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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72화 (173/222)

172. 대수림(12)

이안은 다시 눈을 떴다. 어느새 그의 몸은 밖으로 나와 있었다.

여전히 세계수는 눈앞에서 불타고 있었다.

급하게 달려온 플로라가 이안의 팔을 잡아끌었다.

“위험하잖아!”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뭐? 무슨 시간?”

“방금 나무에 들어갔다 왔잖아. 그때로부터 얼마나 지났냐고.”

당황한 플로라가 되물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네가 저 나무에는 왜 들어가.”

“…….”

“혹시 많이 피곤해? 아니면 어디 아파? 괜찮은 거 맞지?”

그렇게 말한 플로라는 손을 뻗어 이안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이상하다 열은 없는데.”

“……아무래도 좀 피곤하긴 했나 보네.”

안쪽에서는 생각보다 오래 대화를 나눈 것 같았는데, 바깥에서는 찰나에 불과했던 것일까?

왠지 어머니 나무와의 만남은 오래전에 꾸었던 꿈처럼 막연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꿈은 아니다.

이안의 몸에는 새로운 힘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새로 얻은 성검에 깃든 힘과 더불어 어머니 나무의 힘까지 더해졌어.’

당장 능력을 시험해보고 싶었지만, 주위가 어수선해 그럴 수가 없었다.

이안은 플로라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뒤로 물러나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다른 전사들과 마찬가지로 어머니 나무가 불타는 걸 지켜보았다.

“어어.”

“넘어간다!”

우직!

활활 타오르던 어머니 나무의 줄기는 더는 버티지 못한 듯, 옆으로 꺾여 넘어갔다.

아주 천천히.

그만큼 거대한 나무가 넘어졌는데, 워낙 천천히 넘어간 터라 별다른 소리조차 않았다.

‘아니, 이건 넘어갔다기보다는…….’

[잠에 들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네요.]

이안과 이네스의 눈에 비친 그 모습은 어머니 나무가 끝까지 우아하게 자리에 누운 것처럼 보여졌다.

그 뒤로 반나절의 시간 후.

마침내 어머니 나무는 모두 불타 버렸다.

남은 건 오직 재와 타다 남은 가지뿐.

눈물을 삼키던 전사들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들의 얼굴 위로 환한 빛이 드리웠다.

하늘의 먹구름이 개어가고 있었다.

비가 그쳤다.

이번에 벌어진 재해가 끝났다는 증거이자, 어머니 나무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했다.

전사들이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빠져 있는 동안.

이안은 어머니 나무가 불탄 곳을 향해 조심히 다가갔다.

‘워낙 땅이 축축해서 불이 숲에 옮겨붙을 일은 없겠네요.’

잔불조차 남지 않은 주위를 유심히 살폈다.

눈에 들어온 건 바닥에 새카맣게 쌓여 있는 재들.

이안은 산더미처럼 쌓인 재의 일부분을 조심스럽게 손으로 훑었다.

“……!”

손에 무언가 딱딱한 게 잡혔다.

주먹만 한 크기의 딱딱하고 둥그런 물체.

‘이건…….’

어머니 나무가 마지막에 남긴 씨앗이었다.

***

그 후.

숲의 종족은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우선 죽은 어머니 나무의 장례를 치러야 했다.

비록, 이번 사건의 원흉이 그녀의 타락이었더라도 숲의 종족들은 어머니 나무를 탓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으니까요. 이들도 크게 개의치 않는 거겠죠.]

장례식은 죽은 전사들의 것까지 함께해 성대하게 치러졌다.

이안도 그들의 은인으로서 장례식에 참석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일반적인 인간들의 장례식과 달리 숲의 종족의 장례식은 매우 활기와 흥이 넘쳤다.

그들은 술을 마시고 흥겨운 노래를 부르며 함께 춤을 추었다.

특히, 숲의 종족의 요리와 술은 어디서도 맛보지 못한 독특한 맛이 났다.

“스텔 씨. 이거 먹어봐요! 산나물이랑 고기를 같이 찐 요린데, 소스가 엄청 특이해요!”

“응.”

“맛이 어때요?”

“응.”

“응이 아니잖아요!”

이제는 제법 친해진 스텔과 플로라가 요리를 함께 나눠 먹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이안에게는 전사들이 초록색으로 칠한 나무 술잔을 들고 몰려왔다.

“숲의 이슬이라는 우리들의 전통주다. 대륙 어디에서도 이만한 술을 맛보기는 힘들 거다.”

“……이슬?”

이슬이라는 이름과 초록색 잔.

