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지하미로(6)
“출발한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더글라스가 앞장서서 걷고, 그 옆에 선 용병이 서둘러 종이를 꺼내 지도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3층부터의 목표는 계단을 찾는 게 아닌, 미로를 조사하는 것.
조사대는 걸음을 늦추고 천천히 나아갔다.
“분위기가 뭔가 음산하군요. 기분 탓일지 모르겠지만.”
이안의 옆에 선 사제가 그리 말했다.
이안도 동의했다.
미로를 내려갈수록 불쾌한 감각이 피부를 타고 흘렀다.
하지만 이게 부정한 감정이 모이는 지하 미로 특유의 그런 분위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는 구별할 수 없었다.
‘일단 정신을 차려야겠어.’
이안은 감각에 집중했다.
혹여나 있을 불상사를 대비하기 위해.
미로는 여러 개의 커다란 방이 있으며, 그 방들 사이를 연결하는 길고 좁은 복도가 있는 식이다.
다섯 개의 팀으로 나뉜 조사대는 복도 한 개씩의 거리를 두고 쭉 일렬로 걸었다.
조사는 조용히 이루어졌다.
더글라스와 기사는 이따금 멈춰 서서 흔적을 조사했다.
그렇게 두 시간여를 긴장과 침묵으로 움직인 끝에 더글라스가 조사대를 멈춰 세운 뒤, 기사들을 불러모았다.
“이상하군.”
“맞습니다. 두 시간 동안 습격은커녕, 괴수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했습니다.”
“그것도 이상하지만, 시체의 흔적이 없는 것도 이상하다.”
실종된 용병의 숫자는 적지 않다.
만약 그들이 돌연변이 괴수한테 당했다면, 설령 시체는 뜯어먹혔을지언정 갑옷이며 무기 따위는 어딘가 남아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중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더글라스는 무언가 꺼림칙함을 느꼈다. 이는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
“어쩌면 저희 예상과 다른 적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일단 돌아가서 다시 대책을 생각하시겠습니까?”
“…….”
잠시 고민하던 더글라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 역시 신중을 기하고 싶었으나, 영주가 이 일에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 아는 터라 그냥 심증만으로 돌아가기는 곤란했다.
“좀 더 둘러본다. 먹이를 둥지로 모으는 습성을 가진 괴수도 있으니, 시체가 발견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
“알겠습니다!”
절도 있게 답한 기사들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이안은 생각했다.
‘실종된 사람은 어떤 흔적도 남기지 못 했다라…….’
왜인지 모르겠지만, 문득. 얼마 전 경비병들에게 들었던 얘기가 떠올랐다.
말을 타고 혼자서 미로에 돌진했다는 미치광이를.
하지만 이내 그 생각을 지워 버렸다.
‘누군진 몰라도 알아서 나오거나 했겠지. 애초에 혼자서 3층까지 내려왔을 리도 없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미로를 걸으면 걸을수록 이안의 감각이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마치 이곳에 무언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이씨. 그냥 동료들 다 데려올 걸 그랬나?’
새삼 후회되었다.
하지만 후회해봤자 의미 없는 일이기도 하다.
‘여차하면 사제들만 데리고 도망치면 되겠지.’
혼자서 도망치는 게 가장 편하지만, 교단에 받은 걸 생각하면 그 정도는 해주어야 했다.
그렇게 한 시간여의 조사가 더 이어졌고 진척은 없었다.
긴장된 상태를 유지하며 긴 시간을 움직였으니 조사대원들도 점점 지친 기색이 보였다.
이제 몇 시간 후면 미로의 구조가 변하는 시간.
작게 혀를 찬 더글라스가 지시했다.
“쯧. 계단으로 돌아가서 야영을 하겠다.”
미로는 매일 밤 그 구조가 변한다.
그렇기에 용병들은 시간이 되기 전에 미로를 빠져나오거나 계단으로 돌아간다.
만약 시간 안에 돌아가지 못하면, 미로의 어디에 떨어질지 모른 채 긴 시간을 헤매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
“계단으로 돌아간다!”
“계단으로 돌아간다!”
더글라스의 명령은 기사들의 복창으로 순식간에 뒤까지 전해졌다.
조사대는 방향을 틀었다.
최 후미에서 따라오던 팀이 자연스럽게 선두가 되어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제 좀 쉴 수 있겠다는 생각에 조사대의 용병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생각보다 많이 지쳤어.’
지상에서 움직이는 것과는 다르다.
지하미로는 사람의 정신력을 갉아먹는 그런 음습한 기운이 있었기에.
이안은 괜찮아도, 다른 이들에게는 재충전이 필요했다.
하지만 사고는 언제나 마음이 느슨해졌을 때 터지며, 맹수는 사냥감이 등을 보였을 때 달려드는 법.
