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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62화 (163/222)

162. 대수림(2)

“그리고 당신 아들 병을 치유하는 법. 저는 알고 있습니다.”

“뭐요?”

그 말에 멈칫한 라울이 곧바로 이안의 멱살을 잡았다.

“거, 거짓말 하지 마! 어떤 사제님도, 치료사도 내 아들의 병을 치료하지는 못했어! 너처럼 말한 사기꾼들은 다 돈만 받고 도망쳤지!”

경어마저 잊은 채, 라울은 거칠게 말했다.

그 어조에서는 절박함과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사기꾼들에게 참으로 많이 속았을 것이다.

절박한 이들일수록 속이기 쉬운 법이니.

이안은 멱살을 붙잡은 손을 부드럽게 떼어냈다.

딱히 놓아줄 생각이 없었던 라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을에서 힘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그의 손을 이렇게 가볍게 떼어내다니.

이안이 말했다.

“정확히 말하면, 제가 치유법을 아는 건 아닙니다.”

“그런……!”

“하지만 치유할 수 있는 사람은 알고 있죠.”

라울이 다급히 되물었다.

“그게! 그게 누구요!”

“숲의 종족입니다.”

신성으로 부리는 치유 기적은 인간의 기력과 재생력을 늘려, 상처와 병을 치유한다.

하지만 숲의 종족은 자연의 힘 그 자체를 이용해 사람을 치유한다.

따라서 신성으로 치유할 수 없는 병이라도, 숲의 종족이 치유할 수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라울의 아들도 그 경우에 속한다.

하지만 이안의 대답에도 라울은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숲의 종족…… 꿈같은 소리를 하는군. 설령 그들에게 내 아들을 치유할 능력이 있다고 쳐도. 그들이 그렇게 해줄 이유가 있소? 도끼나 던지지 않으면 다행이지.”

“제가 숲으로 들어가려는 이유가 바로 그들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혹시 그들과 연줄이 있소?”

설마 하는 심정으로 라울이 이안을 쳐다보았지만,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는 사람이 하나 있긴 했는데…… 지금은 없죠.”

“……지금 누굴 갖고 놀리시오?”

“하지만 얘기를 나눠보면 잘 풀릴 겁니다. 분명.”

라울이 이안을 잠시 노려보았다.

그러곤 집안에 누워 있는 아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안이 말한 대로 슬슬 돈이 떨어지던 참이었다.

땔감도, 약도, 식량도 얼마 남지 않았다.

현재 마을 사람들의 도움도 기대하기 힘들다.

모두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으니까.

속으로 신음을 삼킨 라울은 다시 한번 이 기묘한 손님들을 훑어보았다.

‘예사 인간들은 아닌데…….’

검은 머리의 검사.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아름다운 사제. 신분 높은 귀족으로 보이는 여자까지.

어디서 흔히 볼 조합의 무리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라울은 이안이 신경 쓰였다.

그가 하는 말은 하나같이 근거라고는 없는 무모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왜인지 그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절로 마음이 기울었다.

‘아니면 단지 내가 믿고 싶었던 것뿐일 수도 있지.’

라울은 쓰게 웃었다.

이대로 가면 어차피 모든 게 끝이다.

그렇다면 자그마한 확률에라도 도박을 걸어보는 게 낫지 않겠나?

긴 고민 끝에 라울이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기꺼이 안내해드리지. 어디로 가고 싶으시오?”

“숲의 종족들이 있는 곳으로.”

“……그냥 저기 들어가면 알아서 도끼를 던져 대러 올 텐데, 무슨 길잡이가 필요하단 말이오.”

이안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답했다.

“음…… 가보면 알아요.”

***

마음 같아서는 곧바로 대수림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라울은 준비할 시간이 조금 필요하다 했다.

이안은 필요한 건 전부 사라며 금화를 건네주었다.

침을 꿀꺽 삼키며 금화를 내려다보던 라울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우리 집에서 묵어도 괜찮겠소?”

“뭐. 비만 피할 수 있으면 된 거죠. 그리고 아무래도 저희가 마을 사람들한테 미움을 사 버린 것 같아서요.”

“윽. 미안하다고 했잖아.”

이안의 시선을 받은 플로라가 툴툴거렸다.

