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대수림(13)
어머니 나무에게서 받은 능력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뿌리’다.
땅에 뿌리를 단단히 내린 나무는 어떤 풍파에도 쓰러지지 않는 법.
이번에 새로 얻은 능력은 신체를 순간적으로 무겁게 만들 뿐만 아니라, 몸에 전해지는 충격의 상당 부분을 발바닥을 통해 주위 지면에 흘려보낼 수 있게 되었다.
‘이건 나도 처음 보는 능력인데. 언뜻 보면 탱커용이지만…….’
이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몸을 무겁게 해 높은 곳에서 떨어졌지만 이안의 다리는 충격을 대부분 흘려보낸 터라 멀쩡했다.
그리고 흘려낸 힘은 충격파의 형태로 주위에 퍼져나가 주위 땅들을 완전히 헤집어 놓았다.
만만치 않은 위력에 침을 꿀꺽 삼켰다.
‘잘만 사용하면 광역기로도 사용할 수 있겠어요. 역시. 어머니 나무가 마지막에 전해준 능력이 다르긴 다르네요. 이건 거의 상식을 뛰어넘는 힘인데요.’
[네. 익숙해지면 웬만한 둔기도 가뿐히 막아낼 수 있겠어요. 뭔가 제약은 없나요?]
‘아. 몸을 무겁게 만들거나 충격을 흘리려면 두 발을 땅에 댄 채로 제자리에서 못 움직이네요.’
마치 나무가 한자리에 뿌리를 박듯.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이 정도는 조금 까다로운 제약 정도지, 큰 페널티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활용법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봐야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안은 강해졌다.
그것도 큰 폭으로.
***
최근, 제국은 몇 달째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황제의 갑작스러운 전쟁 선언.
그 연설 이후, 갑자기 적국의 심장에 나타난 흑기사.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절묘한 사건에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어쩌면 황실이 악마숭배자와 결탁한 게 아니냐는 소문.
황실에서는 근거 없는 낭설이며,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자들은 엄벌하겠다고 경고해 이내 그 소문은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시민들의 마음 한구석에 자그마한 의심의 씨앗을 심어주기에는 충분했다.
그와 더불어 제국 내부에서는 반 전쟁파라는 세력이 새로 생겼다.
피에람 가문을 주축으로 여러 귀족이 뭉친 세력으로, 황제조차 무시하기 힘들 정도의 세를 자랑했다.
이들은 황제의 급진적인 행보를 비판하고 견제하며 여론전을 펼쳤다.
암암리에 교단의 지원까지 받은 반 전쟁파의 끈질긴 노력 끝에, 올해 안에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황제의 야망은 저지되었다.
전쟁을 벌이기에는 이제 겨울까지 얼마 안 남았던 탓이다.
시시각각으로 귀찮아져 가는 상황.
하지만 황제는 개의치 않았고, 그가 할 일을 해나갔다.
“오셨습니까. 폐하.”
“고생이 많소. 라티스 경.”
극진히 예를 표하는 기사단장의 어깨를 두드려준 황제가 꾸짖듯이 말했다.
“한데, 내가 말했지 않소. 굳이 이렇게 거창하게 준비하지 말라고. 괜히 내가 미안해지지 않소.”
황제의 방문에 강철 기사들이 모두 모여 복도의 양옆으로 쭉 도열 해 있었다.
번쩍번쩍 광이 나는 갑옷과 검을 보면, 이들이 갑작스러운 황제의 방문에 얼마나 고생했을지 눈에 보였다.
하지만 기사단장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마음 쓰지 마십시오. 저희는 폐하의 충실한 검이자 방패이니.”
검과 방패 따위에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는 기사단장의 말에, 황제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 개인적인 일로 찾아온 것이니, 이만 해산시키시오.”
“폐하의 뜻이 그러하다면 따르겠습니다.”
기사단장은 도열 해 있던 기사단에게 해산을 명했다.
하지만 기사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켰다.
당황한 기사단장이 물었다.
“뭣들 하나. 각자 할 일들 하러 가라!”
기사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폐하께서 떠나실 때까지 자리를 지키게 허락해주십시오!”
이들의 제국과 황제에 대한 충성은 진짜였다.
기사단장은 이들의 그런 충성심에 흡족해야 할지, 아니면 명령을 어기는 점에서 괘씸해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런 기사단장의 어깨를 황제가 친근하게 두드렸다.
“하하. 이런 기사들이 나를 따른다니. 역시 나는 복 받은 사람이오. 어쨌든, 이제 안내해주겠소?”
