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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71화 (172/222)

171. 대수림(11)

쩌저적!

도끼가 나무줄기에 파고들었다.

상처에서 균열이 퍼져나갔다.

처음에는 미세한 크기였다.

하지만 균열은 커지고 커져, 이내 어머니 나무의 전체를 뒤덮었다.

이안이 외쳤다.

“플로라! 지금이야! 온 힘을 다해 날려!”

“어? 어!”

플로라가 빠르게 불꽃을 압축해 창의 형태로 만들어냈다.

창은 하늘로 붕 떠오르더니, 그대로 어머니 나무를 위에서부터 꿰뚫어 버렸다.

파아아아!

어머니 나무가 순식간에 불꽃에 휩싸였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불꽃은 그 이상 퍼지지 않고, 오로지 줄기만을 태웠다.

플로라의 불꽃 제어 솜씨였다.

우마딜로와 전사들은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헤아릴 수 없는 심정들이 그들의 가슴 속을 울렸다.

긴 세월을 살아오던 그들의 어머니가 불타 스러져가고 있었다.

넋을 잃고 있던 우마딜로가 갑자기 걸음을 옮겼다.

“아! 아버지!”

우마딜로는 불타는 어머니 나무 근처로 달렸다. 이안과 다른 전사들도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이내 카도를 발견했다.

우마딜로가 서둘러 카도의 맥을 짚는 동안, 카도는 그런 우마딜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들.”

“……아버지?”

카도는 더 말을 잇지 않고, 은은히 미소지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의 손은 온 평생을 써왔던 지팡이와 손도끼를 굳게 잡고 있었다.

지켜보던 이들은 모두 고개를 숙여 죽기 전까지 위대했던 전사에게 예를 표했다.

***

세계수는 그 크기만큼이나 긴 시간 동안 타올랐다.

플로라의 마법이 흩어지고, 본격적으로 줄기에 불이 붙자 검은 연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단순히 연소 반응에 의한 부산물이 아니었다.

부정한 감정들이 뒤섞여 있는 연기였다.

그 양도 어마어마했다.

‘이런 걸 품고 있으니 정신을 놓을 만도 하지.’

[어쩌면 이것 때문에 악마의 재림이 더 빨라질 수도 있겠어요. 생각보다 더 엄청난 양이에요.]

‘생각보다 어머니 나무가 더 대단했다는 거겠죠.’

이안은 불타는 나무를 향해 걸었다.

플로라가 그런 이안을 말리려 했다.

“잠깐! 아직 위험해! 저 나무가 뭔 짓을 할지도 모르잖아!”

“괜찮아.”

이안은 어머니 나무를 보았다.

검은 연기가 많이 빠져나간 저 나무는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적의와 분노가 사라졌다고 해야 할까.

“이 정도 불꽃은 나한테는 오히려 딱 적당하고 말이야.”

기분 좋은 따뜻함이었다.

불길에 다가갈수록, 이안은 상처가 치유되고 힘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그리고 기분 탓인지 모르지만, 저 나무가 자신을 부르는 것만 같았다.

쩌적.

이안이 다가가자, 나무줄기에 난 균열이 더더욱 깊어지더니 이내 껍질이 후두둑 흘러내렸다.

“어?”

예상외로 줄기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머뭇거리던 이안은 조심스레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나무껍질이 다시 수복되더니 주위에 어둠이 찾아왔다.

하지만 불안한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이안은 이곳에서 아늑함과 따스함을 느꼈다.

그러다 갑자기 이안이 서 있던 땅이 사라지고, 몸이 위로 붕 떠올랐다.

‘아니, 어쩌면 내려가고 있는 걸 수도.’

자신이 저 하늘 위로 떠오르는 건지.

아니면 사실 까마득한 지하로 추락하고 있는 건지.

도무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그런 이상한 감각 속에서 부유하길 잠시.

불현듯 빛이 다시 찾아왔다.

이안은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는 감탄을 터트렸다.

“와아…….”

이안은 우주 공간을 유영하고 있었다.

사방이 반짝이는 별들이었다.

발을 딛고 서 있을 바닥은 없었다.

“바깥에서 손님이 오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네.”

온 공간에 목소리가 울렸다.

어디서 얘기하는 건지 방향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이안의 앞에 곧 별빛이 뒤섞이더니, 여인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여인의 외모는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아름답다는 것만큼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안이 중얼거렸다.

“어머니 나무.”

