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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67화 (168/222)

167. 대수림(7)

어머니 나무는 대수림의 안쪽 깊은 곳에 있다.

그곳은 숲의 종족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곳이었다.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함부로 발을 들이지 않을 정도로.

우마딜로는 앞장서서 어머니 나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비가 어찌나 거세게 내리는지 물이 발목 아래까지 고이고, 바로 앞만이 간신히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우마딜로는 우뚝 솟은 나무들을 한 번씩 짚고는 능숙하게 길을 찾았다.

우마딜로가 길을 찾으면 전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행렬의 최후미에서 따라가는 건 이안 일행이었다.

일행은 스텔이 신성으로 만든 장벽 덕에 셋은 비교적 쾌적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플로라는 장막을 두드리는 빗방울을 보며 걱정스레 말했다.

“날씨가 이래서 걱정이야.”

“왜? 비에 불꽃이 약해질까 봐?”

실제로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주위 환경에 따라 강점을 보이기도, 무력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환경은 불을 다루는 마법사에게 썩 달갑지 않았다.

플로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 불꽃은 겨우 비 따위에 위력이 줄어들지는 않아. 지금도 내리는 비를 전부 증발시킬 수 있고.”

강한 자신감.

하지만 오만하게 들리지는 않는 이유는 실제로 그녀의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뭐가 걱정인데.”

“시야가 제한되잖아. 결국, 불덩이를 날리려면 내 눈으로 직접 봐야 하는데 지금은 그게 안 되니까. 자칫하다는 아군도 내 불꽃에 휘말릴 거야.”

거세게 내리는 비는 둘째치고, 플로라가 화염 마법을 쓴다면 물이 증발해 주위에 수증기가 퍼져나갈 거다.

자욱한 수증기는 아군과 적군 모두의 시야를 가릴 거다.

그러면 자연스레 피해는 커지게 된다. 특히 상대가 괴수라면 더더욱.

‘플로라의 성격상 자기 마법에 동료가 다치면 엄청나게 동요할 거야. 확실히. 환경이 좋지 않아.’

여러모로 불리한 상황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싸움이 벌어지면 최대한 진형이 붕괴하지 않게 해야 해. 플로라가 마법을 쓰기 편하게.’

이안이 다짐하던 그때.

앞서가던 우마딜로가 걸음을 멈췄다.

“무슨 소리가 들린다.“

”뭐?”

전사들과 이안은 곧장 주위 소리에 집중했다.

쏴아아아.

쏟아져 내라는 폭우는 시야뿐만 아니라, 소리와 냄새마저 지워 버렸다.

이안은 조금 더 집중했다.

빗소리에 지워진 중요한 소리의 끝자락을 잡으려 했다.

쏴아아아. 슈우우우. 쿵. 쿵.

이안이 눈매를 좁혔다.

‘이건…… 물살이 빠르게 흐르는 소리? 그리고 이 쿵쿵거리는 소리는?’

[이안. 지금 보니 이곳의 지대가 다른 곳보다 낮은 것 같지 않아요?]

이네스의 말이 맞았다.

이곳에는 완만하지만 확실하게 경사가 져 있었다.

정보를 통해 이안은 소리의 정체를 알아챘다.

‘설마!’

알아챘을 때는 늦었다.

갑작스럽게 물살이 들이닥쳐 일행의 허리까지 물이 차올랐다.

우마딜로가 외쳤다.

“침착해라! 금방 쓸려나갈 물이다!”

그의 말이 맞았다.

잠깐 차올랐던 물은 이내 흩어져 버릴 거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쿵! 쿵! 쿵!

멀찍이서 들려오던 둔탁한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무언가가 연이어 부딪히는 듯한 소음.

쏟아져 내리는 비 탓에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듣는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무언가 크고 무거운 게 물살을 타고 이쪽을 향해 굴러온다는 걸.

이 쿵쿵거리는 소리는 그것이 나무들과 부딪히며 들리는 소리라는 걸.

무엇이 떨어져 내리는지 유추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마딜로가 다급하게 외쳤다.

“피해라!”

물살을 타고 나무 괴수들이 빠르게 떠밀려 오고 있었다.

전사들이 황급히 산개하려 했다.

하지만 진창이 되어 버린 바닥은 전사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몇몇 전사들은 가까스로 도망쳤고, 어떤 전사들은 기지를 발휘해 넝쿨을 소환. 스스로의 몸을 묶어 하늘로 올라갔다.

하지만 제대로 빠져나오지 못한 전사가 절반이었다.

쿠웅!

