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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74화 (175/222)

174. 지하미로

“아! 아빠한테서 편지다.”

아이벤으로 가는 중간 거점에서 일행은 교단에 들렀다.

그곳에서 플로라는 로드릭의 편지를 전해 받았다.

“뭐라고 써있어?”

“응. 9장가량은 내 걱정이랑 잔소리랑 보고 싶다는 말이 써 있고…… 마지막 한 장에는 요즘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써 있어.”

플로라는 냉정하게 앞의 9장을 내팽개치고, 이안과 함께 마지막 한 장만 따로 빼서 읽었다.

‘아무래도 로드릭은 잘 하고있는 것 같네. 위험을 무릅쓰고 구출하길 잘했어.’

로드릭은 특유의 수완을 발휘해서 세력을 결집시키고 있었다.

전쟁이 머지않았다 여긴 그는 병사와 용병을 모집했고, 자금을 풀어 식량을 사들였다.

‘지금 당장은 반 전쟁파라는 걸 고수하고 있지만, 나중에는 반 황제파가 되겠지.’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되고 황제의 비밀이 까발려지면 이들은 황제를 적대하는 중심 세력이 될 것이다.

그럴 때 중요한 게 바로 레아 클로딘이다.

명분과 정통성을 가지고 황제를 끌어 내리려면 레아가 필요했다.

‘레아는 잘하고 있으려나.’

황도에서 마주쳤을 때 이안은 레아에게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설명했다.

일이 터지면 어서 황도를 빠져나오라는 말과 함께.

그도 그럴 게, 상황이 불리해지면 가장 목숨이 위험해지는 게 바로 레아다.

레아의 존재만으로 황제의 권좌는 위험해질 수 있다.

설령 황제가 그럴 생각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 측근들은 어떻게든 레아를 처리하려 할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나오라고 했지만…….’

아직 레아는 황제를 믿고 있다.

그런 사람을 억지로 끌고 나올 수는 없는 법.

지금으로선 그저 레아가 너무 늦지 않게 빠져나오길 바랄 뿐이다.

편지를 돌려준 뒤 이안은 아비게일을 만나러 갔다.

커다란 거울 앞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자, 머지않아 아비게일의 모습이 거울에 떠올랐다.

저번보다 진해진 다크서클과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깡마른 몸.

그녀가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 눈에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이안 님. 대수림에서의 일은 잘 마무리되었나 봅니다.”

“예. 아비게일은 엄청 고생하시나 보네요.”

“후우. 덕분에 말이죠.”

아비게일이 한숨을 내쉬며 한탄했다.

“교황 성하께서 안달이십니다. 슬슬 이안 님의 존재를 세상에 공표할 때가 아니냐고. 최근 황실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거든요. 아마 똥줄이 많이 타시나 봅니다.”

과격한 표현에 이안은 웃음을 삼켰다.

우유부단한 느낌이 있던 교황이니 지금 상황이 꽤나 긴장될 터.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조만간 기회가 올 거예요. 기왕이면 임팩트 있게 가는 게 좋잖아요?”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인 계획을…….”

“아이벤. 아이벤에 흑기사가 나타날 거예요.”

흑기사라는 말에 아비게일의 눈빛이 달라졌다.

요즘 교단을 비롯해 왕국들이 가장 골머리를 앓는 게 바로 그 흑기사니.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이 재앙은 귀족과 통치자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더욱 곤란한 건, 이 흑기사를 막기 위해 어느 정도의 병력이 필요한지 가늠이 안 된다는 거다.

습격당했던 텔 왕국의 왕궁에도 적지 않은 병력이 있었다.

아무리 전선에 정예들이 나가 있다 해도, 그렇게 쉽게 무너질 이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때문에 왕국들은 교단에 아우성을 쳤다.

흑기사는 악마와도 같은 괴물이었고, 그런 부정한 존재를 상대하는 건 교단의 일이었기에.

아비게일이 되물었다.

“그게 확실합니까?”

“확실…… 까지는 아니고 상당히 확률이 높아요.”

“흠.”

아비게일은 잠시 시간을 들여 생각을 정리한 뒤, 의견을 말했다.

“전에 말씀하신 대로 황제가 흑기사를 조종하는 거라면 이상할 건 없군요. 아이벤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니. 정확한 시기는요?”

“저번에 말씀드린 대로 저들은 대현자 오테르를 통해 흑기사를 공간 이동시키는 거예요. 정확히는 몰라도 공간 마법이 한두 달 안에 준비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마법이 완성되면 곧바로 일을 벌이겠군요.”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종이에 무언가를 분주하게 적어 내려가던 아비게일이 물었다.

