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 대수림(8)
“죽는 줄 알았네.”
이안은 불타 버린 잔해들 옆에서 한숨을 토해냈다.
불덩이가 날아온 순간에 이안은 온 힘을 다해 몸을 날렸다.
덕분에 직격은 피했지만, 플로라의 불꽃을 모두 회피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정도의 불꽃은 이안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오히려 활력을 불어 넣어줬다.
용의 가호 덕분이었다.
이안은 피로가 씻은 듯이 사라진 기분에 주먹을 쥐락펴락했다.
‘용의 가호. 회복 효과가 생각보다 뛰어나네요.’
게다가 피로가 씻겨나가면서 덩달아 정신도 조금 편안해졌다.
잇따른 검광과 호크의 사용으로 탈력감마저 느끼던 참이다.
[정신과 육체는 상호 영향을 받는 법이니까요. 육체의 피로가 사라지면, 당연히 정신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겠죠.]
이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의 가호.
역시나 유용한 능력이다.
만족감을 느끼며 이안이 플로라와 스텔을 나뭇가지에서 내려주는 사이.
폭음을 듣고 우마딜로와 전사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괴수화가 되기 전에 불타 버린 시체들을 보며 놀라워했다.
“나무 괴수가 이만큼이나…… 너희들끼리 다 처리했군.”
“괴수로 변신하기 전에 다 불태워서 어렵지는 않았어.”
“그런가. 이걸로 변절자들은 거의 다 전사했을 거다. 이제 어머니 나무에 향하면 된다.”
“그래. 그건 다행이네.”
“다행…… 이다.”
말을 흐린 우마딜로는 죽은 변절자들에게 다가갔다.
주위를 유심히 살피던 그는 곧 손을 뻗어, 무언가를 주워들었다.
씨앗이었다.
그는 씨앗을 챙긴 뒤, 전사들에게 말했다.
“그래도 한때 우리의 가족들이었다. 비록, 잘못된 길을 선택했으나, 마지막은 함께 묻어줬으면 좋겠다.”
“그래.”
“이들도 우리가 죽었을 때, 그렇게 했을 거다.”
우마딜로의 의견에 동의한 전사들은 이내 주위를 뒤져 씨앗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우마딜로는 이안에게 다가와 말했다.
“너희들이 죽으면 무덤을 남기듯, 우리는 죽으면 씨앗을 남긴다. 그 씨앗을 어머니 나무 옆에 심어, 숲의 일부분으로서 또 다른 삶을 시작하는 거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다.”
나무와 닮은 숲의 종족은 죽어서는 진짜 나무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런 어머니 나무의 주위는 거대한 공동묘지와 다름없다.
‘그래서 나바혼도 씨앗을 대수림에 전해달라 한 거구나.’
몰랐던 지식이 또 하나 늘었다.
이안은 숲의 종족에 조금이나마 더 이해하게 되었다.
“모두 모았다. 이제 다시 가자.”
“그래.”
우마딜로 빗속을 헤치며 다시 앞장서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싸움은 없을 거로 생각했는지, 별 경계를 하지 않는 모습이다.
이안이 그 옆에 같이 걸었다.
“그 어머니 나무에게 가면 다 해결될 거라고 생각해?”
“어머니 나무는 너희들의 제국이 세워지기도 전부터 살아오셨다. 그분보다 지혜로운 존재는 없어. 반드시 우리에게 답을 알려주실 거다.”
“어쩌면 그 어머니 나무에게 뭔가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는 거잖아. 변절자들도 너희들이 그곳으로 가는 걸 막았고.”
“…….”
우마딜로가 자리에 우뚝 멈췄다.
그리고 스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얘기는 하지 마라. 아무리 너라도 참을 수 없다.”
“…….”
교단에서 숭배하는 신이 인간들에게 정신적 지주이듯.
숲의 종족에게는 어머니 나무가 마음속 버팀목이다.
이안은 우마딜로를 설득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직접 보면 충격이 크겠는데. 어쩔 수 없지.’
둘은 그 뒤로 어색한 침묵 속에서 걸음만 옮겼다.
머지않아 숲의 분위기가 변했다.
좀 더 정적이고, 가라앉은 공기.
주위 나무의 종류도 달라졌다.
그리 키가 크지는 않지만 올곧게 자라 있는 나무들.
우마딜로와 전사들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우리들의 선조들이다. 예를 표해라.”
“아. 응.”
숲의 종족이 죽어서 남기는 씨앗.
