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78화 (179/222)

178. 지하미로(5)

날이 밝았다.

이안은 아침 일찍 일어나 사제들과 함께 미로의 입구로 향했다.

오늘은 조사대가 출발하는 날.

동료들이 따라가겠다는 의사를 밝혀왔지만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더 수련할 때야.’

결국, 조사대에 참여하는 건 이안 혼자로 결정했다.

동료들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이안의 결정에 따라주었다.

“이번 조사대에는 아이벤의 기사가 10명. 이안 님을 포함한 베테랑 용병들이 10명. 저희 교단의 사제가 5명 참여합니다.”

입구로 향하는 길에 함께 동행하는 사제가 빠르게 설명했다.

25명 규모의 조사대. 심지어 조사대에 속한 이들이 전부 고급 인력이었다.

“조사대장을 맡으신 분은 더글라스 경입니다. 당연히 누군지 아시죠?”

“누굽니까.”

“……도시의 수비대장입니다. 아이벤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기사이기도 하죠. 들어보신 적 없습니까?”

“네.”

“…….”

아무래도 도시에서는 나름 유명인인 듯했다.

이안은 처음 들어보지만.

‘그래도 수비대장씩이나 보낸다는 건 그만큼 영주가 이번 조사대에게 진심이라는 거겠죠.’

[그만큼 실패하면 큰일이겠지만요.]

얼마 안 가 이안은 사제들과 함께 미로의 입구에 도착했다.

이미 용병 아홉 명은 미리 와 기다리고 있었고, 기사들은 보이지 않았다.

베테랑 용병들은 이안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도 그럴 게, 웬 검은 머리가 사제들에게 둘러싸여 걷고 있지 않나.

용병들로서는 도무지 상황을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설명해 줄 필요는 없거니와 알아서 조심스럽게 대할 테니 이안에게는 나쁠 게 없었다.

그렇게 기다리길 잠시.

쇠 장화가 땅과 부딪혀 울리는 소리에 이안은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전신을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이 이곳을 향해 절도 있게 걸어오고 있었다.

이미 약속 시각은 지났지만 그들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이렇게 기다려주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눈치였다.

그중 선두에 선 회색 머리에 오만한 인상의 기사가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기회라 생각했는지 용병들이 앞다투어 인사를 건넸다.

“하하, 더글라스 경! 만나 뵈어서 반갑습니다!

“더글라스 경의 위명은 많이…….”

“엇.”

걸어오던 더글라스가 다짜고짜 검 손잡이를 잡으며 진한 살기를 뿜어냈다.

얼굴이 파랗게 질린 용병들이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더글라스가 경멸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함부로 손대지 마라. 다음부터는 경고 없이 베겠다.”

“죄, 죄송합니다.”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까칠한 반응이었다.

‘우리 조사대장님께서는 성격이 지랄 맞나 보네요.’

[의외로 기사들중에서는 흔히 볼법한…… 그런 인간상이긴 해요.]

용병들은 제치고 이쪽에 다가온 더글라스는 마치 다른 사람으로 변하기라도 한 듯.

온화하게 미소지으며 사제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사제님. 무탈하시죠?”

“다 더글라스 경과 기사님들이 언제나 도시를 지켜주기 때문이지요.”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 뒤, 사제가 슬쩍 이안의 눈치를 살폈다.

자연스럽게 더글라스의 시선도 이안에게 향했다.

처음 눈동자에 떠오른 건 아까와 마찬가지로 경멸의 감정.

사제가 급히 설명했다.

“제가 미리 말씀드렸던 그분입니다.”

“아. 이쪽이 그 교단의 손님이군요. 음…… 예상과는 조금 다른 인상이군요.”

말은 좋게 하지만 탐탁지 않아 하는 게 눈에 보였다.

이안은 그런 더글라스를 향해 대답 없이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고, 사제는 둘 사이에 끼어 안절부절못했다.

더글라스가 말했다.

“뭐가 됐든 자기 역할만 할 수 있으면 상관없겠죠. 실력은 교단에서 증명해 주었으니. 하지만 이 조사대의 대장이 나라는 사실은 잊지 마십시오. 제가 지시를 내리면, 당신들은 따를 의무가 있습니다.”

가장 높은 서열은 더글라스 자신이며, 이안과 사제들은 그 아래라는 것.

유사시에 지휘권이 갈리는 걸 미리 방지하는 것이다.

‘뭐, 굳이 내가 나서서 지휘할 필요도 없고.’

이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사제도 수긍했다.

