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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63화 (164/222)

163. 대수림(3)

울창한 잎사귀들이 만들어낸 어둠 속에서 크고 작은 노란 눈동자 수십 쌍이 형형한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안조차 적이 언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를 정도로 은밀한 접근이었다.

라울은 적의 등장에 잠시 주춤하다, 이내 용감히 무기를 쥐며 외쳤다.

“뭐, 뭘 쳐다보는 거냐 이 괴물들아! 덤빌 테면 덤벼라!”

하지만 그런 라울의 외침에도, 눈동자들은 천천히 이쪽을 관찰했다.

그러다 돌연.

일행이 선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어어……!”

눈동자들이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플로라가 곧장 주위에 화염을 흩뿌려 어둠을 밝혔다.

이윽고 눈동자들의 정체가 드러났다.

상대는 여럿이 아닌 하나였다.

마치 커다란 침엽수를 이리저리 억지로 구부러트려 만든듯한 흉측한 생물.

벌레처럼, 혹은 뱀처럼 꿈틀거리는 괴수의 몸에는 수십 쌍의 눈이 박혀 있었다.

그런 괴물이 땅속에 박혀 있던 뿌리를 들어 올린 충격으로 지면이 흔들렸다.

당황한 라울의 얼굴이 사색으로 물들었다.

“저, 저건 대체……!”

스텔과 플로라도 놀란 건 마찬가지.

하지만 미리 대비하고 있던 이안은 침착하게 지시를 내렸다.

“플로라. 마법을 준비해. 네 불꽃이라면 충분히 태울 수 있어.”

“어? 어.”

플로라는 허공에 손을 휘저어, 순식간에 다섯 개의 화염 구체를 만들어낸 뒤. 곧바로 앞으로 날려 보냈다.

빠르게 날아간 화염 구체가 나무 괴수에게 직격 했다.

쾅!

파스스스스!

괴수에게는 입이 없었다.

하지만 고통을 느끼기는 하는지, 검은 잎사귀가 달린 가지를 파르르 떨었다.

온몸이 불타는 나무가 이리저리 몸을 떨어대는 건, 사뭇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방금의 일격만으로는 괴수를 죽이기에 조금 부족했다.

괴수가 이쪽으로 몸을 틀더니, 이내 미친 듯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 이걸 버티다니!”

“미친 듯이 튼튼한 게 이놈들 특징이야. 내가 시간을 끌 테니까, 더 큰 마법을 준비해.”

이안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앞으로 나서며 생각했다.

‘대수림의 나무 괴수. 스토리상 후반부에 등장하는 적들답게 굉장히 까다롭지.’

기형적으로 강화된 껍질은 몹시도 튼튼하고, 그 크기 덕분에 일격 하나하나가 몹시 강하다.

게다가 저 멍청해 보이는 외양과 달리…… 이 괴수들은 제법 똑똑하게 싸운다.

우드드득.

“윽!”

갑자기 땅속에서 자라난 나무 넝쿨이 이안의 발목을 옭아매려 했다.

이안은 빠르게 검을 내질렀지만, 원체 줄기가 질겨 한 번에 베이지가 않았다.

그렇게 발목이 묶인 사이.

괴수는 수십 개의 나무줄기와 뿌리를 마치 다리처럼 활용해, 이안을 향해 돌진해왔다.

상대가 피할 가능성을 차단한 뒤, 곧바로 큰 일격을 날리는 연계.

단순하지만 위력적인 전략이었다.

이안은 시시각각으로 가까워져 오는 괴수를 보며 조용히 정신을 집중했다.

사실 피하려면 피할 수 있었지만, 그러면 괴수는 곧바로 이안을 지나쳐 플로라와 스텔 근처에서 날뛸 거다.

그건 별로 달갑지 않은 일이다.

언제나 후방의 둘이 자신의 일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 것. 그게 이안의 역할이다.

‘딱 한 호흡에 베어서 멈춰 세워야 해.’

이안은 차분하게 시간을 계산했다.

검광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찰나.

그마저도 최대한 아껴야 한다.

쿠구구궁!

괴수가 다가올수록 땅의 진동이 심해졌다.

온몸이 쿵쿵 울리는 감각에도 이안은 끝까지 침착함을 유지했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왔을 때.

이안은 하얀 검광이 시린 성검을 아래로 내려그었다.

샤악!

검의 궤적을 따라 검광이 움직였고.

딱 그 궤적에 따라 달려들던 괴수의 몸에 세로로 실선이 생겨났다.