“자신 있으신 겁니까? 혹시라도 아이벤의 주민들을 위해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거시는 거라면, 그만두십시오. 이안 님의 목숨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아비게일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일절 깃들어 있지 않았다.

성직자가 할 만한 얘기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말이 틀렸다고 볼 수도 없다.

‘흑기사를 상대로 이길 수 있나…….’

솔직히 말해, 확신할 수 없는 상대였다.

흑기사는 강하다.

게임에서뿐만 아니라, 이곳에서도 직접 검을 마주 대본 이안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내버려 두면 점점 더 강해질 거다.’

안전을 위해 싸움을 피한다면, 앞으로는 더욱더 어려운 싸움을 해야 할 것이다.

어느 정도의 위험은 감수해야 했다.

‘지금 꽤 강해지기도 했고.’

어머니 나무에게서 받은 힘.

새로 얻은 성검의 조각.

그리고 늘어난 동료.

냉정히 계산했을 때, 흑기사와 맞붙어서 이길 확률은 반반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승산을 더 높일 방법도 있었다.

“저는 아이벤에서 싸울 겁니다.”

“……이미 마음을 굳히신 것 같군요.”

“예. 그러니 아비게일 님도 제가 죽지 않게 도와주세요.”

“구체적으로는요?”

“성기사와 사제들을 보내주세요. 단,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 만으로요. 어차피 실력이 안 되면 흑기사를 상대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꽤 무리한 요구였다.

실력 있는 성기사들과 사제들은 각자 떠맡은 업무가 있으니.

하지만 이안은 아비게일이 거절하지 못할 거라는 걸 잘 알았다.

다른 무엇보다 이들에게는 이안의 목숨이 중요하니까.

“알겠습니다. 가능한 모든 인원을 차출하겠습니다. 아이벤의 영주와도 미리 얘기를 해놓고요.”

“단. 너무 눈에 띄지는 않게 해주세요. 황제가 눈치채고 타겟을 바꾸면 골치 아프니까.”

그 외 세부적인 사항을 모두 정리하자 제법 시간이 걸렸다.

이안은 기다리고 있을 일행을 생각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볼게요.”

“알겠습니다. 다음 연락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통신이 끊어지긴 전.

마지막으로 아비게일이 말했다.

“죽지 마십시오. 이안 님.”

***

도시 국가 아이벤에는 여러 이름이 있다.

용병 도시 아이벤.

최후의 보루 아이벤.

수호자들의 도시 아이벤.

아이벤에 이런 이름이 붙은 건 도시 지하에 지하 미로와 ‘지옥의 입구’라는 게 있기 때문이다.

이네스가 높게 솟은 성벽을 보며 설명했다.

[지형적으로 좋은 기운과 감정이 모여드는 곳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의 경우도 있기 마련이죠.]

전자의 장소는 보통 종교나 부족의 성소로 사용되게 된다.

후자의 경우, 사람들은 가급적 거리를 벌리고 가까이 가지 않도록 한다.

[그런 장소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거든요. 괴수도 더 자주 나오고. 하지만 아이벤의 경우는 좀 더 심했어요.]

‘그 장소에서 괴수들이 꾸역꾸역 기어 나온 거죠?’

[아시는군요?]

알다마다.

아이벤의 지하는 게임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괴수가 많다.

즉, 사냥터로는 안성맞춤이라는 얘기.

진행이 막히면 이안도 자주 방문했던 곳이다.

이네스가 마저 설명했다.

[아이벤의 지하에는 괴수가 끊임없이 튀어나오는 구덩이가 있어요. 사람들은 그곳을 가리켜 지옥의 입구라고 불렀죠. 하지만 그런 장소를 그냥 내버려 두니, 주위에 괴수들이 퍼져나가 큰 피해를 끼쳤죠.]

보다 못한 초대 아이벤의 영주는 뜻 맞는 기사, 마법사, 용병들과 힘을 합쳐 지옥의 입구 주위로 성을 쌓았다.

괴수들이 바깥으로 빠져나오지 않게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지하에는 미로를 건설했다. 괴수들이 함부로 빠져나오지 못하게.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위험하고 힘든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런 영주의 뜻에 감동한 사람들이 온 대륙에서 몰려와 그들을 도왔고, 결국에는 미로를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장장 200년에 걸친 공사 끝에 이루어낸 쾌거였다.