그 씨앗이 자라난 게 바로 이 나무들이었다.
파스스스.
일행이 지나가자 나무들의 가지가 일제히 흔들리며 주위에 나뭇잎이 흩날렸다.
마치 이들의 방문을 환영하기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뭇잎을 쳐내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말에, 일행은 쏟아지는 나뭇잎을 맞으며 묵묵히 길을 따라 걸었다.
하지만 좀 더 깊숙이 들어가자,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더는 나뭇가지들이 움직이지 않았다.
떨어지는 나뭇잎도 없었다.
환영도 없었다.
도리어 음산한 분위기마저 풍겨왔다.
그런 반응을 가장 먼저 눈치챈 건, 숲의 분위기에 민감한 전사들이었다.
전사 몇이 우마딜로에게 다가와 말했다.
“분위기가 이상하다.”
“우리를 환영하지 않는다.”
“다시 돌아가야 하지 않나?”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이곳의 나무들은 곧 그들의 가족.
가족의 방문을 환영하지 않는다니,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다.
‘어쩌면. 경고하는 걸 수도. 이 앞으로 가지 말라고.’
우마딜로는 작게 혀를 찼다.
이안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아갈 수도 없다.’
한시라도 빨리 이 폭우를 멈추지 않는다면, 이 드넓은 대수림도 끝이다.
그들에게는 물러설 곳이 없는 것이다.
“이대로 간다. 어머니 나무를 만나야만 한다.”
우마딜로의 말에 전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언제나 족장을 존중하고, 족장의 결단에 순응했다.
그런 신뢰가 우마딜로의 어깨를 더 무겁게 했지만…….
우마딜로는 다시 앞장섰다.
이 앞에 뭐가 기다리고 있든.
가장 먼저 마주해야 할 건 족장인 그의 역할이다.
그런 우마딜로의 옆에 이안이 함께 걸었다.
이안의 손에는 이미 성검이 뽑혀 있었다.
이제 전투를 준비하기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다.
어머니 나무의 앞에서는 무례한 모습이었지만 어쩐지 우마딜로는 그를 말릴 수 없었다.
그렇게 걷기를 한참.
어느 순간부터 나무들이 더는 보이지 않았다.
대수림에서 벗어난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넓은 공간이 드러났다.
하지만 나무들이 더는 보이지 않는 건 숲이 끝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안과 스텔. 플로라와 우마딜로. 누가 먼저랄 새도 없이 고개를 들어 눈앞에 드러난 것을 올려다보았다.
“…….”
거대한.
지금껏 봐왔던 거목들보다 더 거대한 나무가 그곳에 있었다.
거대한 탑처럼 서 있는 두꺼운 나무줄기.
그리고 그 줄기 중간중간 뻗어 나온 건 나뭇가지가 아닌, 또 다른 나무들이었다.
‘말도 안 되게 크잖아.’
주위가 텅 비어 있는 건, 이 거대한 나무가 너무나 많은 양분을 가져가기 때문일 거다.
“아아.”
전사들은 어머니 나무를 보며 황송한 듯,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우마딜로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주춤 뒤로 물러났다.
누구보다 예민한 그는 어머니 나무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감지해냈다.
“이게 대체 무슨…….”
“무기 뽑아.”
이안은 그렇게 말하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파스스스.
어머니 나무가 세차게 떨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나무의 떨림은 지면까지 진동시켰다.
온 숲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런 진동을 못 이긴 것일까?
어머니 나무의 줄기에 붙어 있던 나무들이 하나둘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쿵!
떨어진 나무들은 갑자기 괴수 화해서 달려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전사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안 돼!”
“위대한 전사들이!”
우마딜로가 떨리는 목소리로 설명했다.
“어머니 나무와 함께하는 나무들은 뛰어난 업적을 세운 전사들의 것이다.”
“뛰어난 업적?”
“악마를 토벌한 이들. 그런 위업을 이룬 전사만이 어머니 나무와 함께하는 명예를 누릴 수 있다.”
즉, 지금 떨어지는 나무들은 한때 이름을 날리던 영웅들이었다는 거다.
그리고 이 중에는…….
[제 동료인 아타바도 있겠군요. 예전에 그에게 들은 적이 있어요. 언젠가 세상이 정말로 위기에 빠지면. 옛 전사들이 힘을 보태줄 거라고. 자기도 그들과 같이 되고 싶은 게 꿈이라고.]
‘지금 이게 그거라는 건가요?’
[아마도요.]
드드득.
바닥에 떨어진 나무들이 돌연히 수축하기 시작했다.