파삭!

장작 패는 소리와 함께 나무 괴수의 몸이 정확히 반으로 갈라졌다.

잘린 두 몸은 이안을 중심으로 양옆으로 쪼개져, 관성에 의해 튕겨 나갔다.

지켜보던 일행이 경악했다.

“뭐야!”

“……!”

놀란 건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이안은 성검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뭐야 이 위력. 손맛이 전혀 없어.”

괴수의 단단한 육체는 성검의 날에는 닿지도 못했다.

그저 검광과 접촉한 순간, 부드럽게 갈라졌을 뿐.

때문에 이안의 손에는 아무런 충격도 전해지지 않았다.

애초에 검광으로 상대를 밀어내 시간만 벌어줄 생각이던 이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파스스스!

양분된 괴수의 두 몸은 갈피를 못 잡은 채, 기괴한 움직임으로 이곳저곳을 뒹굴었다.

플로라는 준비했던 마법으로 괴수를 불태웠다.

다행히 겉껍질과 달리, 괴수의 속은 그렇게까지 단단하지 못했다.

불이 붙어 바르작거리는 괴수를 보며, 라울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저런 괴물을 가볍게 무찌르다니. 당신들. 생각보다 더 대단한 이들인 모양이오.”

라울은 긴장으로 다리가 풀렸는지, 바닥에 주저앉았다.

“후우. 내 살면서 이런 괴수가 대수림에 있다는 건 본적도, 들은 적도 없소. 심지어 이곳은 숲의 외곽인데…….”

“이런 게 숲 전체에 돌아다니고 있는 거야?”

플로라의 질문에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이 정도면 괜찮은 편이야. 안쪽에는 더 강한 놈들이 있어.”

“아! 그럼 숲의 종족이 인간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한 건, 위험하니까 배려한 건가?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그. 사람들은 좋게 말하면 잘 안 듣잖아?”

“아니. 그건 아니야. 왜냐하면, 이게 그 숲의 종족이거든. 정확히는 숲의 종족이었던 생물이지.”

“뭐?”

플로라가 여전히 불타고 있는 괴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 징그럽고 두려운 생물이 한때는 숲의 종족이었다니.

신비로운 숲의 종족에게 나름의 환상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었다.

라울 역시 놀라운 얼굴로 물었다.

“그, 그게 정말 사실이오? 그렇다면 대수림에 있는 숲의 종족이 모두 이렇게 되었다는 거요?”

“아직 전부는 아니에요. 하지만 내버려 두면 곧 그렇게 되겠죠.”

“허…….”

탄식을 내뱉던 라울이 이내 무언가를 깨달은 듯, 급하게 말했다.

“그, 그렇다면 내 아들을 치료할 이들도 금방 사라진다는 것 아니오.”

“그렇겠죠?”

“…….”

말없이 일어난 라울은 다시 길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급한 마음 때문에 서두르기는커녕, 괴물을 한번 마주친 탓인지 그 눈길은 한층 더 신중했다.

‘역시. 길잡이는 제대로 구했어.’

일행은 길잡이의 뒤를 천천히 따랐다.

이후에는 누군가를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새소리 하나 없는 고요한 숲속에는 일행의 발에 잔가지 부서지는 소리만이 울렸다.

그렇게 일행은 다음날까지 내리 움직였다.

해가 뜨면 이동하고, 밤이 오면 라울과 다른 사냥꾼들이 만들어 놓은 쉼터에서 잠들었다.

주위를 경계하며 천천히 걷는 데다가, 대수림의 낮은 워낙 짧아 시간에 비해 먼 거리를 이동하지는 못했다.

그런 느린 전진이 답답했던 걸까.

커다란 나무의 아래에 있는 토굴에서 야영 준비를 마친 두 번째 날 밤.

플로라가 불만을 터트렸다.

“너무 느려!”

“응?”

“이틀이나 지났는데, 이동한 거리 자체는 얼마 안 되잖아. 이렇게 시간이 끌리면…….”

플로라가 말끝을 흐렸다.

왜 보채는지 의아해하던 이안은 플로라의 속마음을 깨달았다.

‘라울의 아들이 걱정되는 거구나.’

병이 언제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는 만큼. 시간은 단축할수록 좋은 건 당연한 일이다.

플로라는 알게 모르게 병든 소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것이다.

플로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좀 더 빨리 움직이면 안 될까? 아니면 밤에도 이동하던가. 어차피 캄캄한 건 크게 다를 거 없잖아.”