서열 정리가 끝나자 더글라스가 모두에게 설명했다.

“조사대는 총 다섯 개의 팀으로 나눈다. 팀은 각각 거리를 벌려 미로를 탐사하다, 무슨 일이 생기면 다른 팀을 도와주러 가야 한다. 각 팀은 기사 두 명, 용병 두 명, 사제 한 명으로 이뤄질 것이며 팀장은 기사가 맡는다.”

미로의 통로는 좁다.

25명이 함께 뭉쳐 다녀봤자 제대로 싸우기도 힘들었다.

5명씩 5개 팀으로 쪼갠 건 지극히 옳은 선택이었다.

‘게다가 팀당 전력 배분도 적당하니, 다른 팀의 도움이 오기 전에 전멸하는 일도 없겠지.’

전략에는 별문제가 없었다.

설명을 마친 더글라스는 이어서 팀을 편성했다.

이안은 공교롭게도 더글라스와 같은 팀이었다.

‘의도된 건가?’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교단의 보증을 받았다 하나 그에게 있어 이안은 미지수.

그럴 바에 옆에 두는 게 가장 나을 터.

‘문제가 발생하면 자기 실력으로 어떻게든 커버가 가능하다는 거겠지.’

조금 재수 없는 놈이었지만, 이런 점은 꽤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조사 대장으로서 이번 조사를 성공적으로 끝내고 싶다는 의지가 느껴지니까.

그렇게 팀 선정이 끝나자 더글라가 지체없이 말했다.

“바로 들어간다. 우리가 앞장서겠다.”

더글라스는 팀에 속한 용병에게 눈짓했다.

“뭐하지? 어서 앞장서라.”

“아, 알겠습니다.”

베테랑 용병들은 짐꾼 겸 길잡이 역할을 맡았다.

실질적인 전투 담당은 기사와 사제이며, 용병들은 어디까지나 보조 개념이다.

더글라스의 서슬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용병이 허겁지겁 앞서나갔다.

그걸로 조사의 시작이었다.

***

지하 미로는 매일 그 구조가 바뀌며 바뀌는 구조의 규칙은 없다.

어떨 때는 입구에 들어가자마자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있을 때도 있고, 어떨 때는 입구의 정반대편에 위치한 경우도 있다.

결국, 어느 정도는 운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1, 2층에서 시간을 낭비할 생각은 없다. 다들 서두르도록.”

“넵!”

더글라스의 명령으로 다섯 개의 팀은 갈림길마다 갈라져 수색을 시작했다.

이안은 앞서가는 더글라스의 뒤에 한걸음 떨어져서 걸었다.

딱히 그가 할 일은 없었다.

이따금 지옥견이나 다른 괴수들이 튀어나왔지만, 더글라스와 기사의 검에 순식간에 두 동강이 났다.

이안은 그런 더글라스의 검격을 유심히 살폈다.

‘실력이 괜찮은데요. 강철기사단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요. 물론 기사단장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한 도시의 수비대장이니까요. 어쩌면 검광을 다룰 수 있을지도 모르죠.]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더글라스는 뛰어났지만, 검사로서 완성되었다는 느낌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적어도 2층까지는 이안이 나서지 않아도 된다는 것.

‘성격이 지랄 맞아서 자기 일도 다 떠넘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가 보네요.’

이런 걸 두고 귀족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어쨌건, 이안은 조용히 더글라스를 따랐다.

그렇게 약 네 시간의 탐사 끝에 조사대 중 한팀이 계단을 발견했다.

사제의 손에 들려 있던 연락용 아티팩트가 진동하자, 더글라스가 명령했다.

“입구로 돌아간다.”

지하미로의 입구에 조사대가 전부 모이기까지는 약 50분이 걸렸다.

한군데에 뭉친 조사대는 계단을 찾아낸 팀을 선두로 다시 나아갔다.

계단까지 가는데에 걸린 시간이 약 40분.

6시간이 채 안 되어 조사대는 2층으로 내려가게 된 셈이다.

이는 평균적으로 굉장히 빠른 축에 속한다.

하지만 더글라스는 만족하지 못했다.

“속도를 올려라. 어차피 2층까지는 별로 위험하지도 않다. 우리가 얼마나 빨리 문제를 해결하냐에 따라 도시의 운명이 걸려 있다.”

“옙!”

기합이 바짝 들어간 기사들이 경례를 올렸다.

이안이 보기에 너무 호들갑 떠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니까.’

게다가 알아서 열을 올려주면 이안이야 편할 뿐이다.

