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66화 (167/222)

166. 대수림(6)

과거.

이안은 호크를 이용해 햇빛과 비슷한 빛을 내뿜어 숲의 종족을 치유한 적이 있었다.

그때 익혀둔 요령은 기억 한켠에 남아 있다 지금 또다시 빛을 발휘했다.

“……!”

주민들은 너무나 눈부신 걸 본다는 듯, 한 손으로 눈을 가렸다.

실제로 호크가 발산하는 빛이 강하기도 했고.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우마딜로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대체 어떻게.”

“우선 환자들부터.”

우마딜로의 말을 끊고, 이안은 앞으로 걸어 나갔다.

어떻게 알아챘는지 집안에 있던 사람들도 몰려나와 실로 오랜만의 느껴보는 햇볕의 감각을 만끽했다.

개중에는 눈물까지 흘리는 자들도 있었다.

이안이 걸어 나가자 주민들은 말없이 길을 비켜주었다.

부상병들이 한곳에 모여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호크. 부탁해.”

“핍!”

명령을 받은 호크는 힘차게 날아 부상병들의 위에서 비행했다.

강한 빛이 내리쬐자, 고통스러워하던 부상병들의 표정이 나아졌다.

우마딜로가 외쳤다.

“지금이다! 치유하라!”

치료사들이 지팡이를 들고 땅을 힘껏 찍었다.

그러자 바닥에서 넝쿨들이 돋아나 부상병들을 옭아맸다.

파릇하던 넝쿨들은 부상병들에게 생명의 기운을 나눠주고 이내 시들어버렸다.

그러면 다음 치료사가 또 땅을 두드려 다른 넝쿨을 만들어냈다.

치료사들의 꾸준한 노력 덕에 부상병들의 신체가 빠르게 회복되었다.

원래라면 사흘을 넘기지 못할 거라고 판단되었던 이들이었다.

상태가 안정되자 주민들은 말없이 부상병들을 안아주며 기쁨을 표했다.

그때쯤 이안도 호크를 거두어들였다.

가뜩이나 검광까지 쓴 참이다.

최대 출력으로 호크를 오래 유지하는 건 정신이 버티지 못했다.

이안은 코피가 쏟아지자, 누가 보기 전에 슬쩍 닦아버렸다.

하지만 더 조치하기도 전에 코피는 멎어버렸다.

하얀 입자가 코 주위에 맴돌고 있었다.

이안은 뒤를 돌아보고, 작게 말했다.

“고마워.”

“응.”

스텔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닦으려고 했는데 용케 알아봤네.”

“항상 보고 있으니까.”

“……뭐?”

신경 쓰이는 말을 들어 다시 되물으려는 이안에게 숲의 종족들이 다가왔다.

몹시 기대하는 눈빛으로.

그중에는 우마딜로도 있었고 카도도 코를 후비면서 서 있었다.

이안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오늘은 더 안 돼요. 무한정 뿜어내는 게 아니라고요.”

잠깐 아쉬운 표정을 짓던 우마딜로가 물었다.

“대단한 능력이다. 빛의 정령인가?”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맞아.”

“빛의 정령은 처음 본다. 심지어 태양 빛을 뿜어내다니.”

“엄밀히 말하면 햇빛은 아니고, 그 비슷하게 흉내 낸 것뿐이야. 예전에도 숲의 종족을 치유한 적이 있었거든?”

“동족을?”

문득, 예전에 인연이 있던 숲의 종족. 나바혼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와 함께 다녔던 추억이나 안타까운 죽음도.

‘아. 그러고 보니…….’

이안은 황급히 주머니를 엎었다.

이리저리 흩어진 잡동사니 사이에서 검은색 씨앗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이안은 씨앗을 움켜쥐며 말했다.

“나바혼이라고 알아?”

나바혼이라는 말에 주민들이 웅성거렸다.

우마딜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다. 오래전에 숲을 떠났다. 혹시 나바혼을 만났나?”

이안은 나바혼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했다.

마녀에게 조종당한 일이나, 초원에서의 안타까운 죽음도.

이안은 나바혼이 건네준 씨앗을 우마딜로에게 건넸다.

“나바혼이 죽기 전에 나한테 줬던 거야. 가능하면 대수림의 동족들에게 전해달라 하더라고.”

씨앗을 건네받은 우마딜로는 손안의 자그마한 물체에 한참이나 시선을 주었다.

이안이 물었다.

“친한 사이였나 봐?”

“내 형이었다.”

“아.”

‘그렇게 말하니 나바혼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이안 입장에서는 숲의 주민들은 죄다 비슷하게 생겨, 구분하기 쉽지 않았다.

