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대수림
“알겠지 플로라? 되도록 안전을 생각하려무나. 도움이 필요하면 꼭 아빠에게 편지하고.”
“알겠다니까?”
로드릭은 플로라를 붙잡고 잔소리를 쏟아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걱정이 더더욱 는 것 같았다.
뒤에서 로드릭을 마중 나온 피에람 가문의 사람들이 쓴웃음을 지었다.
플로라의 얼굴이 점점 짜증으로 일그러지자, 로드릭이 황급히 걸음을 돌려 이안과 스텔의 앞에 섰다.
“이안. 그리고 스텔 양.”
“예.”
“……응.”
“잘 부탁하네.”
로드릭이 이안과 스텔을 향해 예를 표했다.
윗사람에게나 보일 법한 정중한 동작이었다.
이안은 로드릭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잘 부탁한다라…….’
플로라를 잘 봐달라는 걸까, 아니면 대륙을 지켜달라는 걸까.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로드릭의 진심은 전해졌다.
이안이 말했다.
“로드릭. 이제부터는 진짜 시간이 없어요. 로드릭이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해주세요.”
“알겠네. 이제부터 황제랑은 함께 갈 수 없으니까.”
황제가 로드릭을 감금하고, 로드릭이 탈출한 순간.
이미 둘은 함께할 수 없는 운명이 되었다.
황제를 적대시하는 건 매우 부담이 크지만, 이미 적이 되었다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내가 가진 모든 정치적, 군사적, 상업적 역량을 이용해 황제를 방해하겠네.”
“그래도 조심하세요. 미친 황제가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언제나 암살에 조심하시고요.”
“안 그래도 대비를 하고 있네. 적어도 자네들한테 또다시 걱정을 끼치는 일은 없을 거네.”
“무언가 일이 있으면 제 이름을 대고 교단과 상의하시고요. 그리고 또 레지스 산맥에…….”
이안과 로드릭은 앞으로 해야 될 일들에 대해 짧게 논의를 나누었다.
이안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만 몇 가지 일러주었다.
나머지는 전문가인 로드릭이 더 잘 해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략적인 이야기를 마친 로드릭은 가문 사람들과 함께 떠나갔다.
플로라는 그 뒷모습을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이안이 플로라에게 물었다.
“왜? 걱정돼?”
플로라는 순순히 인정했다.
“응. 황제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잖아. 네 말대로라면 흑기사도 황제가 다루는 거라며. 피에람에 흑기사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런 두려움이 바로 황제가 노리는 거야.”
언제 어디서든 흑기사가 찾아올 수 있다.
그 가능성은 황제의 반대 세력이 병력을 후방에 배치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렇기에 다음에 흑기사가 또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반드시 막아내야만 하는 거다.
“장거리 공간 이동 마법은 준비하는 데에 시간이 필요하니, 당분간은 안전할 거야.”
“후우. 그러면 다행이고.”
그제야 좀 안심이 되었는지, 플로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 우리도 얼른 가자. 황도에서 좀 떨어졌지만, 또 언제 추격해올지 몰라.”
“대수림으로 간다고 했었나?”
“그래.”
“하지만 대수림은 아무나 못 들어가는…… 뭐. 네가 다 생각이 있겠지.”
이제는 이안에게 신뢰가 생긴 덕에 플로라는 더 묻지 않았다.
당연히 스텔도 아무런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그런 동료들의 반응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앞장서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
제국의 남서쪽에 위치한 대수림은 대륙에서 가장 햇볕이 따스한 곳 중 하나다.
대수림 주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곳에서만 나는 희귀한 약초들과 짐승의 가죽.
그리고 드물게 찾아오는 숲의 종족과의 거래를 통해 살아간다.
대수림과 가장 가까운 곳에 지어진 마을. 로네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태양의 마을로 불릴 정도로 볕이 잘 드는 이곳은 대수림 관련 상업의 최전선으로, 원래는 수많은 상인들이 들락거려야 할 곳이지만…….
“왜 이렇게 한산해?”
플로라가 얼굴을 찌푸리며 마을을 둘러보았다.
상인들이 끄는 마차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흔히 보여야 할 여행객이나 약초꾼조차 보이지 않았다.
마차가 지나다니도록 잘 닦아 놓은 거리는 한산하기만 했는데, 가끔 지친 얼굴의 아낙들이 지나다닐 뿐. 다른 인기척은 느낄 수 없었다.