“드디어 만나게 되었구나. 너에게는 초면이겠지? 나는 긴 세월 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왔단다.”

너무나 살가운 어조로 말하는 그녀에게 이안이 되물었다.

“저를 지켜봐 왔다고요?”

“오늘의 이 만남은, 이미 오랜 세월 전에 정해진 거였거든.”

“운명.”

“그렇게도 부르지.”

“그렇다면 오늘, 당신이 죽은 것도…….”

이안이 머뭇거리자 어머니 나무는 싱긋 웃었다.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 내가 오늘 죽을 거라는 것조차 이미 난 알고 있었으니까. 세상 모든 것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고, 내 차례가 되었을 뿐이란다.”

이안은 불편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그녀가 죽는 데에는 이안도 크게 일조했으니.

“죄책감을 지니는 건 네가 가진 선함의 증거겠지만, 그것 때문에 지금의 이 만남을 망치지는 말아주렴. 나는 이 순간을 참으로 오래 기다려왔고, 애석하게도 나에게는 남은 시간이 많이 없구나.”

“어차피 이미 운명으로 정해져 있는 거면, 오늘 무슨 말을 할지도 정해진 거 아니에요?”

“운명은 바꾸기 아주아주 어려운 녀석이지만, 또 불가능한 건 아니란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는 대화를 원하고 있었다.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그녀가 말했다.

“나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니?”

“이 우주 같은 공간. 하늘 위인가요 지하인가요? 상식적으로 생각해서는 전자가 맞지만…….”

그녀의 깊은 눈동자에 잠깐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

“대단히 뛰어난 직관을 가지고 있구나. 네 예상대로 이곳은 나의 뿌리에 해당하는 곳이란다.”

이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별이 가득한 이곳이 사실 지하 깊숙한 곳이라는 사실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안은 이내 수긍했다.

이것보다 더 거짓말 같은 일들도 많이 겪어보지 않았는가?

게다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의문으로 한정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또 물어볼 게 있니?”

이안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단어를 고르다, 이내 입을 열었다.

“저한테 힘을 주세요.”

“직설적이구나.”

“어차피 가는 마당에 전부 주고 가세요. 제가 좋은 곳에 잘 쓸게요.”

“……과하게 직설적이구나.”

어머니 나무와의 대화.

원작에서는 없는 이벤트다.

얻을 수 있는 게 있다면 무조건 받아내야 한다.

‘말을 빙빙 돌릴 때가 아니야.’

부탁 아닌 부탁을 들은 어머니 나무가 잠시 사색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원하는 대로 줄게.”

“아, 정말 감사…….”

“단. 네가 힘을 원하는 이유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해주렴. 그 이유를 듣고, 어느 정도의 힘을 줄지 판단할 거야.”

그녀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이안을 쳐다보았다.

마치 시험해보는 듯한 분위기에 이안의 머릿속도 복잡해졌다.

하지만 한시가 아깝다.

머리를 굴릴 시간이 없다.

‘꾸며진 대답보다, 그냥 진심을 뱉는 걸 바라는 것 같기도 하고.’

근거는 없었지만 이안은 직감에 따르기로 했다.

“악마를 토벌해야 합니다. 저는 살아남고 싶거든요. 그걸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죠.”

“생존 욕구. 알기 쉬운 동기구나. 그리고?”

“이걸로는 부족한가요?”

“당연하지. 악마를 이기기 위해서는 꼭 내 힘이 필요한 건 아니잖아?”

이안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인자한 인상으로 보아 쉽게 넘어가 줄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호락호락하지가 않았다.

‘힘을 원하는 이유.’

어머니 나무의 말이 맞았다.

지금의 이안은 약하지 않다.

악마를 토벌하기만 하는 거라면, 이대로 성장을 계속하기만 해도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그저 토벌하는 거로는 안 돼. 완벽하게 잡아내야 해. 아무런 손해도 없이.’

이안은 몇 번이고 게임을 클리어해왔었다.

그만큼 최종보스인 대악마와도 여러 번 싸워왔다.

대악마.

귀찮은 녀석이긴 하지만 주의만 제대로 기울이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

아니, 오히려 그 전에 마주치는 적들에 비해 어떤 면에서는 더 쉽다고까지 느껴진다.

하지만 이 망겜의 최종 보스가 악랄한 이유는, 잡아내기 위해 반드시 파티원 한 명을 희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간 정든 캐릭터를 포기해야 하는 건 아주 더러운 기분이다.