다시 고개를 돌린 이안이 라울에게 걱정 말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여기 아드님은 잠시 우리가 보고 있을 테니까, 얼른 갔다 오세요.”

“그래도…….”

“어서요.”

“알겠소. 그럼 부탁드리겠소.”

처음 보는 이들에게 아들을 맡기는 건 불안했지만, 그래도 일행 중에 스텔이 있다는 점 덕분에 마음을 놓았다.

사람은 못 믿어도, 신은 믿는 게 이 세상 사람들이었으니까.

셋이서 남게 되자 플로라가 이안에게 물었다.

“굳이 저 사람이어야 해? 길잡이는 여러 명 있잖아. 사람을 돕는 건 좋은 일이지만…….”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줘야 하거든. 그것보다…… 확실히 상태가 심각하긴 하네.”

“콜록콜록.”

침상에 누워 있는 어린 소년이 마른기침을 했다.

깡마른 몸에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소년의 생명은 금방이라도 꺼져버릴 것처럼 위태로웠다.

소년의 상태를 살핀 이안이 말했다.

“이거 진짜 이대로 가다가는 홱 가겠는데? 스텔. 치유 기적을 좀 걸어줘. 플로라. 너는 집 안 온도 좀 올리고.”

“……왠지 난로 취급받은 것 같아서 열 받는데.”

플로라는 불평을 토해내면서도, 사람을 살리기 위한 일이라 순순히 불꽃을 만들어냈다.

순식간에 방안이 훈훈해졌다.

스텔은 기도를 올려, 치유 기적을 부렸다. 소년의 몸을 하얀빛이 감싸 안았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던 소년의 혈색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좋아. 조금 기운을 차린 것 같네.”

그만큼 스텔의 기적이 발휘하는 힘은 놀라웠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이다.

원인인 병을 어떻게 하지 못하면, 구멍 뚫린 항아리에 물을 쏟아붓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래도 이걸로 며칠은 더 버틸 수 있겠지.”

응급처치를 마치고, 할 일이 없어진 셋은 멍하니 창밖을 구경했다.

“아. 비 온다.”

빗줄기가 드문드문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거센 비는 아니었다.

하지만 앞으로 대수림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 썩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플로라가 물었다.

“대수림은 비가 그치면 들어갈 거야?”

“아니.”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마 한동안 이 날씨가 이어질 거야.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거든.”

“……그래?”

플로라는 말없이 창가로 다가가 하늘에 짙게 깔린 먹구름을 올려다보았다.

확실히.

기분 탓인지 모르지만, 어딘가 이질적이고 불길함이 느껴지는 구름이었다.

***

라울이 준비를 마치는 데에는 이틀이 걸렸다.

라울이 집을 비우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이안 일행은 라울의 아들을 간병했다.

그리고 떠나는 당일 아침.

스텔이 마지막으로 청년에게 치유 기적을 걸어주었다.

놀랄 정도로 호전된 아들의 상태에 라울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 이렇게 호전되다니! 사제님! 정말 고맙소!”

“응.”

라울이 스텔의 손을 잡고 감사를 표하려 했지만, 스텔이 이안의 뒤로 피해 버렸다.

머쓱하게 수염을 긁적인 라울이 침상에 누운 아들을 내려다보았다.

“금방 눈이라도 뜰 것 같소. 혹시…….”

“조금 더 상태를 지켜보자고 말하려는 거면, 소용없다고 말해드리고 싶네요. 결국, 병을 치료해야 일어날 수 있을 거예요.”

“……알겠소.”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 라울은 아들이 덮은 이불을 조심스럽게 끌어 올려주었다.

그러고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어서 출발합시다.”

“준비는 다 끝났어요? 위험한 곳이고, 웬만하면 우리가 보호해드리겠지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요.”

“이미 죽음은 각오했소.”

라울은 걸음을 옮기며 뒷말을 이었다.

“어차피 아들이 죽으면, 나도 죽을 생각이었거든.”

각오가 느껴지는 말.

이안이 물었다.

“아들은 이렇게 놔둘 겁니까?”

“주점 주인이 아침저녁으로 보러와 주기로 했소. 거기 사제님께서 기운을 복 돋아 주셨으니, 며칠 정도는 괜찮지 않겠소?”