가장 먼저 이변을 알아챈 이안이 뒤쪽의 복도를 보며 외쳤다.
“모두 준비해. 뒤에서 뭔가 온다.”
이안의 말에 더글라스도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텅 빈 복도만이 보일 뿐이었다.
“쯧. 아무것도 없잖아. 이런 식으로 방해하면 아무리 교단의 손님이라도…….”
“닥쳐봐. 저기 오잖아.”
“뭐?”
“이 무례한 놈!”
황당해하는 더글라스와 방방 뛰는 기사를 무시하며 이안은 검을 뽑아 들었다.
이안에게는 들렸다.
발바닥에 전해지는 땅의 진동이. 공기가 떨리는 미세한 소리가.
대규모의 적이 이곳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차라리 잘됐어.’
안 그래도 이 정체 모를 불안감 때문에 찝찝하던 참이었다.
차라리 적이 누군지를 확인한다면 속은 후련할 터.
이안의 그런 태도에서 뭔가를 느낀 듯, 더글라스와 기사도 복도 쪽을 유심히 응시했다.
그리고 이내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들을 듣고는 놀란 얼굴을 했다.
“맙소사. 진짜잖아.”
“……사냥꾼이라도 되는 건가? 귀가 좋군.”
적들은 이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지옥견을 비롯해 1, 2층에서도 나오는 괴수들과 3층에서만 나오는 쥐를 닮은 괴수.
그리고 그 사이에 섞여 있는 건…….
“사람?”
괴수들 사이에는 중무장한 인간들이 서 있었다.
기사의 의문에 더글라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사람이 아니다. 눈에서 붉은 안광이 흘러나온다.”
“그렇다면 저건…….”
“좀비? 구울? 어쨌든 언데드 괴수인 모양이군.”
죽음에서 되살아난 저주받을 괴수. 언데드.
더글라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봐 용병. 3층에서 원래 언데드가 나오던가?”
“제, 제 살아생전 지하 미로에 언데드가 나온다는 말은 한반도 못 들어봤습니다.”
“사령술사인가? 아니면 돌연변이 괴수에 의한 걸 수도 있겠군.”
더글라스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생각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눈동자에서 당황한 기색을 숨길 수는 없었다.
놀란 건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여기서 왜 언데드가 나와.’
지하 미로에서 어떤 괴수들이 나오는지. 어떤 돌연변이가 나오는지는 이미 머릿속에 전부 들어있다.
그리고 그중에 언데드는 없었다.
‘게임에서는 없는 이벤트. 더글라스 말대로 사령술사가 있는 건가?’
[아니면 지옥의 입구에 무언가 변화가 생겼거나요.]
하필 얼마 후 흑기사를 맞이해야 할 타이밍에 이런 일이라니.
참으로 공교로운 상황이었다.
‘이럴 거면 스텔을 데려올걸. 스텔의 신성이면 가볍게 녹여 버렸을 텐데.’
새삼 아쉬움을 느꼈지만, 이곳에도 사제는 있다.
더글라스가 다가오는 괴수들을 보며 지시를 내렸다.
“사제님.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사제가 빠르게 기도를 읊자 일행의 검에 은은한 빛이 서렸다.
신성을 두른 검은 언데드에게 치명적인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더글라스가 외쳤다.
“자! 모두 진형을 유지하며 계단까지 후퇴한다! 알겠나!”
“예!”
그 외침에 자극받은 듯, 괴수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조사대와 괴수들이 맞부딪혔다.
가장 먼저 달려든 건 상대적으로 약한 괴수들.
놈들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기사들의 검에 맥없이 쓰러졌다.
하지만 이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미끼 역할을 하는 것.
기사 하나가 괴수를 베느라 빈틈을 보인 사이.
언데드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그어어어!”
손에 든 건 철퇴나 워해머 따위의 둔기들.
판금 갑옷으로 중무장한 기사에게도 어느 정도 피해를 줄 수 있는 무기들이었다.
게다가 언데드의 움직임이 생각보다 빨랐다.
기사가 당황해 한 호흡 늦게 반응할 정도로.
“이런…… 어?”
기사는 뒤늦게 뒤로 빠지려다, 얼빠진 목소리를 흘렸다.
휘둘러져 오던 둔기들을 이안이 너무나 쉽게 붙잡아 버린 것.
그 뒤에 이안은 마치 어린애에게서 사탕을 뺐듯 언데드에게서 무기를 빼앗았다.
그리고 빼앗은 둔기를 휘둘러 언데드의 머리를 내리쳤다.
쿵!
언데드가 착용하고 있던 투구가 단 한방에 찌그러졌다.
