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지하미로(7)
“이제부터는 내가 길을 뚫는다. 그러니까 내 말 들어.”
이안은 깔끔하게 비워진 복도를 향해 앞장서서 걸어 나갔다.
잠깐은 길이 비워졌지만, 금방 또 다른 괴수들이 밀물처럼 차오르고 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기사들은 그런 괴수들을 향해 거침없는 전진하는 이안의 모습에 당황했다.
“자, 잠깐!”
“누구 맘대로……!”
감히 자신들을 지휘하겠다니. 기사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일.
하지만 기사들은 곧 입을 다물었다.
앞서나가는 이안이 생각보다 너무 잘 싸웠기 때문이다.
샤아악!
한번 검이 번뜩이면, 괴수 십수 마리가 깔끔히 나가떨어졌다.
심지어 갑옷으로 중무장한 언데드도 이안의 절묘한 검술에는 채 두 합을 버텨내지 못했다.
이안이 앞장서자 전진 속도가 아까보다 거진 두 배는 더 빨라졌다.
따지려던 기사들은 서로의 얼굴을 슥 보더니, 이내 머쓱한 얼굴로 이안의 뒤에 따라붙었다.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이안의 뒤를 따르는 게 맞았다.
이안은 얼굴에 튀는 괴수의 피를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쯧. 여전히 너무 많네. 호크!”
“핍?”
“적당히 날아다녀.”
“핍!”
소환된 호크가 이안의 머리 위를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비행했다.
햇빛과 신성은 언데드의 천적.
비록 완전히 똑같이는 불가능해도, 이안은 호크를 이용해 태양과 비슷한 빛을 뿜어내는 법을 알고 있었다.
호크가 따스한 빛을 흩뿌리자, 언데드들이 주춤거리며 괴로워했다.
뒤따르던 사람들도 크게 놀랐다.
“빛의 정령?”
“정령을 다루는 검사라고?”
놀랄만했다.
정령사는 아주 희소한 이들이며, 빛의 정령은 더더욱 희귀했다.
그들은 이안의 교단의 중요한 손님이라는 말이 그저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 이후로 누군가 이안의 지시에 토를 다는 일은 사라졌으며, 기사들은 어떻게든 이안을 돕기 위해 분발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전진 속도는 빨라졌다.
하지만 상황이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끝이 없네요. 얼마쯤 남았죠?’
[이 페이스대로라면 앞으로 한 시간은 더 가야 해요. 미로의 구조가 바뀌는 시간까지는 2시간이 남았고요.]
‘1시간 여유인가요? 안심할 정도는 아니네요.’
조사 대원들의 체력을 생각했을 때 안심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이 괴수들을 부리는 게 누군지는 모르지만, 어떤 수를 쓰더라도 조사대를 지상에 돌려보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를 올려보냈다가는 끝장이니, 슬슬 승부를 걸어오지 않을까 싶은데.’
그 예상은 정확히 적중했다. 복도를 지나 다음 방에 들어섰을 때.
이안은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쾅!
땅을 울리는 충격.
이안이 서 있던 곳에 사람 키만 한 바위가 떨어져 있었다.
그 바위를 던진 대상을 본 용병이 경악해 중얼거렸다.
“도, 동굴 트롤? 5층에서나 가끔 나오는 놈이 대체 왜 3층에?”
거대한 체구를 자랑하는 외눈박이 거인.
녀석은 미로의 최상위 포식자 중 하나이며, 용병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저, 저놈을 상대하려면 피해가 너무 커집니다! 뒤로 돌아가서 다른 방으로 우회해야 해요!”
베테랑 용병의 제안은 타당했다.
동굴 트롤의 가장 무서운 점은 말도 안 될 정도의 맷집과 회복력이다.
한 번에 죽이지 않으면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나 용병들을 괴롭히는 괴물.
하지만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물러나면 시간에 못 맞춰.”
시간이 아슬아슬하다.
그렇다면 쓰러트리는 수밖에.
“내가 목을 베면 그때 따라와. 위험하니까.”
그렇게 말한 이안은 곧장 땅을 박차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지켜보던 이들이 아연한 얼굴로 말했다.
“서, 설마 혼자 싸우겠다는 거야?”
“동굴 트롤을 혼자서 상대하는 건 너무 무모해. 검광이라도 다룬다면 모를까…….”
“지금이라도 데려와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 무시무시한 동굴 트롤이 두렵기도 했거니와 왠지 이안이라면 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근거 없는 생각이 계속 떠올랐다.
그 와중에도 이안은 계속 달려나갔다.
동굴 트롤은 자신을 향해 빠르게 접근해 오는 이안을 보며 가소롭다는 듯, 콧김을 흥! 하고 내뿜었다.
동굴 트롤은 주위에 적당한 돌을 주운 뒤, 이안을 향해 힘껏 던졌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돌멩이.
하지만 이안이 놀란 건 다른 부분이었다.
‘뭐야. 의외로 폼이 제대로잖아.’
조금 어색한 부분은 있어도 마치 야구 투수가 던지는 폼과 비슷하다.
절묘하게 회전이 걸리는 공은 자칫 방심하면 그 궤적을 놓치기 십상이었다.
힘과 교묘함이 모두 깃든 돌.
