러 의문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함께 고민하던 이네스가 성검에 시선을 주며 말했다.
“이안. 다시 한번 검광을 보여주시겠어요?”
“예.”
이안은 검 위에 검광을 피어 올렸다.
하지만 흐릿하게 일렁이던 검광은 얼마 안 가 흩어져 버렸다.
“그때 당시에는 간절해서 어떻게든 성공했는데, 지금은 잘 안 되네요.”
“음. 꾸준히 연습하면 나아질 거예요. 일단 검광을 사용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니, 자랑스러워해도 좋아요. 비록, 그 형태가 조금 의외라고 해도요.”
“그렇겠죠?”
따지고 보면 이안의 검광이든 이네스의 검광이든 위력만 잘 나온다면 상관없다고 볼 수 있다.
아니. 오히려 이네스의 검광을 사용하는 게 오히려 더 강한 파괴력을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네스가 물었다.
“그래서. 직접 검광을 사용해보니 기분이 어때요?”
“이건…….”
이안은 그때를 생각했다.
검광을 사용하기 전, 이안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던 그 섬광.
그 섬광이 지나간 이후, 이안은 지금껏 가지고 있던 벽이 하나 무너졌음을 깨달았다.
잠시 말을 흐리던 이안이 답했다.
“끝내주던데요.”
“그렇죠?”
“검광을 피어 올릴 땐,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전능감을 느꼈어요.”
“실제로 마음만 먹는다면, 검광으로는 무엇이든 베어낼 수 있으니까요.”
실제로 이안은 검광을 사용하고 흑기사와 싸우며 얻은 깨달음이 많았다.
사선을 넘나드는 경험은 언제나 검사를 성장시키는 법이니.
이안은 조용히 눈을 감고 말했다.
“이 깨달음을 곱씹어봐야겠어요.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요.”
“힘내요. 이안.”
이안은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일행은 곧 다른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시에 들어서자마자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사람들은 근래 돌고 있는 소문들에 대해 떠들어댔다.
“폐하께서 전쟁을 선포하셨더군.”
“흠. 왕국 놈들을 한번 손봐줄 때가 되긴 했지. 내년 봄에 싸우겠지?”
“그렇겠지 뭐. 금방 겨울인데.”
“그거 들었어? 황궁이 습격당했대.”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게.”
“진짜야! 무려 불까지 났었대!”
“남부에서는 흑기사가 나타나서 왕궁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는데.”
“허. 갑자기 무슨 일이야 이게…….”
짧은 사이에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시민들의 얼굴에서는 불안과 긴장을 엿볼 수 있었다.
이들 역시 느끼고 있을 거다. 세상이 변하고 있다고.
그리고 변화의 파도 속에서 가장 큰 고통을 당하는 건 언제나 힘없는 시민들이었다.
이안은 그들을 헤쳐나간 뒤, 곧장 교단에 들렀다.
잠깐의 기다림 뒤에 거울을 통해 아비게일과 만날 수 있었다.
아비게일이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이안 님. 연락이 없어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안전한 도시까지 도망치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계획은 성공했습니다. 로드릭은 구출했어요.”
“……후우. 결국에는 성공하셨군요.”
처음에는 이안의 안위를 생각하며 계획에 반대하던 아비게일이다.
이안이 성공했다는 기쁨보다는, 무사히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듯했다.
“이걸로 피에람은 완전히 황실의 적이 되었어요. 황제의 결정에 불만이 있는 귀족들은 피에람을 중심으로 뭉칠 수 있을 거예요.”
아비게일이 종이 위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며 말했다.
“네. 로드릭도 바짝 열이 오른 것 같아요. 당장 영지로 돌아가면서 다른 영지의 영주들을 만나본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이제 황제도 이쪽을 본격적으로 의식하기 시작할 겁니다. 이안 님에 대한 것도 곧 알아차리겠죠. 본격적으로 행동에 나설 겁니다.”
이번 황궁 테러로 제국의 자존심이 크게 구겨졌다.
황제가 어떻게 생각하든, 체면을 위해서라도 보복해올 거다.
이안이 답했다.
“각오했던 일입니다. 교단은 지금 당장은 황제의 전쟁을 늦추는 것에만 신경 써주세요.”
“네…….”
“그리고 흑기사가 왕국에 나타났다고 들었는데, 피해가 어느 정도죠?”
“텔 왕궁이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이 왕을 비롯해 극히 적을 정도로요. 하필 황제가 전쟁을 선언한 날 이뤄진 습격이라, 왕국들 사이에서는 이상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흑기사의 등장에 골치가 아픈지, 아비게일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안이 답했다.
“저희도 마주쳤습니다. 흑기사.”
“예?”
놀란 아비게일이 깃펜을 떨어트렸다.
빨리 설명해보라는 눈빛에 이안이 이어 말했다.
“그날 밤. 흑기사가 습격했고,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당일에 흑기사는 텔 왕국에 있었어요. 아무리 이야기 속에 나오는 괴물이라도 그 먼 거리를 그렇게 단기간에 오갈 수는 없어요.”
“황제라면 가능해요.”
아비게일이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예?”
“황제에게 있잖아요. 공간을 다루는 대현자가.”
“설마…….”
“대규모 공간이동으로 텔 왕국 위에 흑기사를 떨어트린 뒤, 다시 회수했겠죠. 마침 되돌아온 흑기사를 우리가 마주친 거고요.”
“말도 안…… 되지는 않네요. 그 황제라면. 하지만 황제가 흑기사까지 다룰 수 있다니…… 그것도 마음에 안 드는 곳에 공간이동을 시키는 식으로 써먹다니…….”
괴물 하나를 보내 적 후방을 쑥대밭으로 만든다.
그 과정에서 드는 비용은 거두는 효과에 비해 몹시도 적다.
지극히 효율적이고, 적으로서는 두려운 전략이었다.
이안은 아비게일을 안심시키듯 말했다.
“하지만 당연히 공간이동 마법을 준비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겠죠. 두세 달은 흑기사가 나올 일이 없어요.”
“……두세 달 뒤는요?”
“흑기사가 어디에 나타날지 알고 있습니다. 거기서 제가 흑기사를 막을 겁니다.”
게임에서 처음 흑기사가 나타나는 곳은 텔 왕국의 왕궁이었다.
그렇다면 다음에 떨어질 곳도 게임과 같을 거다.
이안은 거기서 흑기사를 막을 생각이다.
‘흑기사는 두면 둘수록 더 강해지니까. 다음에 막아내야 해.’
이안이 아비게일에게 요청사항을 말했다.
“제가 도움을 청하면, 언제든 병력을 보내줄 수 있게 대비해 주세요. 그런 괴물을 혼자 상대하는 것보다는 여러 사람이 나을 테니까요.”
“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제가 해야죠. 어쩌겠어요.”
“……교단에서도 최선의 준비를 해두겠습니다. 그리고 슬슬 이안 님에 대한 걸 세상에 밝힐 예정인데. 어찌 생각하십니까.”
잠시 고민하던 이안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좀만 참아주세요. 딱 적절한 시점이 있을 것 같거든요.”
“알겠습니다.”
아비게일은 그게 언제인지는 묻지 않았다.
그만큼 이안을 신뢰한다는 의미였다.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이안 님은 이제 어디로 가실 생각이시죠?”
이번에는 곧바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대수림으로 가야죠. 거기서 마지막 동료를 찾을 겁니다.”
그리고 성검 조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