왠지 머릿속에 연상되는 익숙한 이미지와 달리, 전통주는 전혀 다른 맛이 났다.

깔끔함.

향기.

그리고 엄청나게 높은 도수.

술을 한 모금 마신 이안은 인상을 찌푸렸다.

‘뭐가 이렇게 독해.’

그런 이안의 표정을 본 전사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아무래도 술이 너무 독한 모양이군.”

“아무리 뛰어난 전사라도 약한 부분은 있군.”

“기다려라. 어린 전사들을 위한 술을 가져오겠다.”

연이은 도발에 이안은 술잔을 다시 집어 들었다.

“뭐래.”

그리고 연거푸 전사들과 함께 술잔을 나눴다.

이안을 놀려대던 전사들이 취해서 곯아떨어지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신체 능력이 올라가면서, 자연히 주량도 는 이안에게 덤비기에 전사들은 너무 약했다.

의도치 않게 홀로 남게 된 이안에게 우마딜로가 다가왔다.

“아무래도 전사들이 널 많이 마음에 들어 한 것 같다. 친하지 않으면 웬만해서는 농담도 잘 안 하는 이들인데.”

“좋게 봐주면 나야 좋지. 그나저나 괜찮아?”

“음? 아…….”

이안의 질문을 이해한 우마딜로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 나무가 그렇게 되었을 땐, 어떻게 하나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씨앗이 남아 다행이다.”

“바로 심을 거야?”

“그렇다. 아무래도 어머니 나무께서 안배를 해주신 것 같다.”

“안배?”

우마딜로의 설명에 의하면 이 씨앗은 일반적인 숲의 종족이 죽었을 때 남기는 것과는 다르다고 하다.

숲이 종족이 죽어서 남기는 씨앗에는 혼이 남아 있다.

그렇기에 다시 심으면 나무가 되고, 죽음 이후에도 숲의 일부분으로서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것.

하지만 어머니 나무가 남긴 씨앗에는 혼이 담겨 있지 않다.

즉, 다시 심어서 새로운 어머니 나무가 자란다고 해도, 그건 이전의 어머니 나무와는 다르다는 거다.

‘그런가. 결국, 죽은 게 맞구나.’

씁쓸하게 입맛을 다신 이안이 말했다.

“한동안 새 나무를 기르려면 고생깨나 하겠네.”

“아마 그렇겠지. 몇 대에 걸쳐 노력해야 할 거다.”

“근데 내가 괜찮냐고 물어본 건 다른 부분이야.”

“음?”

“네 아버지.”

“아…….”

카도는 씨앗을 남기지 못했다.

마지막 순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강한 힘을 사용한 대가였다.

우마딜로는 잠시 침묵하더니 잔을 내밀었다.

이안과 우마딜로는 독한 술을 나누었다.

긴 얘기가 될 것 같았다.

우마딜로가 운을 뗐다.

“아버지는 예전부터 영웅들을 동경하셨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매일 밤 자기 전. 아버지는 나와 나바혼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영웅들과 그 동료들. 그들이 했던 모험들. 아버지는 당신도 언젠가 그런 위대한 업적을 세우는 게 평생의 꿈이라고 하셨다.”

이안은 카도를 떠올렸다.

온전치 못한 기억력이지만, 결사대라는 말만큼은 잊지 않고 끈질기게 따라다니던 카도를.

‘평생의 꿈이라 그랬던 건가…….’

“아버지는 말했다. 만약 당신의 때에 악마가 내려오지 않는다면, 나의 차례라고. 그 말을 듣고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나?”

“어떤 생각이었는데.”

우마딜로가 부끄럼 어린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두려웠다.”

“…….”

“악마가 두려웠다. 내 시대에 강림하지 않길 바랐다.”

남에게 말하기 힘든 전사의 고백.

“또한 부질없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차피 이번에 막아낸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 악마는 다시 나타난다. 그리고 언젠가 그 악마는 끝끝내 대륙을 멸망시킬 거다.”

“…….”

“그렇다면 내가 목숨을 걸어가며 싸우는 데에 의미가 있는가? 그냥 순리대로. 운명에 맞춰 사는 게 더 의미 있지 않을까?”

이안은 그런 우마딜로의 고뇌를 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히 들어주었다.

우마딜로가 입에 술을 털어 넣었다.

무뚝뚝한 그에게는 술기운을 빌려야만 할 수 있는 얘기들이었다.

“사실 다 핑계다. 나는 겁쟁이일 뿐이다. 전사로서도. 족장으로서도. 결사대로서도 자격이 없다. 실망했나?”

