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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69화 (170/222)

169. 대수림(9)

어머니 나무.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살아온 대수림의 정신적 지주이자 말 그대로 어머니 같은 존재.

숲의 종족이라면 누구나 죽어서 그녀의 곁에 머물고 싶어 한다.

그건 젊은 전사였던 아타바도 마찬가지.

하지만 죽어서 그녀의 곁에 머무는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건, 오직 위업을 세운 영웅들뿐이다.

재능있는 전사였던 아타바는 언젠가 찾아올 기회를 위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단련에 매진했다.

그는 내심 자신이 있었다.

자기보다 강한 전사는 숲 안에도. 밖에도 없으리라고.

설령 있다 해도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고.

어느 날.

이네스와 그녀의 동료들이 대수림을 방문했을 때.

아타바는 커다란 충격을 느꼈다.

이네스의 힘은 아타바가 지금껏 봐오고, 상상해오던 경지 그 너머에 닿아 있었다.

불가사의할 정도의 강한 이네스의 모습에 아타바는 호승심을 불태웠다.

이네스를 따라잡기 위해 그녀의 작은 행동하나 하나까지 관찰하고 분석했다.

덕분에 아타바는 깨달았다.

이네스의 그 압도적인 강함은 비단 육체적 재능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단단함도 있기에 성립한다는 걸.

이네스 만큼의 강함을 얻기 위해서는, 정신의 강함을 얻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아타바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이네스를 흉내 냈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을 좋아해 보려 했고, 싫어하는 것들을 같이 싫어해 보려 했다.

사실, 이전까지의 아타바는 대륙을 구해낸다느니 인간들이 죽어 나가는 일이니 따위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는 그저 강해지고 싶었고, 죽음 이후의 영광을 누리고 싶었다.

하지만 아타바는 변했다.

이네스의 고결한 모습에 감화되고, 그녀를 흉내 내다 보니 점점 그녀처럼 변해갔다.

아타바는 그런 변화를 성장의 증거라 여기고 기껍게 받아들였다.

어느새 이네스는 그에게 단순한 동료를 넘어, 스승으로까지 여겨졌다.

하지만 결사대의 최후는 최악의 방식으로 찾아왔다.

이네스는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영영.

아타바는 숲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여러 고민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죽은 아타바는 어머니 나무와 함께할 영광을 얻었다.

앞으로 영원히 함께하게 될 어머니 나무와 전대 영웅들은 그런 아타바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서오렴. 나의 아이야. 바깥세상에서의 나들이는 즐거웠니?”

“환영한다. 아타바.”

“앞으로 잘 부탁한다.”

꿈에도 그리는 광경이지만 아타바의 가슴은 뛰지 않았다.

그런 무덤덤함을 꿰뚫어 본 어머니 나무가 말했다.

“이런. 별로 기쁘지 않은가 보구나.”

“그게 아니라…….”

“바깥에 미련을 두고 왔니? 말해보렴. 너의 미련은 뭐니.”

아타바는 한참을 말을 잃고 서 있었다.

지혜롭고 너그러운 어머니 나무는 그런 아타바를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긴 고민 끝에 아타바는 답을 내놓았다.

“동경하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모든 걸 바쳐서 지키려던 걸, 지키고 싶습니다.”

“그게 무엇이니?”

“이 세상.”

“대륙을 지켜내고 싶다는 거구나.”

어머니 나무는 인자하게 미소지었다.

“좋아. 한번 해보자꾸나.”

“하지만 어머니. 우리가 바깥에 관여할 방법은…….”

“막내가 부탁하는데, 도와줘야 하지 않겠니? 그리고 난 너무 오랜 시간 동안 같은 방식으로 살아왔단다. 이제는 변할 때도 된 거야.”

그 후.

그들은 어떻게 대륙을 지켜낼지에 대해 고민했다.

언젠가 악마가 돌아오고, 대륙에 다시 혼란이 찾아오는 걸 막아야 했다.

“악마는 부정한 감정으로 만들어진단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한, 부정한 감정은 절대 사라지지 않겠지.”

그래서 어머니 나무는 한 가지 비책을 꺼냈다.

본인이 가진 힘을 이용해 부정한 감정을 흡수한 뒤, 정화하는 계획이다.

다른 영웅들은 반대했다.

너무 위험한 일이라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하지만 어머니 나무는 강행했다.

그녀는 부정한 감정을 정화해 조금이라도 악마의 도래를 늦추는 작업을 시작했다.

인간들. 심지어 숲의 종족마저 알지 못했던 그 비밀스럽고 숭고한 작업은 200년이나 계속되었다.

그리고 200년은 긴 시간이었다.