그렇게 조사대는 다시 흩어져서 2층을 훑었다.

1층과는 다른 종류의 괴수들이 덤볐지만 역시나 큰 위협은 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 이곳에 있는 전력이라면 4층까지도 별다른 어려움 없을 거다.

만약 돌연변이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더글라스와 그의 부관은 빠른 속도로 미로를 걸었다.

이따금 달려드는 괴수는 단칼에 베고 시선조차 주지 않는다.

이안과 사제는 그 뒤를 졸졸 따라가기만 해도 되었다.

오죽하면 사제가 이런 말을 했을 정도.

“제가 미로에 들어온 건 몇 번 안 되지만,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안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기사님들 발걸음을 따라가는 거 빼면 힘들 게 없네요.”

“그러게요. 용병만 불쌍하죠.”

용병은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조금만 꾸물거리면 더글라스가 죽일 기세로 노려보기 때문에 지금도 용병은 필사적으로 길을 찾고 있었다.

그런 이안의 건조한 반응에 사제가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이안 님은 괜찮으십니까?”

“뭐가요?”

“그. 몸이 근질근질하시다거나…….”

사제가 말을 흐렸다.

이안은 곧바로 사제가 왜 이러는지 알아챘다.

‘내심 내가 실력을 드러내 주길 바라는구나.’

이안은 현재 교단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사제가 이안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는 어느 정도 짐작해볼 만하다.

‘내가 무시당하는 게 싫겠지.’

이안을 대놓고 탐탁지 않아 하는 더글라스 앞에서 실력을 드러내고, 그런 더글라스에게 인정받길 원하는 것일 터다.

좀 더 영웅답게 행동하길 바라는 눈치.

‘하지만 뭐…… 굳이?’

알아서 다 해준다는데 굳이 나서서 힘 뺄 이유가 어딨는가.

이안은 사제의 은근한 눈빛에도 시치미를 뚝 떼고, 그저 더글라스의 뒤만 따라 걸었다.

그렇게 돌아다니다 보니 계단을 찾을 수 있었다.

걸린 시간은 총 일곱 시간.

1층에서보다 더 오래 걸렸지만, 2층이 더 넓다는 걸 생각하면 선방했다고 볼 수 있다.

더글라스는 회중시계를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반나절이라…… 나쁘지는 않군.”

그리고 고개를 들며 말했다.

“이제부터 3층이다. 용병들이 많이 실종된 곳이지. 아마 돌연변이 괴수가 있다면 3층에서 배회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용병들이 긴장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기사들의 표정은 평온했다.

아래 무엇이 있든, 상관없다는 자신감.

그런 결연한 모습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더글라스가 말했다.

“3층부터는 각 팀마다 거리를 최소한으로 두고 이동한다. 무슨 일이 생기면 당장 알리도록. 알겠나?”

“예!”

“좋아 그럼…….”

“아! 질문할 게 있습니다!”

용병 하나가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더글라스는 감히 용병 따위가 자신의 말을 끊은 게 몹시 불쾌한 눈치였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물었다.

“뭐지?”

“아래층에서 다른 용병들을 만나면 어떡합니까?”

미로에서 용병들끼리 마주치는 건 흔히 있는 일이며, 때에 따라서는 전투가 벌어지기도 한다.

꽤나 중요한 문제.

하지만 더글라스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일은 없다.”

“예?”

“요 며칠간 지하미로에 입장한 용병 중에 3층까지 내려갈 수 있는 이들은 없었다. 그전에 들어간 이들이 아직 살아있다고 보긴 힘들겠지.”

“그, 그렇군요.”

“그럼 잠시 휴식한 뒤, 곧바로 출발하겠다.”

“옙!”

조사대는 계단 앞에 앉아 건량과 빵으로 간단히 끼니를 때웠다.

식사를 하는 기사들은 도란도란 잡담까지 나눴는데, 그 모습이 너무 여유로워 보여 불안해하던 용병들도 진정할 정도였다.

물론 이들의 이런 모습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었다.

‘그럴만해. 보니까 실력도 제법 있고. 미로에서 겁먹을 만한 놈들은 아니라 이거지.’

이안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이 아래에 무엇이 있든 큰 문제 없이 해결할 거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일은 그저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날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이안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쳐다보았다.

온몸이 털이 곤두서는 이 기분. 초인에 들어서며 바짝 날이 선 감각은 왜인지 경고를 보내오고 있었다.

어쩌면 이 아래에 있는 게 마냥 쉽지만은 않을 거라고.

정말이지 껄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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