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대수림(10)
자기 기술을 점점 완벽하게 흉내 내는 이안의 모습에서 아타바는 이네스의 모습을 겹쳐보았다.
그가 동경했고, 우러러보았고, 끝끝내 닿지 못했던 그 사람을.
조금 분했다.
자기가 긴 세월 갈고닦아온 기술을 상대가 너무나 쉽게 가져간다는 것에.
그리고 저 자리에 자신은 절대 서지 못한다는 것에.
한편으로는 무기를 나누는 지금 이 순간이 즐거웠다.
이네스를 수백 년 만에 다시 만난 것 같은 기쁨이었다.
하지만 행복한 시간은 오래 가지 않는다.
이안의 역량이 아타바의 것을 완전히 따라잡는 시점이 오고 말았다.
이안은 마주 댄 성검을 기울였다.
갑작스러운 각도 조절에 아타바의 중심이 안쪽으로 빨려들었다.
아주 미세한 빈틈이었지만 이안에게는 충분했다.
이안이 왼손의 단검을 그대로 내뻗었다.
‘여기서 검광을 사용해 끝장낸다.’
단검에 새하얀 검광이 덧씌워졌다.
아타바는 감탄했다.
지금 이안이 하는 건 자기가 처음 시도한 방법이 아니던가.
이제는 그걸 더 정교하게, 치명적인 시점에 시도해 성공시켜 버렸다.
피할 방법은 없다.
완벽히 당해 버렸다.
하지만 포기하는 건 전사가 아니다.
아타바의 도끼에 검광이 서렸다.
남아 있는 힘 한 방울까지 쥐어짜 내 피워낸 검광.
검광과 검광이 맞부딪혔다.
사악!
잘렸다.
아타바의 검광은 이안의 검광에 너무나 쉽게 잘려나갔다.
그걸로도 모자라 이안의 검광은 그대로 아타바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강철처럼 단단한 아타바의 피부는 부드럽게 갈라졌다.
아타바의 몸이 그대로 허물어졌다.
이안은 가쁜 숨을 내쉬었다.
‘후우. 죽는 줄 알았어요. 역시 대단하네요. 하지만…… 조금 찝찝하기도 하네요.’
이안은 아타바를 내려다보았다.
혼자 사색에 잠긴 아타바의 표정에서는 진한 만족감이 느껴졌다.
표정만 보면 누가 이겼는지 분간이 안 갈 정도였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으면 저도 위험했을 거예요.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조금씩 자기 실력을 드러냈어요. 마치 자기를 따라올 수 있냐는 듯이.’
목숨을 건 결투가 아닌, 지도 대련을 받은 듯한 느낌이었다.
실제로 이안은 이번 싸움에서 많은 걸 배웠고.
옛 동료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이네스가 말했다.
[…….아타바는 예전부터 싸움을 진심으로 즐기는 전사였어요. 강한 전사를 좋아하고, 강자와 겨루는 데에서 기쁨을 느꼈죠. 승패는 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어요.]
‘그렇군요.’
[그것보다 아타바의 마지막 말을 들어주세요.]
‘아.’
아타바는 이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안이 눈치채자 아타바가 입을 열었다.
“이네스의 제자. 이름은?”
“이안.”
“이안. 이안. 이안. 강한 힘이 느껴지는 좋은 이름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전사와 싸울 수 있어, 영광이었다.”
입속에서 이안의 이름을 여러 번 굴리던 아타바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태평한 모습에 이안은 황당해했다.
“담담하네. 아, 어차피 너희는 씨앗을 남겨서 다시 나무가 돼서 그런가?”
숲의 종족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무가 되어, 대수림의 일부분으로 영원을 살아가게 되니.
하지만 아타바는 부정했다.
“그런 건 없다. 나에게 다음은 없다.”
“뭐?”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생명은 죽음으로 흐르는 게 순리다. 나는 이미 자연의 법칙을 거슬렀다. 법칙을 거스르면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다.”
“그렇다면.”
“끝이다. 영원한 안식이 찾아오는 거다.”
그렇게 말하는 아타바는 지극히 평온했다.
마치 타인의 이야기를 설명하는 듯한 냉정함이었다.
아타바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어머니 나무께 사과하고 싶었는데. 동료들. 이네스에게도…….”