모든 걸 변하게 만들 정도로.

***

“아버지!”

카도의 등장에 우마딜로는 경악했다.

분명 기절시킨 것도 모자라 팔다리까지 꼼꼼히 묶어놨었다.

거기서 어떻게 빠져나오고, 어떻게 이곳까지 길을 찾았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카도는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을 오해 한 것인지, 정중하게 사과했다.

“늦어서 미안하다. 어떤 비겁한 놈이 내 팔다리를 묶어놨었다. 푸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아니, 그걸 대체 어떻게…….”

카도의 등장에 영웅들도 웅성거렸다.

“그 카도라고?”

“얼마 전에 족장이 된 젊은이 아닌가. 엄청난 실력을 가진.”

“벌써 저렇게 늙었다니.”

어머니 나무와 함께하는 그들의 시간 감각은 바깥사람들과는 차이가 있다.

그들은 전성기 시절의 카도를 떠올렸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한때 대단했다고는 하나 이제는 나약한 늙은이.”

“방해하면 죽이면 될 뿐이다.”

상황이 변했다.

우마딜로가 입술을 깨물었다.

죽음을 각오했던 그였지만, 아버지인 카도가 위험을 처하는 건 원치 않았다.

‘어떻게든 내가 해내야 한다.’

그런 마음과 비슷하게, 이안도 사태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었다.

‘자칫하면 이거 속절없이 밀리겠는데.’

플로라와 스텔은 저 멀리 뒤쪽에 두었지만, 언제 영웅들이 전사들을 제치고 후방을 공격할지 모르는 일이다.

그런 일이 없게 하려면 이쪽에서 뚫고 나가야 한다.

[하지만 조심해야 해요. 아타바는 강해요. 빈말이 아니에요.]

‘예. 척 봐도 그래 보여요.’

아타바는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강한 압박감이 뿜어젼 나왔다.

초인 특유의 기세였다.

이안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을 느끼며, 검을 쥐었다.

“그나저나 굳이 나랑 1대1로 싸워준다니. 일종의 명예 같은 건가?”

아타바도 마주 자세를 잡으며 말했다.

“정말로 네가 이네스의 제자라고 말할 자격이 있는지, 시험해볼 뿐이다.”

“자격? 무슨 자격씩이나…….”

“자격이 없으면 죽을 거다. 간다.”

투웅.

아타바가 왼손의 지팡이로 땅을 내리쳤다.

분명 가벼운 손놀림이었다.

하지만 퍼져나가는 소리의 울림은 묘하게 귓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콰드드드득!

땅에서 돋아난 넝쿨이 이안과 아타바의 주위에 돋아났다.

검광이 없다면 그냥 벨 수 없을 정도로 억센 넝쿨이었다.

넝쿨은 커다란 반구형으로 둘을 감싸, 외부와 격리했다.

이안과 아타바.

둘을 위한 싸움장이 완성되었다.

‘이 넝쿨…… 우마딜로나 다른 전사와 비교해도 엄청난 힘이 느껴져.’

이안은 주위를 감싼 넝쿨을 보며 생각했다.

과연 이네스와 함께 악마를 토벌한 영웅.

실력 하나는 확실했다.

‘어쨌건 길게 끌면 안 되겠어요. 바깥이 신경 쓰여요. 플로라와 스텔이라면 알아서 잘하겠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요. 아타바에 대해서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잠깐 고민하던 이네스가 답했다.

[아타바는 양손 무기의 달인이에요. 왼손의 지팡이와 오른손의 도끼를 이용해 놀라울 정도로 유연하게 싸우죠. 조심하세요. 이안이 지금껏 싸워왔던 이들과 느낌이 전혀 다를 거예요.]

‘양손의 달인이라. 명심할게요.’

이안은 잡상을 털어내고 슬슬 집중 상태에 들어갔다.

이안과 아타바는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어떤 전조도 없이.

둘은 서로를 향해 쇄도했다.

카가가각!

먼저 이안을 맞이한 건 길이가 상대적으로 더 긴 지팡이였다.

검과 지팡이가 부딪쳤고, 묵직한 힘이 이안의 손목에 전해졌다.

‘힘이 제법…….’

아타바가 지팡이를 안쪽으로 기울였다. 지팡이의 표면이 생각보다 매끄러운지, 성검이 지팡이를 타고 빠르게 미끄러졌다.

“……!”

순식간에 성검이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동시에 이안의 상체도 같이 쏠렸다.

그런 이안을 기다리는 건 시퍼렇게 빛나는 손도끼.

이대로면 도끼날이 정확히 이안의 미간에 박힐 터였다.

‘쯧.’