“별로. 결사대라고 두려움이 없는 게 아니라고. 같은 인간이라고…… 누군가 전해달라네.”

“뭐? 전해달라니, 무슨 소리지?”

“그런 게 있어.”

이네스의 말을 전해준 이안은 잔을 기울였다.

영웅 또한 인간이다.

하지만 그 말을 이네스가 하니 왠지 좀 어색하게 느껴졌다.

가끔 이네스는 인간을 넘어선 무언가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으니.

갑자기 미묘해진 분위기를 눈치챈 이안이 재빨리 물었다.

“그래서? 지금도 그 기분은 마찬가지야?”

“그렇다. 솔직히 말하면 난 여전히 두렵다. 하지만…… 아버지의 마지막이 계속 머리에 남는다.”

온 힘을 쏟아 거대한 어머니 나무를 베어내던 카도.

너무나 만족스러운 얼굴로 눈을 감던 위대한 전사.

“마지막 순간. 아버지는 나에게 눈빛으로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셨다. 나에게 깨달음을 주려 하셨다. 하지만 난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아버지를 따라 해보기로 했다. 아버지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면,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해주려 했는지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우마딜로의 눈이 의지로 차올랐다. 그가 이안을 보았다.

이안은 우마딜로의 말을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이안. 그때의 제안은 유효한가?”

“그래.”

“나는 여전히 겁쟁이다. 아버지에 비해 형편없는 전사다. 그래도 괜찮은가?”

“딱히 난 형편없다고 생각 안 하는데.”

“그렇다면 나를 동료로 받아주겠나?”

“당연하지.”

이안의 시원시원한 대답에 우마딜로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잘 부탁한다. 이안.”

이안은 그 손을 마주 잡으며 말했다.

“나야말로.”

***

다음날.

이안은 새벽같이 잠에서 깨어났다.

‘숙취는…… 없군.’

어젯밤 술을 거의 항아리째로 마시던 게 떠올랐다.

아무리 이안이라도 취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하지만 신체의 회복력 때문인지.

아니면 워낙 좋은 술이라 그런지 숙취는 없었다.

이안은 주위를 둘러봤다.

광란의 밤을 보낸 숲의 종족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자고 있는 게 보였다.

그중 한 구석에서는 플로라와 스텔이 한 이불을 덮고 도롱도롱 코를 골고 있었다.

‘그러게 적당히 마시라니까.’

피식 웃은 이안은 적당한 장소를 찾아 숲을 걸었다.

이렇게 아침 댓바람부터 일어난 이유는 한 가지였다.

‘새로 얻은 힘을 시험해봐야겠어요.’

원래 게임에서 일곱 번째 성검 조각을 얻어 받는 건 ‘거목의 단단함’.

피부와 뼈를 단단하게 해 체력과 방어력을 크게 올리는 능력이다.

후반부에는 대규모 전투를 벌이거나, 막강한 적을 상대하는 경우가 많아 필수적인 능력이기도 하다.

‘원래 게임에서도 용의 가호랑 거목의 단단함의 시너지를 이용하면 웬만한 잡몹들은 무시하고 다녀도 되었지.’

하지만 이번에 이안이 얻은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자 그럼 이걸 어떻게 시험해봐야 하나.’

어머니 나무는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왜인지 이 능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저절로 머리에 떠올랐다.

‘좋아. 그럼 일단 좀 높은 곳으로 올라가 볼까.’

이안은 적당한 거목을 찾은 뒤, 그대로 빠르게 줄기를 밟아 위로 올랐다.

그리고 적당한 위치에 다다르자 굵은 나뭇가지를 하나 밟고 섰다.

‘좀 높네. 하지만 능력을 시험하기에는 이 정도가 적당하겠지.’

이안은 조용히 정신을 집중했다.

새로 얻은 힘을 사용하기 위해 마음속으로 강하게 이미지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효과가 나타났다.

우지직.

이안은 가만히 서 있었지만, 밟고 서 있던 굵은 가지가 갑자기 부러졌다.

나뭇가지와 함께 이안은 그대로 아래로 추락했다.

땅이 시시각각 가까워져 왔다.

하지만 이안은 낙법을 취하기는커녕, 오히려 양발을 쭉 뻗어 아래쪽을 향하게 했다.

누군가 봤다면 다리가 부러질까 아찔해 했을 광경.

머지않아 이안의 양발은 바닥에 부딪혔고…….

콰아앙!

강한 충격파와 함께 지면이 진동하고, 반경 내의 나무들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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