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77화 (178/222)

177. 지하미로(4)

‘말을 탄 미치광이 기사?’

심지어 말을 타고 지하미로를 달려 들어갔다 한다.

머릿속에 딱 떠오르는 인물이 한 명 있었다.

‘에이.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설마 그렇게 대책 없으려고…….’

그래도 혹시나 싶어 이안이 물었다.

“그 기사의 인상착의를 좀 알려주시겠어요?”

“음? 너무 빠르게 지나가서 제대로 못 봤는데? 자네는 기억나나?”

“나도 모르겠는데.”

벌써 알딸딸하게 취한 경비병들에게서 더는 얻을 정보가 없어 보였다.

‘음…… 뭐 나중에 또 소식이 들려오겠지. 이런 데서 죽을 사람은 아니니.’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나중에 또 물어보러 올게요.”

“하하! 형씨는 언제든 환영이야!”

“그때는 공짜로 알려주지.”

잠깐 혼자라도 미로를 들어갈까 고민했지만, 자칫 길이라도 잃었다가는 골치 아파진다.

결정을 내린 이안은 풀리지 않는 궁금증을 뒤로하고 교단으로 향했다.

***

이안은 이네스의 가슴을 향해 검을 뻗었다.

이네스는 유연한 몸놀림으로 검 끝을 피해낸 뒤, 곧바로 역으로 검을 뻗어왔다.

캉!

이안은 왼손을 뻗어 맨손으로 검날을 강하게 쳐냈다.

손에 붉은 실선이 그어졌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거목의 단단함’의 효과.

순간적으로 이네스의 몸이 흔들렸고, 이안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어 주먹을 뻗었다.

그에 대응해 똑같이 주먹을 뻗는 이네스.

주먹과 주먹.

다리와 다리가 수십 번씩 맞부딪히는 박투술이 이어졌다.

하지만 팽팽한 겉모습과 달리 실상은 이안이 일방적으로 유리한 교환이었다.

어머니 나무가 준 ‘거목의 뿌리’ 덕분에 대부분의 충격은 바닥으로 흘려보낼 수 있었으니까.

여러모로 이안이 유리한 조건이었다.

이안은 능력을 십분 활용하고, 이네스는 순수하게 검술로 싸웠으니.

하지만 그럼에도 이네스는 한 치도 밀리지 않았다.

이안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느끼지만, 진짜 괴물 같은 실력이야.’

그런 잡생각으로 이안의 집중이 흐트러진 아주 그 짧은 순간.

이네스가 눈을 빛내며 빈틈을 찌르고 왔다.

새하얀 검광을 두르고서.

‘이런!’

검광에 맞서기 위해서는 검광이 필요하다.

이안도 검광을 두르고 이네스의 검과 맞부딪혔다.

카가가각!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손에 전해지는 묵직한 압박감.

하지만 그 대치는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이안의 검광이 버티지 못하고 형편없이 으깨어졌다.

“호크!”

이안은 서둘러 호크를 소환해 주위에 환한 빛을 터트렸다.

하지만 강한 빛에도 이네스는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꿋꿋이 검을 뻗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안의 목에는 이네스의 검날이 닿아 있었다.

“졌네요…….”

“실력이 또 늘었어요. 훌륭해요. 이안.”

이네스는 제자의 성장이 대견한 듯, 만족스러운 웃음으로 그렇게 말했다.

정작 이안은 한숨밖에 안 나왔지만.

‘능력을 전부 써도 못 이긴다니.’

유리하게 싸움을 주도해갔다고 생각했다.

수를 교환하면서 점점 승리를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검광과 검광을 맞대는 결정적인 순간. 결국 이안은 패배하고 말았다.

검광이란 정신에서 우러나오는 힘.

이안도 그의 정신력이 아직 이네스에 맞서기에는 부족함이 많다고 생각했지만…….

‘설마 검광이 그렇게 빠르게 깨질 줄이야.’

이안은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검광을 사용하고 나면 언제나 지독한 정신적 피곤함이 몰려들었다.

“이래가지고 흑기사를 상대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이안답지 않게 약한 소리를 하네요.”

이네스가 드러누운 이안 곁에 살포시 앉아 표정을 살폈다.

“여전히 검광 때문에 고민인가 보네요?”

“예. 도무지 늘지가 않네요.”

이네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이내 툭 내뱉었다.

“지금 당장 검광의 양을 늘리는 건 힘들지도 몰라요.”

“역시 그렇겠죠?”

“그렇다면 검광을 좀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면 되잖아요.”

“……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이안에게 이네스가 설명했다.

