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지하미로(2)
아이벤의 지하 미로는 총 6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층을 내려갈수록 더 강력한 괴수가 튀어나오는 구조다.
사실, 이안 일행의 실력을 생각하면 미로에서 튀어나오는 괴수는 그리 위협적인 상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또 아주 우습지는 않단 말이지. 샌드백용으로는 딱 적당해.’
이안이 괴수와의 전투를 통해 얻고 싶은 건 팀워크였다.
팀으로써 3명까지는 대충 눈치껏 싸워도 크게 걸릴 게 없었다.
하지만 4명부터는 얘기가 다르다.
서로의 능력과 기술을 숙지해야 하고, 동선을 미리 정해놔야 한다.
안 그러면 서로 간에 동선이 꼬이거나 기술이 잘못 엉켜 오히려 역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팀을 안 짜느니만 못한 효율이 나는 것이다.
‘실전을 겪으면서 호흡을 맞추고, 동료애도 다지면 좋겠지.’
흑기사와 싸우기까지 불과 얼마 안 남은 시간.
그 기간 동안 완벽하게 팀을 하나로 만들 수는 없을 거다.
하지만 이안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너희들 생각은 어때?”
이미 맘속으로 결정을 내린 상태지만 이안은 질문을 던지는 걸 잊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이안이 리더긴 하지만 팀원끼리는 수직적인 관계가 아닌, 동등한 관계니까.
가장 먼저 답한 건 플로라였다.
“좋아! 미로 탐색이라니 뭔가 좋네. 모험하는 듯한 기분이야!”
모험을 동경하는 플로라는 고민 없이 승낙했다.
그다음은 우마딜로였다.
“이 아래에서 불쾌한 냄새가 난다. 하지만 싸움을 피할 생각은 없다.”
아무래도 지하로 내려가는 게 썩 기껍지는 않은 눈치였다.
지하에서 풍겨오는 어두운 기운이 불쾌하게 느껴지는 모양.
하지만 앞으로 저것보다 더 불쾌한 적들을 상대해야 할 걸 알기에, 물러서지는 않았다.
마지막은 스텔.
“……응.”
여느때와 같은 한 박자 느린 긍정이었다.
모두의 동의를 얻은 이안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렇게 의견 통일이 잘 된다니.”
어쩌면 이 파티. 큰 무리 없이 합을 맞출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말 나온 김에 교단에 들러서 짐 풀고, 바로 내려가 볼까?”
“어? 곧바로?”
“아. 역시 좀 힘든가? 하긴, 여행이 좀 길긴 했으니…….”
“아니! 마침 마차 여행으로 몸이 근질거리던 참이었어!”
“나도 동의한다.”
“……응.”
“그러면 오늘은 1층만 적당히 훑어보자고.”
일행은 기분 좋게 걸음을 옮겼다.
왠지 기분이 가벼운 게, 앞으로 좋은 일만 있을 것 같았다.
***
“위, 위험해!”
“뜨겁다!”
“뭐 해요 스텔! 왜 멍하니 있어요! 어서 앞사람들을 보조해야죠!”
“……안 보여.”
개판.
지금 이 상황을 이것보다 더 직관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있을까?
이안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동료들을 지켜보았다.
‘어라? 왜 이렇게 된 거지?’
분명 의욕을 가지고 미로에 들어온 것까지는 좋았다.
미로를 탐험하며 모험 분위기에 즐거워하는 것까지도 좋았다.
문제는 몸이 불꽃에 휩싸인 개과 형 괴수가 나타났을 때다.
‘지옥견. 속도가 빠르고 몸이 날래지. 저 이빨이랑 발톱에 닿으면 화상을 입고. 엄청나게 날렵해서 죽이기 힘들다는 것만 빼면 우리에겐 그리 어려운 상대가 아니었는데…….’
이안은 천천히 상황을 복기했다.
전투의 시작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지옥견 다섯 마리를 향해 플로라가 불꽃 수십 발을 쏘아 보내면서부터였다.
“내가 할게!”
의욕적으로 외친 플로라는 완벽한 제어로 불꽃을 정확한 궤적으로 날렸다.
온 복도를 화염으로 뒤덮는 것도 가능했지만, 효율을 생각해서 그러지 않았다.
하지만 지옥견은 예상보다 더 날렵했다.
지옥견들이 일제히 산개하고.
날아오는 불꽃이 애꿎은 벽과 천장에 부딪혀 사그라들었다.
그때부터는 이안과 우마딜로의 차례였다.
“가자. 우마딜로.”
“알겠다.”
둘은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함께 앞으로 달려나갔다.
좁은 복도는 단둘만으로도 충분히 틀어막을 수 있어 후방에 적이 침투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래. 여기까지만 해도 몹시 순조로웠다.