“날씨도 우중충하고…… 무슨 일이라도 났나?”
한가하게 여행을 다닐 처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태양의 마을이라 불리는 곳에 막연한 동경을 품고 있던 플로라였다.
기대에 못 미치는 풍경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안 역시 눈을 가늘게 뜨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짙은 먹구름…….’
[이상한 일이네요. 예전에 이곳에 왔을 때는, 구름 하나 보기 힘든 곳이었는데. 무슨 일이 벌어진 거군요?]
‘예. 이것도 내년에나 벌어졌을 스토린데. 벌써 일어나고 있네.’
입맛을 다신 이안은 곧장 마을에서 가장 큰 주점으로 향했다.
문이 열리자 알싸한 술 냄새가 훅 풍겨왔다.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주점에는 마을의 일꾼들은 모두 모아 놓은 듯, 북적이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그 시선들이 일제히 쏠렸다.
그리고 스텔과 플로라를 보고는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미, 미인.”
“예쁘다. 귀족들인가? 앞에 저놈은 호위고.”
“저런 사람들이 왜 여기에?”
호기심이 취객들의 눈에 감돌았다.
하지만 다가오거나 치근덕거리는 이들은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럴 기력이 취객들에게는 없었다.
그들의 퀭한 눈빛은 그들이 이렇게 대낮부터 술을 먹는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었다.
이안은 곧장 주점의 주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마을이 영 어수선하네요?”
“…….”
주인은 말없이 술병을 가리켰다.
이안이 품을 뒤져 돈을 건네자, 주인이 잔에 술을 따라준 뒤 이안과 스텔, 플로라에게 각자 한 잔씩 따라주었다.
“아, 술…….”
이안은 플로라가 뭐라 하기 전에, 스텔과 플로라의 잔까지 입에 다 털어 넣었다.
내심 술을 먹어보고 싶던 플로라가 불만의 시선을 보냈지만, 이안은 깔끔히 무시하고는 주인을 쳐다봤다.
주인은 술잔이 빈 걸 확인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소문에 둔한 모양이군. 그렇게 해서 상인은 해 먹지 못할 거고. 여행객이오?”
“뭐. 그런 셈이죠.”
“지금 숲의 종족 놈들이 사람들이 숲에 들어가는 걸 막고 있소. 발을 들이면 어떻게 귀신같이 달려와서 도끼를 던져대지. 심지어 괴수들까지 들끓는 실정이라, 마을 전체가 손가락만 빨고 있소.”
주인은 눈짓으로 주점 안을 가리켰다.
술에 잔뜩 취한 취객들은 음울한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얘기를 듣던 플로라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잠깐! 숲의 종족이 숲에 들어오는 걸 막고 있다고요? 대체 왜요?”
“글쎄. 요 한 달간 먹구름 탓에 해가 제대로 뜨지 않고 있소. 그게 우리 인간들 때문이라더군. 어처구니없는 일이지. 날씨와 기후를 한낱 인간 따위가 어떻게 조종하겠소.”
“하지만 제가 듣기로 숲의 종족은 지혜롭고 신비한 이들이라고 들었어요. 무언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쾅!
술잔을 거칠게 내려놓는 소리가 플로라의 말을 끊었다.
잔뜩 취한 사내가 이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이안은 슬쩍 일어나 플로라의 앞을 보호하듯이 섰다.
사내가 분노한 얼굴로 말했다.
“다시 말해봐. 그 자식들이 뭐? 이유가 있어?”
“예?”
“내 어머니가 죽었어. 그 자식들이 다짜고짜 던진 도끼에 머리가 쪼개졌지. 내 어머니가 죽은 데에도 이유가 있었던 거야?”
“저는 딱히 그런 의도로 말하려는 게…….”
사내는 조곤조곤 말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큰 분노가 느껴졌다.
덩달아 주점 안에 있던 취객들의 눈빛도 살벌해졌다.
지금 당장 나가지 않으면 달려들기라도 할 기세.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적의에 플로라가 당황했다.
“난 진짜로 그런 의도가…….”
“다들 힘들어서 제정신이 예민한 모양이네. 아니면 분풀이 대상이 필요하던가.”