“알겠습니다.”
기사단장이 앞장서고 그 뒤를 황제와 수행원들이 따랐다.
목적지는 기사단 건물의 중심부에 있는 복도였다.
복도의 양옆에는 전사한 기사들의 명패와 검이 균일한 간격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황제는 그 검과 이름을 하나하나 유심히 살폈다.
어떤 검은 반쯤 깨져 있었고, 어떤 검에는 피가 새까맣게 말라붙어 있었다.
멀쩡한 건 단 하나도 없었다.
그들이 최후까지 힘든 싸움을 이어나갔다는 증거였다.
“아이하른 경. 편히 잠들길 바란다. 벤자민 경. 그대의 희생에 제국의 황제로서 깊은 감사를 표한다. 카른 경. 잊지 않겠다.”
황제는 전사자들 하나하나의 이름을 부르며 짧게나마 감사를 표했다.
그 모습에 기사들은 깊은 감동으로 눈시울을 붉혔다.
누군가 냉소적인 사람이 황제의 행동을 보았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자신의 핵심 지지층의 충성도를 올리기 위해 연기를 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연기라고 보기에는 황제의 태도는 너무나 진중했고,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묻어나왔다.
그렇게 조금씩 복도를 걷던 황제는 마지막 검에 이르렀다.
유독 화려하게 장식된 검 앞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모두를 구해낸 영웅]
[릴리 리안]
황제는 검 앞에 놓여 있는 하얀 꽃들을 들어 그 향기를 맡았다.
“생화군.”
“매일 아침 저나 다른 부하들이 정원사들에게 부탁해 받아오고 있습니다.”
“흐음. 리안경이 살아생전 꽃에 관심을 두던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좋아하긴 할 것 같군.”
황제는 꽃을 내려놓고 말없이 벽에 걸린 검을 바라보았다.
손잡이만 남기고 깨져 버린 검.
상대가 얼마나 강했는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황제가 말이 없자 기사단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때를 생각하는 겁니까?”
“그렇소. 도무지 잊히지 않더군. 기사단은 아무것도 없던 나를 처음부터 지지해주던 이들이었으니까.”
담담한 황제의 말에 기사단장이 억지로 밝은 어조로 말했다.
“흑기사에게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던 저희지만, 벌써 여기까지 왔습니다. 흑기사가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니 리안과 다른 동료들의 복수까지 그리 머지않았습니다.”
“……믿음직스럽군. 경만 믿고 있겠소.”
황제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걸 보며 황제의 기분이 풀렸다 생각한 기사단장이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맡겨주십시오. 흑기사는 반드시 제 손으로 벨 겁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하오.”
용건을 마친 황제는 뒤를 돌아 걸음을 옮겼다.
기사단장은 예상보다 빨리 일정이 끝난 게 아쉬웠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혼란한 시국이다.
황제도. 기사단장도 너무나 바빴다.
그대로 건물을 나서려던 와중.
황제가 걸음을 멈췄다.
“아. 그러고 보니 갑자기 궁금해진 게 있소.”
“말씀하십시오.”
“기사단을 나간 에스테반 경은 요즘 무얼 하고 있소? 아, 단순히 근황이 궁금한 것뿐이니, 모른다면 굳이 알아볼 필요는 없소.”
“에스테반. 말씀입니까…….”
잠시 고민하던 기사단장이 씁쓸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는 잘 지내고 있는 듯합니다. 대륙을 유랑하며 여러 사건을 해결하고, 명성을 떨치고 있다고 하더군요. 제법 유명합니다.”
황제가 웃었다.
“하하. 그 당시에도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자였으니, 명성을 떨쳐도 이상하지 않지. 어쨌건. 잘 지낸다니 다행이오.”
“저도 그 친구만큼은 과거를 잊고 행복하게 지내길 바랄 뿐이오. 아! 그러고 보니 이번 축제 때 에스테반에 필적하는 재능을 찾았었습니다만…….”
“음? 그는 지금 어디있소?”
황제는 진한 흥미를 빛냈지만 기사단장은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황궁이 혼란하던 차에 놓치고 말았습니다. 나 원 참. 설마 문을 부수고 도망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호쾌한 인물이군. 에스테반을 연상케 하는 인재라…… 분명 나도 그런 이를 한 명 본적이 있었소.”
“예? 그렇습니까?”
“안타깝게도 놓쳐 버렸지만.”
황제의 말에 기사단장이 당황했다.