지옥견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니 정사각형 모양의 방이 나오고.
그곳에 다른 지옥견 십여 마리가 기다리고 있던 것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문제는 플로라가 지원을 위해 화염 마법을 사용했을 때였다.
“도울게!”
자신만만하게 외친 플로라는 화염으로 만들어진 검을 쏘아 보냈다.
검은 이안과 우마딜로의 사이를 절묘하게 지나갔다.
하지만 플로라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이안과 달리 우마딜로는 화염에 내성이 없다. 아니, 오히려 우마딜로는 열기에 약한 편이었다.
“끄악! 뜨겁다! 무슨 짓인가!”
우마딜로가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굴렀다.
불의 검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우마딜로가 소환한 나무 넝쿨에 마저 불을 붙여 버렸다.
싱싱한 넝쿨은 수분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그 말은 즉, 불에 타는 순간 주위에 연기를 흩뿌리기 시작했다는 거다.
“윽! 매워.”
“콜록콜록.”
시야가 제한되고. 호흡이 곤란해진다.
그런 상황에서는 제대로 된 후방 지원이 힘들다.
그리고 그 빈틈을 괴수는 놓치지 않는다.
“컹!”
15마리의 지옥견이 혼란을 틈타 개떼처럼 달려들었다.
이안과 우마딜로는 졸지에 눈도 안 보이는 상태에서 적을 상대해야 했고, 심지어 몇몇은 둘을 돌파해 후방의 스텔과 플로라를 향해 달려갔다.
그렇게 해서 상황은 지금에 이른다.
“연기가…… 콜록콜록! 숨이 잘 안 쉬어지잖아!”
“……안 보여.”
“일단 벽으로 붙어서 싸우겠다 이안! 가까이 오지 마라!”
한 명 한 명 떼고 보면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들이 한군데 모이자 순식간에 바보가 되어 버렸다.
‘후우. 어쩐지 술술 풀린다 했어.’
한숨을 내쉰 이안은 일단 이 상황부터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안의 눈도 연기를 뚫고 주위를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미 날이 선 감각은 주위의 기척을 모조리 감지해냈다.
이안은 손을 뻗어 달려들던 지옥견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케, 켕?”
지옥견이 그르렁거리며 이안을 물어뜯으려 했지만, 피부에 이빨이 박히지 않았다.
마치 돌덩이라도 깨무는 듯한 느낌에 지옥견이 당황했다.
이안은 지옥견을 쥔 손을 힘껏 휘둘렀다.
쿵!
“켕!”
빠르게 날아간 지옥견이 동료와 부딪힌 뒤, 더는 일어서지 못했다.
‘일단 둘.’
이안은 곧바로 검을 휘둘러 달려들던 지옥견 둘을 베었다.
날렵한 놈들조차 피하기 힘들 정도로 빠른 검격이었다.
이안은 그대로 땅을 박차 뒤로 이동한 뒤.
스텔과 플로라에게 달려들려던 지옥견 마저 가볍게 처치했다.
급한 불을 끈 이안이 차분히 얘기했다.
“다들 당황하지 말고 진정해.”
큰 목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안의 목소리는 공간에 퍼져 동료들의 마음에까지 전해졌다.
그걸로 혼란은 끝이었다.
***
기진맥진해진 일행은 바닥에 주저앉아 호흡을 골랐다.
체력적으로는 크게 힘들지 않았지만, 마음이 지쳤다.
그만큼 방금의 싸움은 충격적이었다.
‘조금 헤맬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렇게까지 안 맞을 줄이야.’
다른 무엇보다 플로라와 우마딜로의 상성이 최악이었다.
“미, 미안했어요. 우마딜로. 평소 이안과만 합을 맞춰보니…… 제 생각이 짧았어요.”
“괜찮다. 처음이었지 않나? 처음에는 원래 다 그런 법이다. 다음부터 조심하면 된다.”
“혹시 마, 많이 아팠나요?”
“……그렇다.”
어지간하면 자존심 때문에라도 별로 아프지 않았다고 할 법한 우마딜로가 고개를 끄덕였고.
플로라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안 그래 보여도 여린 구석이 있는 플로라는 이 일을 계속 마음에 담아두고 미안해할 것이다.
‘게임에서는 대충 싸우게 시키면 됐는데.’
게임이었다면 그냥 지금처럼 해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어차피 플로라의 불꽃에 닿아 우마딜로의 피가 좀 깎이더라도 다시 치유하면 그만이었으니까.
게임 캐릭터에게는 감정이 없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역시 그러기 힘들겠지. 그러면 우마딜로를 뒤로 뺄까?’
우마딜로가 부리는 자연의 힘을 생각하면 지원가로서 후방에 배치하더라도 나쁘지는 않았다.