그렇게 중얼거린 이안은 다시 주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취객들 따위, 몇이 덤벼들더라도 가뿐히 제압할 수 있었고, 아직 물어야 할 게 남았다.
“숲으로 안내해 줄 길잡이가 필요해요.”
“……이 상황에서도 태연하다니. 실력에 자신이 있는 모양이오?”
“뭐. 그런 셈이죠.”
“어느 정도로?”
“지금 당신이 저 사람들을 안 말리면, 내일부터 이곳 손님이 절반 정도는 줄 것 같은데.”
“허세가 아니었군.”
이안의 표정을 슬쩍 확인한 주인이 취객들에게 손짓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하던 취객들은 이를 빠득 갈더니, 마지못해 다시 자리에 앉아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주점 주인이 이 마을에서 꽤 영향력이 높은 사람인 것 같았다.
아니면 주인의 판단을 신뢰하던가.
사람들을 진정시킨 주인이 이안에게 물었다.
“그래서. 길잡이가 필요하다고?”
“예. 대수림에서 길을 잃으면 영영 못 빠져나오잖아요.”
“대수림에 들어갈 생각이라고? 아까 못 들었나? 숲의 종족들이 언제 공격해올지 모르오.”
“상관없어요.”
“길잡이들은 상관있어할 텐데.”
사지에 제 발로 들어가고 싶어할 사람은 없는 법이다.
아무리 큰돈을 준다고 해도.
이안이 말했다.
“잘 생각해보세요. 약초꾼들이나 사냥꾼들 중에 어떻게서든 대수림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적당히 나이도 있고, 경험도 풍부하고 절박하고 그런.”
“묘하게 구체적이군.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네만…….”
“그 사람으로 할게요. 안내해주세요. 아, 그리고 선물로 가져갈 포도주도 좀 챙겨주시고요.”
“……아직 누구인지 말도 안 했는데. 처음부터 다 알고 온 모양이오.”
알다마다.
게임에서 대수림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이벤트였으니.
마음 같아서는 바로 찾아가고 싶지만, 꼭 이 주점 주인을 거쳐야 하는 게 성가신 점이었다.
주점 주인은 선반에서 적당한 술병을 하나 꺼낸 뒤, 걸음을 옮겼다.
“따라오시오.”
“가게를 비워도 되겠어요?”
“됐소. 훔쳐갈 작자들도 아니고.”
그렇게 말한 주인을 홀로 앞서 가버렸다.
이안과 스텔은 그 뒤를 따랐고, 플로라도 주위의 따가운 시선에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주인은 마을의 외곽에 있는 한 허름한 집으로 향했다.
“콜록콜록.”
바깥에서도 들릴 정도로 집 안에서 기침 소리가 크게 들려왔고, 굴뚝에서는 대낮부터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주인이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똑똑.
“누구십니까.”
“접니다. 라울을 찾는 손님들이 있어서 왔습니다.”
“……손님은 무슨. 돌아가시오.”
“라울이 좋아하시는 포도주도 가져왔습니다. 손님께서요.”
“…….”
잠깐이 침묵 후,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문틈으로 수염을 지저분하게 기른 중년 사내가 이쪽을 훑어보더니, 이내 포도주에 시선을 주었다.
“예의가 뭔지 아는 사람들이군.”
“저는 이만 가볼 테니, 대화 나누시길.”
주점 주인이 떠나가고.
라울이라 불린 사내는 이안 일행을 유심히 살폈다.
조심성이 많은 사내였다.
라울이 입을 연 건 한참 뒤였다.
“집 안으로 손님을 들이질 못하는 건 양해해주시오. 안에 병자가 있거든.”
“대수림 지리에 밝다고 해서 왔습니다.”
라울이 떨떠름하게 답했다.
“주점 주인한테 얘기 못 들었소? 원래도 대수림은 위험한 곳이었지만, 지금은 도저히 들어갈 만한 곳이 아니오. 알았으면 썩 물러…….”
“상관없습니다.”
라울이 미간을 좁혔다.
“뭐라고?”
이안이 다시 한번 말했다.
“상관없습니다. 당신은 길 안내만 하면 됩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아픈 아들을 위해서라도 돈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약이랑 장작값이 만만치 않을 텐데.”
그 말에 라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정곡이라는 증거.
이안은 그런 라울에게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그리고 당신 아들 병을 치유하는 법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