“좋네요. 그럼 어서 출발…… 왜 그래?”

이안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플로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걸음을 못 떼고 있었다.

“아니, 혹시나 중간에 불이 꺼지면 어떡하나 해서…….”

걱정이 마음에서 안 떨어지는지, 발을 떼지 못하던 플로라는 눈을 감고 무언가를 고민했다.

그러다 손을 그러모으더니, 이내 구체형의 불꽃을 만들어냈다.

언뜻 평범해 보이는 불꽃은 자세히 보면 느릿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플로라가 설명했다.

“위력을 조절하는 대신 지속시간을 늘려봤어. 처음 시도해보는 거라 잘될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나흘은 유지 될 거야.”

“오오. 괴, 굉장합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 중에서 이 불꽃이 마법적으로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이안은 다른 부분에서 감탄했다.

“저 사람이 걱정되어서, 방금 마법을 고안해낸 거야?”

“따, 딱히. 그냥 괜히 신경 쓰일만한 요소를 없애둔 거뿐이야.”

얼굴이 빨개진 플로라가 후다닥 앞서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이네스가 흐뭇하게 말했다.

[저런 작은 따뜻함이 모여, 영웅이 되는 것이겠죠. 부디 시련이 닥쳐도, 플로라가 저 따스함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네스의 목소리에는 안타까움이 깃들어있었다.

그녀의 동료는 결국, 그 따스함을 잃고 말았으니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이안은 어느새 앞서나가는 일행을 서둘러 따라잡았다.

선두에 선 라울은 대수림이 시작되는 경계에 서서 긴장한 얼굴로 정글도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각오하시오. 직접 대수림을 겪어보면, 만만치 않을 테니.”

“가시죠.”

“……알겠소.”

라울은 풀과 나무가 듬성듬성 나 있는 땅에 발을 디뎠다.

플로라, 스텔, 이안 순서로 이어서 숲에 들어섰다.

대수림에 한 발 들어서자, 주위 공기가 급격히 변했다.

빛은 빽빽한 나뭇잎에 가려져 숲은 한낮임에도 꽤 어두웠다.

게다가 공기의 습기나 감촉마저 달라, 마치 별세계에 세상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었다.

라울은 하늘 높이 뻗어 있는 거목의 줄기를 조심스럽게 짚으며 나아갔다.

“발 조심하시오. 대수림에는 무엇이 나타나든 이상하지 않으니. 짐승이나 괴수들이 파 놓은 굴에 빠질 수도 있소.”

노련한 라울의 지시에 일행은 순순히 따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라울이 걸음을 멈추고 앞쪽을 가리켰다.

해골 하나가 커다란 화살과 함께 나무에 꿰뚫려 있었다.

여기저기 깨지고 부러져, 만신창이가 된 해골.

그의 최후가 상당히 고통스러웠을 거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플로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끔찍해.”

“마치 우리에게 경고라도 하는 것 같소. 숲으로 들어오지 말라고. 괜찮다면 시체를 거둬도 되겠소? 아무래도 아는 사람 같은지라…….”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스텔에게 눈짓했다.

스텔이 말없이 기도를 올리자, 빛무리가 해골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조금 뒤, 해골이 가루가 되어 공기 중에 흩어졌다.

라울이 감탄하며 말했다.

“허…… 설령 이곳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사제님 덕에 장례 걱정은 없겠소.”

그 사이, 이안은 시체에 박혀 있던 화살을 살폈다.

일반 화살보다 더 크고, 특수한 나무로 만들어져 엄청나게 단단한 물건이었다.

‘흉측한 물건이네. 심지어 숲의 종족 특유의 신비까지 서려 있어.’

이런 거에 맞았다가는 일반인들은 뼈도 못 추릴 터.

저항해볼 생각조차 못 한 채, 주점에서 술이나 축이는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나무에서 화살을 뽑아 바닥에 버린 이안이 말했다.

“어서 가죠. 숲의 종족의 영역까지는 부지런히 가야 하잖아요?”

“하지만 방금 그 흔적이 있었다는 건, 놈들이 곧 몰려온다는…… 이런. 말이 씨가 된다더니.”

라울이 당황해 중얼거렸다.

그가 고개를 돌린 곳에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눈, 수십 쌍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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