겸사겸사 스텔과 플로라를 지켜줄 수도 있고 말이다.
다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마딜로는 지원가로서의 역할과 근접 전투를 동시에 치를 수 있는 유연함이 장점이야. 뒤에 짱박아 둘 거면 굳이 영입할 필요가 없었어.’
문제는 스텔에게도 있었다.
평소, 멍한 인상과 달리 스텔은 전투에 들어서면 집중력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안과 단둘이 다닐 때는 굳이 지시를 내리지 않았는데, 이안의 시선만 읽어서 상황에 맞는 기적을 부릴 정도.
하지만 동료가 하나둘 늘고. 신경 쓸 게 많아지자, 스텔의 대응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좁은 시야와 멀티태스킹 능력의 부재.
[불과 얼마 전까지 좁은 방에 갇혀, 정적인 세계에서 살아온 아이니까요. 한 번에 여러 가지를 신경 쓸 일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그런 것치고는 혼란한 상황에서도 제가 필요할 때는 여전히 제대로 지원한단 말이죠.’
[그건…… 스텔이 이안에게만 집중하고 있어서가 아닐까요?]
‘음.’
그러고 보니 대수림에서도 스텔이 그 비슷한 말을 했던 것도 같다.
늘 이안을 신경 써 주는 건 고마워할 일이긴 하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
지금 이 파티는 파티라고 부르기도 민망하다.
오히려 서로가 발목을 잡고 있는 느낌 아닌가?
결심을 굳힌 이안이 말했다.
“오늘은 돌아가자.”
“뭐? 벌써? 좀 이르지 않나?”
“방금은 그저 실수였을 뿐이다. 나는 아직 충분히 더 싸울 수 있다.”
“……맞아.”
당황한 얼굴로 이안을 말리는 동료들.
그들도 내심 알고 있었다.
본인들이 얼마나 한심한 모습을 보였는지.
그렇기에 어떻게든 만회하고 싶어 하는 게 눈에 보였다.
‘그렇게는 안 되지.’
지금처럼 자존심 상해 있을 때가 변화하기에는 딱 적당하다.
이안은 다시 한번 말했다.
“돌아가자.”
“……알았어.”
“……알았다.”
“……응.”
시무룩해진 셋을 데리고 이안은 지상으로 올라왔다.
한데, 들어오기 전만 해도 한산하던 미로 앞이 이상하게 북적였다.
‘뭐지? 사람들이 북적일 시간은 아닌다.’
보통 용병들은 아침 일찍 미로에 들어갔다, 해가 질 때쯤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얼마 안가 해가 질 시간.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건 이상한 일이었다.
게다가 분위기도 심상치 않았다.
“이렇게 늦게까지 안 올 놈들이 아니야! 당장 구조대를 꾸려!”
“내 남편이 사흘째 안 돌아오고 있어요!”
“저 아래에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거라고!”
사람들은 경비병들한테 우르르 몰려들어 절박한 얼굴로 호소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이안 일행을 보며 외쳤다.
“사람이 나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었다.
그들은 이안에게 다가와 경비병에게 했던 일을 똑같이 되풀이했다.
“호, 혹시 아래에서 저희 남편 못 보셨나요? 갈색 머리에 오른뺨에 상처 자국이 있어요!”
“아래에서 아무 일도 없었나? 강한 괴물이 돌아다닌다던가!”
당황한 이안은 급히 말했다.
“저희는 1층만 잠깐 돌아보다 나왔습니다. 아무것도 몰라요.”
소란 속에서도 선명히 들리는 그 목소리에 사람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 그런가요…….”
“1층? 쳇. 신입들이었잖아. 겉만 보면 무슨 베테랑처럼 생겨서는.”
“착각하게 하지 말라고!”
난데없이 욕을 얻어먹은 이안은 어이가 없었지만, 굳이 입을 열지는 않았다.
사람들의 표정이 그만큼 절박했기에.
이안 일행은 눈치껏 사람들 틈을 해치고 빠져나왔다.
뒤에서 따라오던 플로라가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대, 대체 무슨 일인 거야. 아이벤에서는 흔한 일인가?”
“글쎄. 미로에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인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교단에 도착해서야 들을 수 있었다.
“아. 사람들이 몰려든 이유요?”
“예.”
“그게 말이죠…….”
잠시 머뭇거리던 사제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얼마 전부터 3층 이하로 내려가신 용병분들이 돌아오시지 못하는 일이 잦아져서요. 지하에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 하고…… 사람들 걱정이 많더라고요.”
말을 흐리던 사제가 이안에게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제 영웅이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겠군요. 허허.”
당연히 이안이 나서서 해결해줄 거라는 믿음은.
이안은 굳이 말을 꺼낸 게 후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