그런 상태에서 악마가 사라지기 전 비웃듯이 내뱉는 조롱까지 들으면 더러움이 배가 된다.

이 망겜을 하는 어떤 플레이어도 깔끔한 마무리. ‘완전한 승리’를 거머쥐지 못한다.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고인물로 자부하는 그조차 숱한 시도를 했지만, 희생 없이 악마를 잡아내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게 게임 시스템으로 정해진 법칙이니까.

이곳이라고 상황이 다르지 않았다.

이네스는 끝내 자기 자신을 희생하고, 모두에게서 잊혀졌다.

이네스를 잃은 동료들은 각자 비참한 끝을 맞이했다.

왠지 모르지만 이안은 알 수 있었다.

악마는 세상의 그림자 속에 숨어, 위대했던 영웅들이 추락하는 걸 보고 즐거워하고 있을 거라는 걸.

‘이번에는 다를 거야.’

동료로 들인 스텔과 플로라. 앞으로 함께하게 될 레아, 어쩌면 우마딜로, 그리고 자기 자신까지.

단 한 명도 죽게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게임에서는 불가능했던 일을 이곳에서는 이루어내고 말 거다.

이안은 어머니 나무와 시선을 맞대며 이 모든 걸 설명했다.

“그냥 악마를 이길 생각은 없어요. 놈이 약은 수를 쓰기 전에, 죽여 버릴 거예요. 그리고 그걸 위해서는 힘이 필요해요. 압도적인 힘이.”

어머니 나무는 이안의 눈동자 속 결의를 읽어냈다.

“다섯 명이 들어가, 네 명이 나온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먼 과거부터 이어지던 법칙을 지금 깨겠다고 공언하는 거구나.”

그녀가 짐짓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 네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걸 생각하고 있는 건지 아니? 너는 지금 운명과 순리를 거스른다고 말하고 있는 거란다. 한낱 인간의 몸으로.”

“운명은 바꾸기 아주아주 어려운 녀석, 불가능한 건 아니라면서요.”

앞서서 그녀가 말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자, 어머니 나무가 피식 웃었다.

“작은 물줄기의 흐름을 바꾸는 건 쉽지만, 너른 강의 흐름을 바꾸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인 법이지.”

“지금 제가 하려는 일이, 그 정도라는 건가요?”

“그렇단다.”

단호하게 말하는 그녀에게 이안이 말했다.

“그러면 더더욱 힘을 주셔야겠네요. 강줄기를 막으려면 웬만한 힘으로는 안 될 거 아니에요.”

“…….”

“이걸로 이유는 되었죠?”

어머니 나무가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이내 재밌다는 듯,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어려운 길을 택했구나. 네 앞에 너무나 거대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단다. 내 눈에는 네가 그 시련에 결국 좌절하거나, 타협하는 미래밖에 보이지 않는단다. 그래도 괜찮니?”

이안은 말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대답할 필요도 없다는 제스쳐에 어머니 나무는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후후. 역시 오늘의 만남을 기대하길 잘했어.”

“대화가 만족스러웠나 보죠?”

“응. 기대 이상이었단다.”

그렇게 말한 그녀는 우아하게 몸짓했다.

그러자 주위에 떠있던 별빛이 한데로 뭉치기 시작했다.

“내 힘을 줄 거야. 아. 그리고 원래 이 아이를 찾으러 온 거였지?”

그녀가 무언갈 떠밀었다.

뭔지 싶어 고개를 돌리니 잠든 이네스가 보였다.

일곱 번째 성검 조각과 그곳에 깃들어있던 이네스의 영혼.

그녀가 말했다.

“잠시 휴식을 주었어. 영혼의 일부라도, 그 아이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아. 감사합니다.”

“감사는…… 아. 이런. 즐거운 시간은 왜 이렇게 빨리 가는 걸까?”

어머니 나무가 한탄을 내뱉었다.

주위 공간이 무너지며 별들이 하나로 뭉치고 있었다.

끝이 다가온다는 증거.

그녀는 우아하게 손을 흔들며 작별을 건넸다.

“잘 가렴. 부디 네 목표를 이루길 바래.”

어머니 나무의 몸이 점점 흩어지기 시작했다.

고개를 숙여 인사하려던 이안은 문득, 궁금증이 일어 급하게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제 말을 듣고 어느 정도 힘을 줄지 정하신다고 했죠? 얼마나 주실 건가요?”

끝까지 속물적인 질문에 어머니 나무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가능한 한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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