나무 괴수의 거체는 휩쓸려온 속도 그대로 전사들을 덮쳤다.

한순간.

순식간에 이안이 지켜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진형이 무너져 버렸다.

파바박!

설상가상으로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변절자들의 공격이었다.

급하게 스텔과 플로라를 양손에 들고 뒤로 물러선 이안은 신음을 흘렸다.

“끄응. 미리 습격할 장소를 정해두고, 대충 화살을 쏘는 건가?”

“이안! 전사들이랑 괴수가 엉켜서 마법을 쓸 수가 없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화살까지 날아드니, 전사들의 피해가 더 커졌다.

이안은 고민했다.

나무 괴수가 저렇게 뭉쳐 있을 때, 플로라의 마법으로 한 번에 불태우는 게 가장 효율적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아군까지 태워 버리고 만다.

플로라에게 그런 일을 시킬 수는 없다.

‘일단 저 화살부터 어떻게 해야 해.’

이대로 가다가는 계속해서 일방적으로 피해를 볼 뿐이다.

이안은 등 뒤에 걸고 있던 태양의 활을 꺼낸 뒤, 곧바로 호크를 소환했다.

호크의 빛이 태양의 활에 빨려 들어가 빛의 화살이 되었다.

‘날아오는 화살들을 보면 놈들도 뭉쳐 있어.’

이안은 화살이 날아오는 방향으로 적들의 위치를 가늠한 뒤, 시위를 놓았다.

굳이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사아아악!

태양의 활에서 뿜어져 나온 섬광이 경로의 나무들을 전부 태워 버리며 곧게 뻗어 나갔다.

한순간 환해졌던 사방에 다시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더는 화살이 날아오지 않았다.

명중했다는 증거였다.

‘좋아.’

다음은 나무 괴수다.

이미 우마딜로가 한 손에는 지팡이를. 한 손에는 도끼를 든 채 용감히 싸우고 있었다.

이안은 우마딜로와 합세해 곧바로 새하얀 검광을 뽑아냈다.

지금은 아끼고 말고 할 거 없이, 전부 쏟아내야 할 때였다.

샤악!

이안은 뭉쳐 있는 괴수들을 향해 수직으로 검을 내리쳤다.

검광으로 단번에 베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첫 번째 괴수의 몸이 반 토막 나고, 두 번째 나무 괴수의 중간 부분을 베던 와중.

검광이 흩어져 버렸다.

“쯧.”

혀를 찬 이안은 괴수의 몸에 박힌 성검을 힘껏 빼냈다.

그런 이안에게 우마딜로가 외쳤다.

“비켜라!”

우마딜로는 도끼를 힘껏 들어 올리더니, 그대로 이안이 만들어놓은 상처에 도끼를 휘둘렀다.

드득!

도끼가 나무 괴수의 단단한 몸에 파고들었다.

하지만 단번에 잘라낼 만큼 강하지는 않았다.

미련 없이 도끼에서 손을 놓은 우마딜로는 양손으로 지팡이를 붙잡은 뒤, 괴수에게 박혀 있는 도끼를 향해 내리쳤다.

꽝!

도끼가 좀 더 파고들었다.

우마딜로는 괴수가 움직이기 전에 지팡이를 수십 번 내리쳤다.

마치 나사를 망치로 내리치는 것처럼.

빠르고 정확한 움직임에 도끼가 점점 괴수의 몸을 파고들고, 마침내 그 거체가 옆으로 꺾였다.

“우오오오!”

기쁨의 함성을 한번 내지른 우마딜로가 이안에게 물었다.

“검에 서린 그 빛. 다시 사용할 수 있겠나?”

“아니. 당장은 힘들어.”

“그런가. 아쉽군.”

여전히 나무 괴수가 하나 살아남아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이랑은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다른 곳에서 날아오는 화살도 없고, 괴수의 숫자도 이제 하나뿐.

혼란에서 벗어난 전사들은 이내 무기를 들고, 나무 괴수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나무 괴수는 크고 강하다.

하지만 속도가 재빠르지는 못했다.

전사들은 날렵하게 움직이며 나무 괴수를 천천히 죽여나갔다.

‘좋아. 이 정도면 알아서 할 수 있겠지.’

이안은 스텔과 플로라에게 말했다.

“우리는 움직이자.”

“뭐? 어디로?”

“아까 화살을 쏜 변절자들. 그놈들도 곧 진열을 재정비해서 공격해 올 거야. 그러기 전에 막아야지.”

“아. 근데 어떻게 움직…… 꺄악!”