씨앗을 받아든 우마딜로는 카도에게 걸어갔다.

“아버지. 나바혼의 씨앗이다.”

맹하게 서 있던 카도가 씨앗에 눈길을 주었다.

“응? 나바혼이 누구지?”

“…….”

지켜보던 이들과 우마딜로 모두 말을 잃었다.

호기심이 동했는지, 카도는 씨앗을 집어 들어 유심히 살폈다.

“누군지 몰라도 강한 생명이 느끼는 씨앗이군. 분명 살아 있을 적에는 강한 전사였을 것 같다. 그렇지 않나?”

카도의 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그 후로 일행은 마을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이안은 매일 오후 12시마다 마을 중앙 공터에 가 호크를 소환했다.

그러면 마을 주민들이 모두 모여들어 빛을 만끽했다.

그 시간에는 사냥을 나가는 이도, 일을 나가는 이도 없이 모두 모였다.

“아아.”

“빛이다.”

호크가 하늘을 날아다니면 주민들은 일제히 팔을 위로 뻗었다.

마치 어미 새를 보며 먹이를 달라고 아우성치는 새끼 새들 같은 모습이었다.

‘이 사람들한테는 햇빛이 밥이니 크게 다를 건 없나.’

적당한 시간이 지나자, 이안은 호크를 돌려보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

주민들은 눈에 띄게 아쉬워하는 기색이었지만, 이안에 대한 감사는 잊지 않았다.

“오늘도 고맙다.”

“내일도 부탁한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라. 반드시 사냥해오겠다.”

숲의 종족 특유의 딱딱한 성격을 생각한다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친절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상할 건 없다.

햇빛이 필요한 그들에게 이안은 그야말로 구세주와 다름없었으니까.

심지어 이안이 매일 빛을 쐬어주고 난 후, 주민들 사이에서 병이 발병하는 일도 사라져 버렸다.

오죽하면 우마딜로가 이렇게 말했을 정도였다.

“너만큼 빨리 우리들의 신뢰를 받은 사람은 아마 역사 속에서도 없었을 거다. 이참에 그냥 우리와 함께 사는 게 어떤가?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바깥의 골치 아픈 일들에서 벗어나 평온하게 살자.”

다소 어처구니없는 제안에 이안은 그저 쓴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어쨌건, 이안과 호크 덕분에 마을 주민들은 기운을 되찾고 전사들은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다.

우마딜로는 전력을 재정비했다.

그는 다시 있을 싸움에 대비해 필요한 것들을 꼼꼼히 준비해나갔다.

목표는 변절자들이 막고 있는 어머니 나무로 향하는 길이다.

그렇게 우마딜로가 준비를 해나가는 사이. 라울은 치료사와 함께 마을을 떠났다.

우마딜로는 라울의 손에 대수림에서만 나는 진귀한 물건들을 선물로 건네주었다.

“변절자들도 한때는 우리의 가족이나 친우였다. 그들의 만행에 대해 우리가 대신 사과하겠다.”

“저, 저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이걸…….”

“은인을 이곳까지 안내해주지 않았나. 그렇다면 너도 은인이다.”

라울은 감격해 우마딜로와 이안 일행에게 거듭 감사를 표했다.

마을로 돌아오면 꼭 집에 들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렇게 모든 게 무리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딱 하나만 빼고.

“너, 이름이 뭐였지?”

“이안입니다. 이안.”

“그래 이안. 악마는 도대체 언제 잡으러 가나?”

당장 5분 전에 알려준 이름을 잊어버리는 카도는 어째서인지 결사대에 대한 건 잊지 않고 끈질기게도 물어왔다.

‘우마딜로는 하루 정도면 잊어버릴 거라고, 적당히 맞춰달라고 했는데 벌써 사흘째잖아.’

한숨을 푹 내쉰 이안이 벌써 열 번도 넘게 반복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곧 대수림 안쪽에 있는 악마를 토벌하러 갈 거예요. 그때까지만 기다리세요.”

“거짓말! 악마는 저 북해 너머에 있다!”

“악마가 한둘인 줄 아세요? 북해 너머 악마는 나중에 잡으러 갈 거예요.”

“그런가? 그러면 나도 대비를 해야겠군.”

카도는 낡은 도끼를 꺼내 숫돌에 날을 갈았다.

카도 만큼이나 오래된 도끼는 도저히 무기 구실을 하지 못할 것 같았지만, 이안은 그러려니 했다.

‘어차피 전투에는 안 데려간다고 했으니까 괜찮겠지.’

이안은 카도가 영 껄끄러웠다.