놓쳤다고?
그 황제가?
“그 정도의 인재라면 지금이라도 찾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됐소. 이제 그만 들어가 일들 보시오.”
“아, 예. 살펴 가십시오.”
기사단장의 배웅을 뒤로하고 걸어가길 잠시.
수행원들 사이에 섞여 있던 사내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황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테이오스.”
“예. 폐하.”
“오테르 공은 좀 어떻소?”
“작업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이른 시일 내에 마법이 완성될 거라고 합니다.”
“잘됐군. 금방 다시 흑기사를 보낼 수 있겠어.”
그 말에 테이오스는 힐끗 뒤를 쳐다보았다.
저 멀리 기사단 건물 앞에서는 여전히 기사단장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볼 생각인 듯했다.
테이오스는 기사단장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던 황제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지금, 차가운 얼굴로 흑기사에 대해 말하는 황제의 모습과 대조했다.
마치 다른 사람이기라도 한 듯한 모습에 테이오스는 감탄했다.
‘역시. 범상한 인물은 아니다…… 뭐. 그러니까 내가 따르는 거지만.’
“왜 그러시오?”
“아무것도 아닙니다.”
적당히 얼버무린 테이오스가 물었다.
“다음에 흑기사를 보낼 곳은 어딥니까.”
“그건 왜 묻는 것이오?”
“저도 미리 준비해 두고 싶은 게 있는지라.”
“흠. 후보지가 몇 군데 있소. 이번엔…….”
고민하던 황제가 말했다.
“역시 아이벤이 좋을 듯하오. 그곳을 완전히 부숴놓으면, 혼란을 일으키기도 좋겠지.”
***
“잘 부탁한다. 우마딜로다.”
“잘 부탁…… 해요.”
“응.”
이안이 능력을 시험해보고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스텔과 플로라도 깨어 있었다.
숙취에 머리 아파하는 둘에게 이안은 우마딜로가 동료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둘은 조금 놀란 눈치였지만,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역사 속 결사대에는 언제나 숲의 종족이 끼어 있었으니.
어색한 통성명을 마친 일행은 이후의 일정에 대해 논의했다.
“우마딜로. 언제쯤 숲을 떠날 수 있을 거 같아?”
“우선 나 대신 족장을 맡아줄 전사는 찾았다. 하지만 며칠간은 어머니 나무나 부족의 향후 문제에 관해 토의해야 할 것 같다. 혹시 급한가?”
“급하지는…… 않을 거야. 아마도.”
변해 버린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안이 확신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래도 1,2 주 정도는 여유가 있지 않을까 싶긴 한데.”
“알았다. 최대한 서둘러보겠다.”
얘기를 듣던 플로라가 중얼거렸다.
“벌써 대수림을 떠나는구나. 며칠 있지도 않았는데…….”
“볼일은 다 봤으니까. 왜. 아쉬워?”
플로라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숲의 종족에게 환상을 품고 있던 그녀는 아직 대수림에서 보고 싶은 게 많았다.
“야광초들이 빛을 내면서 마치 별들처럼 보이거나, 특정한 시간에만 나타나는 신비한 호수라거나…… 아. 이것도 혹시 동화책에서 지어낸 건가…….요?”
플로라는 말을 꺼내며 우마딜로의 눈치를 조심히 살폈다.
“아니. 그것들은 모두 대수림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지금은 숲이 망가져서 보기 힘들 거다.”
“아…… 그렇군요. 언젠가는 꼭 한번 봐보고 싶었는데. 결국, 못 보게 됐네요.”
“무슨 소리지?”
“예?”
우마딜로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나중에 다시 와서 보면 될 거 아닌가?”
“어? 음? 다시 와도 되나요?”
놀란 표정의 플로라를 향해 우마딜로가 망설임 없이 답했다.
“물론이다. 동료의 방문을 마다하는 전사는 없다.”
“……그러네요. 돌아오면 되는 거였어요. 딱히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니까요.”
악마와 싸운다고 반드시 죽으라는 법은 없다.
그 사실을 깨달은 플로라가 한결 홀가분 얼굴로 이안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다음은 어디로 갈 건데? 생각해 둔 곳 있어?”
스텔과 우마딜로도 궁금했는지, 이안에게 시선을 보냈다.
어려울 것 없는 질문이었다.
이미 오래전에 정해두었으니까.
이안이 답했다.
“아이벤. 아이벤으로 갈 거야. 그리고 그곳에서…….”
흑기사를 맞이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