이안은 양팔로 스텔과 플로라의 허리를 감은 뒤, 힘껏 뛰어올랐다.

몸이 급격하게 쏠리는 느낌에 플로라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스텔.”

“응.”

의도를 읽은 스텔이 발아래에 장벽을 만들어냈다.

이안은 장벽을 힘껏 밟으며 빠르게 숲을 질주했다.

‘이런 빗속에서 시야랑 청각이 제한되는 건 상대도 마찬가지야. 설마 나무 괴수 둘을 벌써 처리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겠지.’

예상대로였다.

변절자들은 화살을 쏘던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들은 갑작스럽게 뻗어온 섬광에 상당히 큰 타격을 입었다.

이제야 겨우 피해를 수습한 변절자들은 다시 활을 주워들려 하고 있었다.

‘상태를 보니 병이 많이 진행되었어.’

처음 마주쳤을 때만 해도 대부분 온몸이 시커멓기만 할 뿐, 숲의 종족과 외형상 큰 차이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변절자들의 피부는 좀 더 각지게 변했고, 개중에는 몸에 가지가 돋아난 이도 있었다.

멀지 않아 괴수가 될 것이다.

그러기 전에 베어야 한다.

이안은 스텔과 플로라를 적당한 나뭇가지 위에 내려 준 뒤, 바닥을 향해 뛰어내렸다.

탁.

이안이 내려선 곳은 변절자들의 한 가운데다.

처음에 변절자들은 거센 비 탓에 제대로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거센 호우 탓에 무언가가 떨어졌다고만 인식했다.

설마 그게 사람일 거라고는 예상할 수조차 없었다.

그 잠깐의 방심이 불러온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스윽!

이안이 회전하면서 휘두른 검 한 번에 변절자 셋의 목이 떨어졌다.

변절자들의 피부는 단단했지만, 나무 괴수만큼은 아니었다.

베는 데에 있어 검광까지도 필요 없었다.

“누구……!”

곧바로 근처에 있던 변절자가 활을 놓고 품에서 손도끼를 꺼냈다.

이안의 검이 번쩍였다.

변절자가 대응하려 했다.

하지만 어느새 변절자의 목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압도적인 차이.

“흩어져라!”

근접전으로는 맞설 수 없다고 여긴 남은 변절자들은 사방으로 산개했다.

옳은 판단이었다.

하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변절자들이 땅을 짚어 검은 넝쿨을 소환했지만, 이안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빠르게 땅을 박찬 그대로 변절자 하나를 추격해 벤 뒤, 품에서 단검을 두 개를 꺼내 망설임 없이 던졌다.

파박!

반대 방향으로 날아간 단검이 정확히 적들의 급소를 꿰뚫었다.

결국, 마지막으로 남은 건 우두머리로 보이는 변절자 하나였다.

무기를 꺼낸 변절자는 이미 늦었다는 생각에 팔을 축 늘어뜨렸다.

이안을 향하는 그의 눈동자는 심상치 않은 분노를 담고 있었다.

“저주스러운 놈들. 기어코 이곳까지 왔구나.”

“뭐?”

“그 더러운 발로, 어머니 나무를 밟게 하지는 않겠다.”

비장하게 말한 변절자의 몸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우득.

피부는 딱딱해지고, 곳곳에서는 가지가 뻗어 나왔다.

그에 공명하듯, 이안이 베었던 변절자들의 몸도 비슷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괴수화가 진행되고 있어요!]

‘마음대로 조절이 가능했던 건가!’

서둘러 검을 휘두르려던 이안은 생각을 바꿨다.

시간 여유가 없었다.

“플로라―!”

이안이 쩌렁쩌렁하게 고함을 내질렀다.

거인의 외침에 저쪽에서도 답이 들려왔다.

“왜!”

“이쪽을 향해 마법을 던져―!”

이안은 손위에 호크를 소환해 흔들어댔다.

밝은 빛이 사방의 빗방울에 산란해, 아름다운 무지개가 만들어졌다.

“얼마나 세게!”

다시 들려온 대답에 이안이 외쳤다.

“적당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좋아. 이 정도면 알아들었겠지. 그러니 불덩이가 날아오기 전에 저도 자리를…….”

이안은 말을 멈췄다.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열기와 함께 주위에 내리던 빗방울이 증발해 버렸다.

이안은 뒤를 돌아보았다.

불덩이가 이안을 향해 정확히 날아오고 있었다.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이안은 그 시퍼런 불덩이를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플로라. 그 새 또 성장했구나…….”

좋아해야 할 일이었지만, 지금은 썩 기쁘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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