게임에서는 만나보지 못한 캐릭터인 점도 그렇고, 여러모로 함부로 대하기 힘든 점도 그랬다.

이안은 노약자와 병자들에게 약했다. 카도는 둘 다였다.

마음이 안 좋은 건 플로라도 마찬가지였다.

플로라가 불편한 얼굴로 말했다.

“이래도 될까?”

“뭘.”

“따지고 보면 우리, 저 노인에게 거짓말하고 있는 거잖아. 뭔가 못 할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렇다고 진짜로 저 사람을 동료로 들일 수는 없는 거니까.”

“그건 그렇지만. 앗 차가!”

플로라의 얼굴 위로 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이안과 플로라, 스텔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이런 소나기가 자주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빗방울은 점점 굵어지다, 이내 맹렬히 쏟아붓기 시작했다.

하늘에 구멍이 뚫리기라도 한 듯한 기세였다.

플로라는 급하게 머리 위로 불덩어리를 만들어냈지만, 빗물이 어찌나 센지 증발한 수증기가 주위에 자욱하게 퍼져나갈 정도였다.

이 난데없는 재난에 나와 있던 주민들 모두가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우마딜로는 걱정스레 창밖을 보았다. 비가 어찌나 거센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거센 비는 살면서 처음이다. 자연히 노한 것 같다.”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긴 하지.”

“……아무래도 비가 그칠 때까지 전투는 미뤄야 할 것 같다.”

우마딜로는 고심 끝에 말했다.

시간을 끌어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걸 그도 알았지만, 이런 폭우 속에서 싸우는 짓은 미친 짓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최대한 빨리 전투를 준비해.”

“뭐?”

“이 비. 그냥 놔둬서는 그치지 않을 거야. 오히려 시간이 끌릴수록 마을이 비에 잠길 거야.”

“확실한가?”

우마딜로는 진지한 눈으로 물었다. 이안도 진지하게 마주 봐 주었다.

“알았다.”

우마딜로는 맥 빠질 정도로 쉽게 받아들였다.

이안조차 놀랄 정도로.

“……그냥 내 말을 믿는 거야?”

“어차피 평소 같지 않은 상황이다. 평소처럼 행동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우마딜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바로 전사들을 설득하겠다.”

“지금 바로 가려고?”

화끈한 추진력에 이안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묻고 말았다.

“더 끌수록 안 좋아진다고 네가 그러지 않았나?”

“어. 맞긴 하지.”

“그러면 바로 가겠다.”

우마딜로는 곧바로 집을 나서서 전사들을 불러 모은 뒤, 짧게 말했다.

“비는 안 그친다. 그러니 지금 당장 싸우러 간다.”

“알았다.”

“준비하겠다.”

의문을 표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무장을 마치고 돌아왔다.

우마딜로도 지팡이와 도끼를 챙긴 뒤, 카도에게 향했다.

싸운다는 소식에 카도도 신이나 도끼날을 갈고 있었다.

우마딜로는 카도의 어깨를 굳게 잡으며 말했다.

“아버지.”

“응? 너는 누구냐?”

“아버지는 지금 싸울 상태가 아니다. 육신은 늙고, 뼈는 약해졌다.”

우마딜로의 진지한 말에 카도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내가 늙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내 피가 이렇게 뜨겁게 끓어오르고 있는데! 그리고 나는 결사대다. 싸우지 않으면 결사대원이 아니다.”

카도는 도무지 설득당할 것 같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은 우마딜로가 중얼거렸다.

“아버지. 미안하다.”

“무슨…….”

카도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우마딜로가 부린 자연의 힘이 카도를 깊은 잠에 빠트렸다.

우마딜로는 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이러고 싶지는 않았다.”

“알지. 누가 아버지한테 이러고 싶겠어.”

“위로해줘서 고맙다.”

우마딜로는 기절한 카도를 나무 넝쿨로 꼼꼼히 묶었다.

혹여나 중간에 일어나 따라올 걸 염려한 행동이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일행과 전사들은 공터에 모였다.

억수 같이 쏟아진 비 덕분에 벌써 바닥에는 물이 고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발목까지 물이 차오르려 했다.

대수림에서는 유례없는 일이었다.

진창이 되어가는 바닥을 보며 전사들은 생각했다.

쉽지 않은 전투가 될 것이라고.

하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거나 걱정하는 기색을 보이는 이는 없었다.

이야기책 속에 나오는 숲의 종족들처럼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건 오직 용맹뿐.

그런 동료들을 자랑스럽게 쳐다보던 우마딜로가 지팡이를 바닥에 찍으며 말했다.

“가자.”

숲의 전사들이 은밀하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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