“검광을 불이라고 생각해봐요. 정신을 연료로 타오르는 불꽃이요. 지금 당장 연료를 늘릴 방법이 없다면, 낭비되는 부분을 줄여야겠죠?”

이네스는 검을 들어 검광을 피워냈다.

넓게 펼쳐진 검광은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이게 이안의 검광이라면…….”

이네스가 정신을 집중하자 검광의 부피가 줄어들었다.

압축.

이네스는 검광을 최대한 압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 따라 압축된 검광은 좀 더 파괴적이고, 섬뜩한 빛을 뿜어냈다.

“이렇게 압축하는 것도 가능하죠. 어때요?”

“어려워 보이는데요.”

“맞아요. 쉽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이안이 검광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을 잡을 때까지, 굳이 조언하지 않았던 거고요.”

이네스가 이어 설명했다.

“플로라 양의 불꽃을 생각하세요. 그녀가 열기를 그러모으듯, 이안은 미세한 검광까지 전부 압축해서 사용해야 해요. 한 톨의 낭비도 없게.”

“……설명을 들을수록 더 어렵게 느껴지는데요.”

“그럼 동료들한테는 그런 과제를 내주고 혼자서 편하게 있을 생각이었어요?”

짓궂게 물어보는 이네스를 보며 이안은 말을 잃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저만 놀고 있을 수만은 없죠.”

“좋아요. 그럼 우선 검광을 아주 가늘게 실처럼 뽑아내는 것부터 연습하죠. 섬세함과 정교함을 배우기 위해서는 이것만 한 게 없어요.”

고개를 끄덕인 이안은 이네스의 조언에 따라 수련을 시작했다.

극심한 정신력 소모로 탈진할 때까지.

***

며칠 뒤.

사제가 이안을 찾아와 소식을 전했다.

“조사대가 꾸려졌습니다. 사흘 뒤에 미로로 들어간다고 하더군요.”

“빠르네요.”

“네. 유례없는 사태니까요.”

그 뒤로도 3층 이하로 내려간 용병들이 돌아오지 못하는 일이 계속되었다.

비율로 치면 절반 정도.

누구든 반반 확률에 목숨을 걸기는 싫은 법이다.

용병들은 더는 지하로 내려가지 않고 도시에 죽치고 앉아 있기 시작했다.

지금은 그저 상황을 지켜보자는 태도지만, 만약 사태가 길어지면 용병들은 하나둘 도시를 떠날 것이다.

“용병들은 아이벤의 경제를 지탱하는 한 축입니다. 그들이 떠나면 큰 타격이지요. 그래서 영주님도 마음이 급하신 듯합니다.”

“그렇군요.”

“이번 조사대가 상당히 중요합니다. 적어도 아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라도 알아 와야 해요.”

그렇게 말하는 사제의 마음 역시 꽤나 급해 보였다.

이번 조사대가 실패하면 용병들이 도시를 빠져나갈 수도 있다.

그러면 그만큼 교단에 헌금을 내줄 사람이 줄어드는 것이다.

이안은 한숨을 삼키며 사제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알겠습니다. 저도 조사대에 참여할 테니, 걱정 마세요.”

사제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그럼 영주님께도 그리 전해두겠습니다. 아. 동료분들도 함께하는 겁니까? 다들 분주해 보이시던데…….”

동료들은 지금 이안이 내준 과제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제가 한번 확인해보고,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 그렇다면 일단 그렇게 얘기해두겠습니다.”

용건을 마친 사제는 마음이 급했는지 어딘가로 서둘러 달려갔다.

홀로 남은 이안은 생각했다.

‘그럼 성과를 한번 확인해볼까.’

우선 처음은 스텔이었다.

이안은 종탑의 계단을 올랐다.

‘일단 열심히는 하고 있네.’

스텔이 거대한 종 옆에 쭈그려 앉아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기록하고 있었다.

얼마나 열중했는지, 이안이 다가온 것조차 모를 정도.

이안은 말없이 스텔을 관찰했다.

‘오른손으로는 글씨를 쓰고 왼손으로는 치유 기적을 사용하는 건가.’

이안이 시킨 그대로였다.

게다가 놀랍게도, 스텔은 상당히 능숙하게 작업을 수행하고 있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일일이 체크 하면서도 신성이 끊기지 않았다.

처음 스텔이 수련을 시작했을 때, 기적을 부리지 않고 지나다니는 사람을 기록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워하던 걸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

본인도 성장하는 게 느껴지니 꽤 기분 좋은 모양이었다.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린 스텔이 종이에 글자를 적어 내려갔다.

하지만 점심시간이 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길거리에 갑자기 행인들이 쏟아져 나온 것.