당연하게도, 원래 투구란 게 이렇게 쉽게 찌그러지는 물건이 아니다.
기사가 경악했다.
“무, 무슨 이런 괴력이!”
이안은 곧바로 다른 언데드를 똑같은 방법으로 처리한 뒤 기사에게 말했다.
“계단까지 가려면 힘을 비축해야 해요. 정신 바짝 차리세요.”
“아, 알겠습니다.”
저도 모르게 존칭으로 말하는 기사를 뒤로 하고, 이안은 가볍게 성검을 휘둘러 다가오는 괴수들을 단칼에 베어냈다.
이 정도 상대는 이안에게 위협조차 되지 못했다.
“흥. 지금까지 실력을 숨기고 있었던 건가.”
더글라스 역시 이안의 실력에 조금 놀란 눈치였지만, 오만하게 말하고는 다시 싸움에 임했다.
조사대의 저력은 강했다.
베테랑 용병들의 실력도 뛰어났지만, 기사와 사제들이 함께하는 만큼 웬만한 괴수들은 공격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문제는 적의 숫자인가.’
여태껏 조용했던 건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고 말하기라도 하듯.
사방의 복도에서 괴수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약한 괴수라도 계속 상대하다 보면 지치기 마련.
기사라도 체력은 무한하지 않기에.
게다가 시간도 문제였다.
‘곧 미로의 구조가 변할 시기야.’
시간이 되면 미로는 방 단위로 완전히 구조가 뒤바뀌어 버린다.
제때 계단에 도착하지 못하면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다.
그 점을 잘 아는지, 조금은 초조해진 더글라스가 외쳤다.
“서둘러 나아가라! 진형을 유지해라!”
“예!”
대답은 우렁차게 했지만, 꾸역꾸역 밀려드는 괴수의 파도를 단기간에 뚫어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갑옷 따위로 중무장한 언데드는 죽이는 것 자체도 쉽지 않았다
게다가 어느 순간부터 적들 역시 점점 교묘하게 싸우기 시작했다.
방패를 든 언데드들이 기사의 전진을 막아냈으며, 심지어 몇몇은 화살까지 쏘아댔다.
도저히 괴수의 싸움이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정돈된 싸움이었다.
마치 누군가의 조종을 받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다 보니 전진 속도가 차츰 느려지기 시작했다.
최후미를 맡아 괴수를 막아내던 더글라스의 표정이 점점 더 썩어들어갔다.
‘똥 밟은 표정이구만.’
사실, 이건 더글라스의 무능이 불러온 결과는 아니었다.
설마 이런 일을 마주칠 거라고 과연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그저 운이 없었다고밖에.
이안은 그런 더글라스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었다.
“먼저 간다.”
“뭐? 감히 내 몸에…… 어디가!”
기함하는 더글라스를 뒤로 하고 이안이 앞으로 달렸다.
“어어! 저놈 뭐야!”
“왜 이탈하는 거야!!”
중간중간 마주친 다른 조사대원이나 기사들이 이안을 보고 당황했다.
몇몇은 이안을 붙잡으려 이내 옆에서 몰려드는 괴수들 때문에 그럴 겨를이 없었다.
이안은 조사대원과 괴수들을 통과해 곧바로 앞에 향했다.
‘난리도 아니군.’
최선두에는 뒤쪽보다 훨씬 더 많은 괴수들이 달려들고 있었다.
끊임없이 몰려드는 괴수들은 죽어서도 시체로나마 조사대를 저지하는 장애물이 되어 전진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그런 괴수들을 기사 둘과 용병 둘이 뚫어내고 있지만, 점점 힘에 부치는 게 눈에 보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전진은커녕 오히려 뒤로 밀려나게 될 상황.
이안은 주저 없이 등에 걸린 태양의 활을 손에 쥔 뒤, 호크를 소환했다.
빠르게 활에 모이는 빛.
이안은 기사와 용병들을 향해 외쳤다.
“옆으로 비켜. 죽기 싫으면.”
“뭐?”
기사들은 분노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감히 자신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저 건방진 놈에게 욕이라도 한 바가지 쏟아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
저 반짝이는 빛의 화살은 그들이 보기에도 너무나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들은 황급히 옆으로 피했다.
그와 동시에 이안이 시위를 놓았다.
콰아악!
섬광이 온 공간을 잡아먹었고, 뒤늦게 굉음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본능적으로 바닥에 웅크리고 눈을 질끈 감은 조사대가 게슴츠레하게 눈을 떴을 때…….
그들의 앞을 막아서던 괴수는 이제 없었다. 심지어 그 시체조차도.
이 상식을 뛰어넘는 화력에 모두가 경악하는 사이.
이안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제부터는 내가 길을 뚫는다. 그러니까 내 말 들어.”
기사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