“야. 잠시만.”
이안이 급하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아타바는 더는 입 열지 않았다.
이네스가 중얼거렸다.
[…….안식에 들었군요.]
‘괜찮으세요?’
[예.]
이네스는 조금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보세요. 엄청 만족한 표정이잖아요.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이.]
‘…….얄미울 정도로 행복해 보이기는 하네요.’
이안은 성검을 들어 주위를 감싼 넝쿨을 베어냈다.
아타바를 이겨냈지만, 아직 다른 영웅들. 무엇보다 어머니 나무가 남았다.
이 사태를 막아내려면 저 거대하고 오래된 어머니 나무를 베어야 한다.
넝쿨 속에 격리되어 있던 이안이 나오자 주위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이긴 건가!”
우마딜로는 눈에 띄게 안심했다.
반면, 영웅들은 혀를 찼다.
“쯧. 쓸데없는 고집이 스스로를 죽였군.”
“아타바를 1 대 1로 이겼다. 어쩌면 우리 생각보다 더 강할 수도 있다.”
“그래도 아타바를 상대하느라 체력이 많이 떨어졌을 거다. 우리가 함께 덤빈다면 이길 수 있다.”
이안도 주위 상황을 살폈다.
우선 전사들은 반 이하로 줄었다.
죽거나 부상 당한 전사들이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반면, 영웅들의 숫자는 그대로였다.
‘스텔의 기적이 있었는데도 이렇게 처참한 결과라니.’
뒤엉켜 싸우는 난전에서 플로라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스텔이 신성으로 마음껏 지원할 수 있도록, 주위에 화염의 장벽을 쳐 그녀를 보호하는 것뿐.
그나마 선전하고 있는 건 우마딜로였다.
우마딜로는 영웅 둘을 상대로 호각의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우마딜로의 모습은 어딘가 초조해 보였다.
왜 그런가 했더니…… 전장의 한 구석에 카도가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죽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이를 생각하면 치명적인 일격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우마딜로는 어서 싸움을 끝내고, 카도를 치료하고 싶은 듯했다.
이안은 혀를 찼다.
‘개판이잖아 이거.’
아무래도 아타바와의 싸움에 열중해, 시간을 생각보다 더 끌어 버리고 만 것 같다.
하지만……. 위기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질 것 같지는 않아.’
아타바는 강했다.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도 전신이 떨릴 정도로.
하지만 다른 영웅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들은 너무 오래 죽었다가 살아났다.
전성기 기량을 펼치지 못하는 게 눈에 보였다.
그렇기에 이안은 도무지 질 것 같지 않았다.
조금 더 강해진 지금이라면.
이안은 앞으로 걸어나가며 도발했다.
“여럿이서 한꺼번에 덤벼.”
“건방지군.”
“간다.”
영웅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공격 방식은 아타바의 것과 익숙했다.
애초에 아타바가 사용하던 전투술은 숲의 종족 사이에서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던 것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안은 쇄도해오는 적들을 보며 빠르게 반격했다.
아타바에게 했던 것처럼.
사악!
다가오던 영웅의 목이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영웅들은 경악했다.
이안을 저지하기 위해 서둘러 무기를 내질렀다.
‘뻔히 보인다.’
이미 아타바의 기술을 모두 습득했던 터라 그들의 움직임이 너무나 쉽게 읽혔다.
이미 예상한 공격을 대응하는 건 간단한 일이다.
이안은 빠르게 영웅들을 베어 나갔다.
그가 나머지 영웅들을 모두 정리하는 데에 걸린 시간은…… 아타바와 겨루던 시간보다 더 짧았다.
***
“이대로 죽을 수 없다. 어머니를 지켜야…… 컥.”
마지막 영웅의 목이 떨어졌다.
먼 과거. 대륙을 구해냈을 영웅들의 최후는 비참했다.
‘어째 영웅들의 끝이 다 안 좋은 것 같네요.’
[시간의 저주는 누구에게나 공평한 법이에요. 너무 오래 지상에 머무는 사람들은…… 대개 처음의 순수함을 잃고 타락하기 마련이에요. 그렇기에 사람은 떠나야 할 때를 알아야 하는 거겠죠.]
이네스가 씁쓸하게 말했다.