척 보기에도 스텔이 한꺼번에 세기는 버거운 사람 수였다.

‘과연 이 사태를 어떻게 대처할까.’

위기대처 능력이 필요한 순간.

이안은 스텔이 과연 어떻게 대처할까 궁금증이 일었다.

그리고 스텔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어?’

깔끔한 포기 후 잠시 휴식을 취한 스텔은 사람이 좀 적어지고 나서야 다시 기록을 시작했다.

어찌 보면 참으로 스텔다운 행동에 이네스와 이안 모두 당황했다.

[불가능한 걸 과감히 포기하는 것도 분명 미덕이긴 한데…….]

‘하다못해 시도라도 하지…….’

결국, 이안은 못 참고 스텔에게 말을 걸었다.

“얌마. 그냥 포기해 버리면 어떡해.”

“……?”

그제야 스텔은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언제 왔어?”

“조금 전에.”

“…….”

스텔의 뺨이 조금이지만 발그레 물들었다.

스스로도 자기 행동이 부끄럽긴 한 듯했다.

스텔이 작은 목소리로 항변하듯이 말했다.

“선택과 집중…… 이야.”

“말은 잘해요.”

이안이 엄하게 말했다.

“앞으로 과제는 방금 그 상황에서 제대로 셀 수 있게 될 때까지. 꼭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시도하는 것 자체가 의미 있으니까, 중간에 포기하지 말고. 알았지?”

“……응.”

조금 시무룩해진 스텔이 대답했다. 너무 엄하게 얘기한 게 아닐까 미안해진 이안이 말했다.

“그래도 예전에 비해 엄청 나아졌네. 고생했어.”

“응.”

그제야 기운을 되찾은 스텔을 뒤로하고. 이안은 종탑을 내려가 플로라와 우마딜로에게 향했다.

둘은 이안의 조언에 따라 함께 수련하고 있었다.

플로라는 불꽃을 피워내 열기를 제어하는 데에 집중했고, 나바혼은 그런 플로라의 마법들을 눈에 담았다.

이안이 다가가자 플로라가 마법을 거뒀다.

“왔어?”

“그래. 성과는 좀 있어?”

“당연하지!”

자신만만하게 외친 플로라를 향해 이안이 손을 뻗었다.

어서 결과를 보여달라는 듯.

“후우. 좋아.”

작게 심호흡한 플로라가 이안의 손 위에 불덩이를 하나 얹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덩이.

하지만 신기하게도 피부로 전해지는 온기가 전혀 없었다.

“성공했구나!”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그 순간. 불덩이가 활활 타오르더니 주위에 열기를 흩뿌렸다.

아무래도 뜨겁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려면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모양.

플로라가 머쓱하게 말했다.

“아직 습관화가 덜 돼서 집중이 좀 필요해.”

“실전에서는 써먹기 힘들다는 거네?”

“그렇지 뭐.”

“그래도 단기간에 엄청 늘었네. 솔직히 기대 이상이야.”

“흥. 그렇다면 나를 너무 과소평가했네.”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플로라의 재능은 늘 이안을 놀라게 했다.

물론, 그 뒤에는 잠까지 줄여가며 수련한 플로라의 노력이 뒷받침되어 있지만.

‘그럼 마지막은 우마딜로인가.’

이안이 고개를 돌리자 우마딜로는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

“플로라의 마법은 이제 얼추 눈에 익었다. 하지만 넝쿨을 어떻게 소환해야 할지는 잘 감이 안 잡힌다.”

“흠…….”

큰 진척이 없는 듯했다.

이안도 내심 우마딜로에게 너무 어려운 주문을 한 게 아닐까 계속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예상대로였던 듯하다.

이안이 말했다.

“음. 이 부분은…… 좀 더 고민해보자고. 일단 플로라의 마법의 위력이나 범위를 완벽하게 알아야 해. 그러면 어느 정도 답이 보일 거야.”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안 된다면, 어쩔 수 없다. 우마딜로의 능력 몇 개를 봉인하는 수밖에.

“알겠다. 나도 더 노력하겠다.”

우마딜로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가장 답답할 건 그였으니, 이안도 그저 고개만 끄덕인 뒤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어쨌건. 동료들은 훌륭히 이안의 요구를 따라오고 있었다.

아니면 따라오려고 노력하거나.

그런 그들의 모습은 새삼 동기부여가 되었다.

‘시켜놓고 저만 놀고 있을 수는 없죠.’

이안은 검을 들고, 검광을 얇게 뽑아내기 시작했다.

다시 미로로 내려갈 때까지 남은 시간.

동료들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안은 반드시 성과를 보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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