놀라울 정도로 정교한 계산과 공격에 혀를 찬 이안이 한쪽 손을 검에서 놓았다.

그러고는 손바닥 그대로 도끼의 옆 날을 후려쳤다.

깡!

도끼날의 궤적이 틀어져, 이안의 어깨 바로 위 허공을 아슬아슬하게 베었다.

이안의 계산대로였다.

이번에 놀란 쪽은 아타바였다.

미간을 좁힌 아타바는 손목을 꺾어 지팡이를 유연하게 돌려 성검을 떼어낸 뒤, 그대로 이안의 급소를 노리고 파고들었다.

이안은 그 자연스러운 연계를 보며 단박에 깨달았다.

‘이대로 막으면 바로 손도끼로 공격해오겠지. 그러면 천천히 놈의 페이스대로 휘말리다가, 끝이야.’

지팡이와 손도끼.

두 가지 무기의 완벽한 연계.

마치, 손발이 잘 맞는 고수 둘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떻게 하지? 곧바로 검광을 쓸까? 아니야.’

아까 전. 용의 가호 덕에 검광을 조금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섣불리 썼다가는 아타바가 그대로 피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어떻게든 흐름을 가져와야 해.’

두 무기의 연계 탓에 이안이 먼저 공격할 타이밍이 생기지 않았다.

아타바는 언제나 이안보다 반 박자 빨랐고,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가려 해도 절대 그 주도권을 내주지 않았다.

심지어 무기를 맞대는 와중, 간간이 자연의 힘을 이용해 견제까지 해왔다.

그 대부분은 용의 가호에 가로막혔지만, 혀를 내두를 정도의 노련함이었다.

달인.

이네스가 말한 그 단어가 떠올랐다.

아타바는 이런 싸움 방식을 거듭 갈고닦아, 결국 악마까지 토벌해낸 것이다.

그의 일격 하나하나에서 가늠할 수 없는 노력과

‘즉, 이런 싸움은 아타바의 전문 분야라는 거야. 그렇다면 방법은…… 상대가 생소한 분야에서 싸우는 거지.’

탕!

이안이 순간적으로 바닥을 박차 뒤로 물러났다.

아타바가 실망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벌써 포기인가?”

“아니. 전술을 바꾸려고.”

“……?”

이안은 품에서 활공하는 단검을 꺼내 왼손에 쥐고, 오른손에는 성검을 들었다.

그리고 아타바의 그것처럼 자세를 바꾸었다.

“너 설마…….”

“쌍검을 쓰는 사람은 드무니까, 너도 안 익숙할 것 같아서.”

“건방지군.”

터무니없는 시도였다.

양손에 각각 무기를 들고 싸우는 건 생각보다도 더 어렵고, 정교한 감각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선호 받지 않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

이안은 지금 그걸, 눈으로 본 것만으로 따라 하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이는 상대에 대한 모욕이나 무시로 느껴질 법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아타바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내가 아는 이네스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진짜 그 제자라면…….’

막연한 기대감이 머릿속을 관통했다.

시험해보고 싶어 온몸이 근질거렸다.

저게 허세일지, 아니면 진짜로 가능할지.

“다시 가겠다.”

아타바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이제껏 해왔던 대로, 지팡이를 내질러 흐름을 가져오려 했다.

탕!

막혔다.

성검이 지팡이의 중간을 쳐냈다.

아타바는 곧바로 손도끼를 내질렀다.

캉!

이번에도 막혔다.

정확한 궤적으로 뻗어온 단검이 손도끼를 쳐냈다.

아타바의 눈동자가 커졌다.

‘설마. 설마, 진짜로…….’

그 뒤로 수십 합의 공방이 짧은 시간 안에 이뤄졌다.

처음에는 다소 어색하던 이안이었다.

하지만 싸움이 길어질수록, 점점 능숙해졌고.

이내 아타바의 공격법을 점점 완벽하게 재현해내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재능.

하지만 아타바는 납득할 수 있었다.

‘그 이네스의 제자라면 이 정도는…….’

그렇기에 시험해보고 싶었다.

과연 이안이 어디까지 해낼 수 있을지. 어디까지 자기 기술을 흉내낼 수 있을지.

아타바는 점점 복잡하고, 어려운. 그가 수십 년간 쌓아온 노하우가 집적된 비전 기술들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쉬운 것부터 어려운 기술로.

점진적으로 난이도를 올려.

이것도 따라 할 수 있는지 보듯.

마치 이안을 가르치듯.

그렇게 둘은 다른 모든 걸 잊고, 둘만의 공간 속에서 무기와 기술을 나누었다.

무기를 맞댄 이안에게서 아타바는 이네스를 보았다.

아타바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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