하지만 그 말에 단호히 고개를 저은 건 오히려 라울이었다.

“안 되오. 대수림에는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신중을 기해야 하오. 특히 요즘 같은 시기라면 더욱.”

이안이 라울의 말을 바로 받았다.

“그리고 밤에는 저 괴물들이 더 사납고 활동적으로 바뀌어. 자칫 저것들에 둘러싸이면 어떻게 될지 몰라.”

“그래…….”

플로라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의욕만 앞서서 위험을 자초하는 건, 별로 이성적이지 않은 행동이니.

그 뒤.

일행은 불침번을 정한 뒤, 잠에 들었다.

첫 순서는 이안이었다.

이안은 토굴 안에서 곤히 잠든 동료들을 보다가, 밖으로 나섰다.

빼곡한 이파리들이 하늘을 가려, 희미한 달빛만이 비집고 들어오는 대수림의 밤은 몹시도 어두웠다.

하지만 이안의 눈은 대낮처럼 주위를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주위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확인한 이안은 검을 뽑았다.

‘검광. 생각보다 더 대단한 힘이었어요.’

이안은 나무 괴수와의 싸움을 상기했다.

나무 괴수는 그 튼튼함만으로는 게임에서도 순위권 안에 드는 적이었다.

그런 괴수가 검광에 닿자마자 반 토막 났다.

‘게임에서도 검광은 있어요. 검술을 습득해 레벨을 많이 올리면, 후반부에 배우도록 설계된 기술이죠. 하지만…… 이렇게까지 강하지는 않았어요.’

게임에서 나무 괴수를 단칼에 베어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게, 이런 건 게임으로 따지면 명백히 밸런스 파괴인 기술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이안은 물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검에 무얼 담았기에, 이렇게 살벌한 검광이 나올 수 있는 거예요?’

예상했던 질문인 듯, 이네스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글쎄요. 특별히 무언가를 담아보려고 한 적은 없어요. 담고 싶다고 담아지는 것들도 아니고요.]

‘그냥 하다 보니 되었던가요? 언제나처럼.’

[정확해요. 그냥 하니까 되던데요?]

예상대로, 이제는 익숙해진 얄미운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이안은 딱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검광에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실리고. 이네스가 어떤 일들을 겪으며 이곳까지 왔음을 잘 아니까.

‘그나저나 왜 이렇게 검광의 유지시간이 짧은 줄 대충 알겠어요.’

[왜인가요?]

‘이네스님의 검광은 제가 감당하기에는 출력이 너무 강한 것 같아요.’

불꽃을 더 뜨겁게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연료가.

더 빨리 달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게 당연한 이치다.

이네스의 검광도 마찬가지.

이런 무지막지한 위력의 검광을 유지하려면 그만큼의 정신력. 혹은 심력이 필요하다.

애초에 누구보다 정신이 강한 이네스가 사용할 때는 별문제가 없었지만…… 당연히 이안이 사용하려 하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강한 위력을 얻었지만, 그만큼 지속성을 잃었어요.’

이네스의 검광은 엄청난 변수다.

게임에서와 달리, 이안은 강력한 파괴력을 얻었다.

불리한 상황도 순식간에 뒤집을 수 있는 파괴력을.

하지만 그에 대한 대가로, 검광의 지속성을 잃고 말았다.

이는 싸움의 안전성을 크게 떨어트릴 것이다.

‘이 점을 극복하려면 제가 정신을 더 단련하거나, 검광을 더 효율적으로 뽑아내거나 하는 수밖에 없겠네요. 흑기사를 상대할 때만큼이라도 검광을 뽑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서두르지 마세요. 정신을 단련하는 것도. 검광을 수련하는 것도 단기간에 이뤄낼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예. 그래야겠죠.’

결국에는 조금씩. 그리고 꾸준히 전진해내는 게 중요하다.

이안은 검을 쥔 손을 부드럽게 움직여 동작을 하나하나 펼쳐내기 시작했다.

설령 높은 경지에 이르렀어도, 기본기는 중요한 법이니.

이안은 시간 가는 것도 잊고 검을 휘둘렀다.

처음에는 허공을 향해 검을 내저었지만, 이내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베어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검을 몇 번 휘둘렀는지 잊어버릴 정도로 수련에 몰두하던 그때.

희미한 소음이 이안의 귀에 들렸다.

‘싸우는 소리.’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고함과 무기 부딪히는 소리.

제법 큰 규모로 싸우는 소리에 이안은 고민 없이 땅을 박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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