다 자란 나무였던 게 점점 줄어들고, 연약하고 푸른 줄기가 되더니, 이내 씨앗의 형태로 변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씨앗에서는 자그마한 실들이 뻗어 나왔다.
무수히 뻗어 나온 실들은 서로 엉키고 얽히며 점점 형상을 갖춰나갔다.
이내 씨앗은 인간 형상으로 변했다.
[…… 되살아났어요.]
숲의 종족은 죽어서 씨앗이 되고, 그 씨앗은 싹을 틔워 나무가 된다.
하지만 눈앞의 광경은 그걸 정확히 거꾸로 재현해냈다.
죽었던 이들이 부활하고 있었다.
그건 떨어진 다른 나무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무들은 제각각 생전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하나 같이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는 전사들이다. 살아생전의 전성기에 얼마나 강했는지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하지만 되살아난 저들에게서는 살아 있는 생물 특유의 생동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굳이 비유하면 살아 있는 시체와 같은 느낌을 보였다.
그중에서 그나마 ‘인간다움’이 느껴지는 전사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지, 지, 지금이라도 돌아가라.”
오랜만에 말하는 게 익숙지 않은 듯. 몇 번 더듬거리던 그는 이내 능숙하게 말했다.
다른 영웅들보다도 더 강한 기세.
그 전사의 얼굴을 알아본 이네스가 외쳤다.
[아타바……!]
‘이네스 님의 동료였던 그 아타바를 말하는 거예요?’
[네. 그가 맞아요.]
되살아난 아타바가 다시 말했다.
“돌아가라. 그럼 살려주겠다.”
이견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 듯한 굳은 목소리.
우마딜로와 전사들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던 그때.
이안이 침묵을 깼다.
“그러면 당장 이 비부터 멈춰.”
아타바와 다른 영웅들의 시선이 일제히 돌아갔다.
이안은 여유롭게 시선을 받아내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 비. 너희들이 어머니 나무라 부르는 저 거대한 나무가 부르고 있는 거잖아?”
아타바는 눈을 가늘게 떴다.
“누구냐. 너한테서 익숙한 냄새가 느껴진다.”
“이네스 님의 제자다.”
이안은 곧바로 밝혔다.
상대방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흔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 이안의 노림수는 적중했다.
“이네스…… 그 이름을 다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지금 이네스 님도 함께 있다. 너한테 안부 전해달라더군.”
“이네스가 지금? 말도 안 돼.”
아타바의 눈동자가 여러 감정으로 요동쳤다.
기쁨, 동요, 혼란, 긴장, 그리고 수치심.
설마 이런 상황을 마주할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치 못한 듯했다.
“죽어서도 다시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 했는데…….”
그런 아타바에게 다른 영웅들이 다가왔다.
“아타바. 강력한 상대다.”
“혼자서는 위험하다.”
“다 같이 싸워야 한다.”
아타바는 갈등하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저자랑은 나 혼자 싸운다.”
“우리 중에서 죽은 지 얼마 안 된 네 상태가 가장 좋다. 네가 죽으면 전력 손실이 크다.”
“나중에 문책해도 좋다. 하지만 이건 내 싸움이다. 끼어들지 마라. 나와 싸우고 싶지 않다면.”
결연한 의지.
다른 영웅들은 그런 아타바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아직 하찮은 감정을 지니고 있군.”
“마음대로 하라. 처분은 어머니 나무의 몫이니.”
영웅들은 시선을 돌려 우마딜로와 전사들을 쳐다봤다.
강렬한 기세가 영웅들에게서 뿜어져 나왔지만 도망친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우마딜로도. 전사들도 잘 알았다.
지금 전력으로 저 영웅들과 싸워봤자 승산이 그리 높지 않다는 걸.
우마딜로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전사가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이안만큼의. 아니. 나와 비슷한 전사가 하나라도 더 있었더라면 승리를 기대해 만한 할 텐데…….’
하지만 그래도 싸워야 한다.
설령 패배할 걸 알아도.
무기를 굳게 쥔 우마딜로가 개전을 선포하려던 그 순간.
뒤쪽에서 누군가 다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나 증원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던 전사들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우마딜로는 입을 쩌억 벌렸다.
그곳에 있는 건 예상외의 인물이었다.
“허억. 허억. 내가 왔다. 전사, 카도가 악마를 베기 위해 왔다. 허억.”
금방이라도 숨넘어갈 것 같은 카도가 그곳에 도끼를 들고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