그녀의 생각이 가리키는 대상에는 지금껏 이안이 마주쳤던 다른 이들은 물론, 이네스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 역시 성검에 갇혀 수백 년의 시간을 보냈으니.
‘시간의 저주라…….’
아무리 맑은 물이라도 오래 고이다 보면 반드시 썩는다.
그 진리는,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버텨온 저 지혜롭고 신비로운 나무도 비켜나가지 못했다.
이안은 어머니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저걸 베어야 해.”
지금 쏟아져 내리는 이 억수 같은 비는 모두 어머니 나무의 탓이었다.
세상을 지키기 위해 어두운 감정들을 흡수하던 어머니 나무는 이제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 먹구름을 뱉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어머니 나무는 이들에게 정신적 지주다.
그런 신성한 존재를 스스로의 손으로 베는 건 어려운 일이다.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어머니 나무는 단단하다.
웬만한 공격은 모조리 튕겨 나갈 정도로.
‘하다못해 나무 괴수도 플로라의 화염을 버텨내는데, 저 거대한 나무는 더 단단하겠지.’
결국, 필요한 건 검광이다.
문제는 이안이 다시 검광을 사용하려면 몇 시간은 기다려야 한다는 점이다.
이안외에 검광을 사용할 수 있는 건 우마딜로뿐이었지만, 그 역시 심력을 모두 소진했다.
굉장히 곤란한 상황에 처한 셈.
어쩔 수 없다 여긴 이안이 말했다.
“뭐. 좀 기다리면 되지 않을까?”
어차피 변절자고 되살아난 영웅이고 다 처리했으니까.
하지만 우마딜로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불길한 기운이 어머니 나무에게서 뻗어 나오고 있었다. 어머니 나무는 영웅들의 죽음에 분노하고 계신다. 뭔가 수를 쓰실 거다.”
“수라고 한다면…….”
우마딜로가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은 숲의 종족들의 묘지.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나무가 심어진 곳.
나무의 숫자는 숲의 종족의 긴 역사를 보여주었다.
우마딜로는 선조들의 묘를 보며 중얼거렸다.
“어머니 나무는 되살릴 거다. 숲에서 죽어간 모든 이들을.”
영웅들을 죽음에서 되돌렸듯.
어머니 나무는 분명 그렇게 할 것이다.
설령 그게 그녀의 온 힘을 쥐어짜 내, 결국 자기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해도.
어머니 나무는 본인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세상을 멸망시킬 것이다.
세상을 증오하니까.
‘야단났네. 역시 어떻게든 검광을 아꼈어야 하나.’
모두가 곤란해하던 그때였다.
누군가가 어머니 나무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그 얼굴을 확인한 우마딜로가 당황해 외쳤다.
“아버지!”
온몸에 상처를 입어, 가쁜 숨을 몰아쉬는 카도가 어머니 나무의 곁에 다다라 있었다.
분명 바닥에 누워 치유 받고 있었어야 할 카도가 어느새 저 멀리까지 가 있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치료사들 역시 의아해했다.
“분명 방금까지 이곳에 누워 있었다.”
“그 짧은 사이에 저기까지 걸어갔다는 거냐? 말도 안 되는 소리!”
“우리도 말도 안 되는 건 알지만…….”
“아니, 이럴 때가 아니다. 어서 아버지를 말려야 한다!”
우마딜로는 곧바로 땅을 박찼다.
하지만 어머니 나무까지의 거리는 생각보다 더 멀었고, 카도는 이미 양손으로 도끼를 쥐고 있었다.
“이게 악마라는 거지? 그럼 내가 베겠다.”
그렇게 말하는 카도의 눈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빛을 품고 있었다.
치매 노인 카도.
지금 그는 진심으로 스스로가 젊고 강한 전사라 믿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은 믿음이 힘을 발휘하는 현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거 같던 카도의 몸에 강렬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강한 기운이었다.
카도가 도끼를 들었다.
도끼날에는 나무를 연상케 하는 갈색의 빛이 서려 있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늙어가고 쇠약해지는 건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운명이다.
하지만 그런 운명도.
시간의 저주도. 지금만큼은 카도를 비켜나가고 있었다.
전사 카도가 어머니 나무를 향해 도끼를 내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