그랬던 지하 미로는 이제 용병들과 모험가들의 돈벌이 장소가 되었다.

괴수를 사냥하면 돈이 되니까.

[황제가 왜 아이벤을 노리는지 잘 알 것 같아요. 아이벤은 중요한 길목에 있는 요새고, 용병들도 아주 많으니까요. 전쟁을 벌일 생각이라면 아이벤은 엄청나게 골칫거리겠죠.]

공성전은 필연적으로 많은 자원을 소모하게 만든다.

괴수를 막기 위해 지어진 튼튼하고 높은 성벽은 제국의 병사들을 상대로도 유효할 것이다.

하지만 흑기사를 보내 도시를 궤멸시킬 수 있다면…… 쓸데없는 걱정이기도 하다.

“뭐해? 어서 들어가자.”

“어? 어어.”

플로라의 재촉에 이안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교단에서 준비해준 신분 덕분에 일행은 곧바로 성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와아. 괜히 용병 도시가 아니구나.”

창, 방패, 할버드.

저런 커다란 무기를 대낮의 길거리에서 당당히 들고 다니는 건 쉬이 보기 힘든 광경이다.

이곳이 용병을 우대하는 도시이기에 가능한 일.

‘용병이 엄청 많네. 대부분은 별거 없지만, 가끔 강자도 섞여 있어.’

아이벤에서 활동하는 이들만큼 경험 많은 용병은 드물었다.

그래서 그런지, 용병들은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며 길거리를 걸었다.

서로 무기가 부딪치면 시비가 붙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보통 싸움까지 가기 전에 경비대를 보고 자리를 떴지만.

미리 공부해왔는지 플로라가 설명해주었다.

“마을 안에서 용병끼리 싸우면 최소 추방이라던데. 일반인들을 다치게 하면 사형이고.”

“그래도 지킬 건 지킨다는 건가.”

거칠어 보이는 도시지만, 그래도 질서는 있었다.

이안은 일행과 함께 도시를 돌며 지형을 유심히 살폈다.

‘저기에 사제들을 배치해두고, 저 건물은 바리케이드로 쓸만하겠어.’

흑기사와의 싸움은 대규모 전투가 될 것이다.

인원을 어떻게 배치할지는 미리 계획해둘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시간을 들인 도시 구경을 끝내고.

싫증 난 얼굴의 플로라가 물었다.

“그래서. 흑기사가 올 때까지 뭐할 건데.”

“당연히 아이벤에 왔으면 할 건 하나지.”

“뭐?”

“아래로 내려간다.”

사냥 시간이었다.

***

용병 셋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미로를 달렸다.

“시발! 시발시발! 제노랑 아스피가 당했어!”

“저런 괴물이 왜 2층에서 튀어나오는 거냐고!”

“입 닥치고 달려!”

그들은 이 바닥에서 나름 잔뼈가 굵은 파티였다.

경력은 어림잡아도 10년 이상.

적어도 겨우 미로의 3층에서 이렇게 위기를 겪을 이들은 절대 아니었다.

무엇보다 경악스러운 점은, 그들이 무엇에 공격당했는지조차 알아채지 못했다는 점이다.

갑자기 주위가 암전되었고 정신을 차렸을 때 동료 둘이 당했다.

이런 일은 경험 많은 그들도 겪어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

추격자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엄청나게 많이.

하지만 희망은 있었다.

“조금만 서둘러! 이제 곧 계단이 나와!”

선두에 선 용병이 그리 외쳤다.

일단 미로를 빠져나가기만 하면 상관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추후에 생각해보면 될 일.

그렇기에 셋은 이미 체력의 한계에 다다른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그렇게 계단 앞에 다다르려던 그때.

갑자기 다른 용병 둘이 나타났다.

처음에 용병들은 기뻐했다.

도움을 청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아니면 미끼로 쓰던가.

하지만 용병의 얼굴은 곧, 경악으로 물들었다.

“제노? 아스피?”

죽었다고 생각한 동료가 앞에 있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응이 조금 늦어지고 말았다.

콰각!

갑자기 나타난 두 명은 달려오던 용병들을 단칼에 베어 버렸다.

용병들의 몸이 바닥에 허물어졌다.

“어…… 째서.”

한 용병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배신당한 눈빛으로.

하지만 습격한 용병은 대꾸 없이 다가와 머리를 내밀었다.

“서, 설마?”

콰드득.

고기를 뜯어 먹는 끔찍한 소리가 미로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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