하지만 이안의 눈을 속이기에는 역부족이다.
“흡!”
이안은 날아오는 돌을 낚아채 양손으로 쥔 뒤, 그대로 몸을 한 바퀴 회전해 손을 놓았다.
날아왔던 궤적 그대로 동굴 트롤에게 돌아가는 돌.
“크어?”
당황한 동굴 트롤이 팔을 뻗어 막으려 했지만, 돌의 궤적이 휘어 그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곧장 동굴 트롤의 얼굴에 날아들었다.
“크어어!”
돌이 부서지면서 그 파편이 튀었다.
그중 몇 개는 동굴 트롤의 눈동자를 찔러 들어갔다.
아무리 단단한 가죽이라도 눈까지 보호하지는 못했으니.
위기를 느낀 동굴 트롤이 양팔을 주위에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눈이 회복되는 동안 이안의 접근을 저지할 생각이었다.
이안은 고민했다.
‘피할까? 아니면 새 힘을 시험해봐?’
새로 얻은 ‘거목의 뿌리’로 어디까지 힘을 흘려낼 수 있을까.
고민은 짧았다.
이안은 제자리에 우뚝 선 뒤, 뻗어오는 트롤의 주먹을 향해 양팔을 내밀었다.
지켜보던 이들이 비명을 질렀다.
“꺄악!”
“피, 피해!”
무모해 보였다.
아무리 이안이 힘이 강하더라도, 저 트롤의 거구에서 오는 힘보다는 약할 수밖에 없으니.
금방이라도 이안이 저 거대한 주먹에 얻어맞아 곤죽이 되는 미래가 보였다.
이안도 가까워져 오는 주먹을 보며 내심 긴장했다.
‘위압감이 장난 아니네. 잘 안 되더라도 죽지야 않겠지만…….’
긴장될수록 이안은 하체를 낮추며 다리에 힘을 줬다.
마치 땅에 뿌리를 내리듯.
이윽고. 트롤의 주먹과 이안의 양손이 부딪혔다.
파앙!
뒤늦게 주먹이 만들어낸 바람이 이안의 머리를 흩트렸다.
지켜보던 사제는 급히 기적을 준비했다. 어떻게든 이안을 살려보기 위해.
하지만 사제는 이윽고 기도를 멈췄다.
“어?”
주먹에 부딪힌 이안은 밀려나지 않았다. 단 한 걸음도.
이어서 이안의 발아래에 충격파가 방출되었다.
가까이 서 있던 동굴 트롤이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을 정도의 충격파였다.
덕분에 상체가 낮아졌다.
이안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땅을 박차 힘껏 위로 뛰어올랐다.
검을 머리 위로 높이 들었다.
들어 올린 성검의 검날에는 하얀빛이 서려 있었다.
이안은 동굴 트롤의 목을 향해 검을 수직으로 내리쳤다.
검광은 어떤 저항도 없이 놈의 목에 파고들었고, 동굴 트롤의 억센 가죽이 부드럽게 갈라졌다.
얼마나 쉽게 베었는지, 소리마저 안 날 정도.
머리와 분리된 동굴 트롤의 몸은 잘렸다는 사실도 알아채지 못해 이리저리 허우적거리다 한 호흡 늦게 무너졌다.
쓰러진 트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아무리 뛰어난 재생력을 가진 트롤이라도 잘린 목을 이어 붙일 순 없었다.
뒤에서 멍하니 지켜보던 기사들이 물었다.
“검광까지……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타국의 기사단장이라도 되는 것입니까?”
지켜보던 사제가 헛기침했다.
“큼큼! 이분은 아주아주 중요하신 분입니다. 부디 그에 걸맞게 대해 주세요.”
“아, 알겠습니다.”
이안이 인정받았다 생각했는지 사제의 입꼬리가 위로 바짝 올라갔다.
이안은 기사들에게 부탁했다.
“오늘 이곳에서 있었던 일은 비밀로 해줘. 밖으로 나가서도.”
“아, 알겠습니다.”
아직은 스스로를 드러낼 타이밍은 아니었다.
기사들을 입단속 시킨 이안은 다시 전진했다.
동굴 트롤을 빠르게 처리했다 하나, 상황이 더 나아진 건 아니었으니.
게다가 이안이 빠진 조사대의 최후미가 쏟아지는 괴수들로 인해 고전하는 듯했다.
더글라스가 잘 막아주고 있지만…… 어서 빨리 앞쪽에서 길을 뚫어줘야 했다.
“다시 간다.”
“넵!”
이제는 이안이 지시를 내려도 이상하지 않게 여기는 기사들을 데리고 이안이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런 조사대를 괴수들이 몸을 던져가며 막아섰다.
이제 남은 시간은 불과 삼십 분 남짓.
이안은 쉼 없이 괴수를 베고, 베고, 또 베었다.
뒤따르는 기사들도 쉴 새 없이 검을 휘둘렀고, 잇따른 전투로 날이 무뎌지면 언데드의 무기를 뺏어서라도 휘둘렀다.
하지만 싸움이 격해질수록 이안이 우려하던 상황이 왔다.
조사대가 지치기 시작한 것.
이안 홀로 괴수들 사이로 뛰쳐들어가며 분투했지만, 속도가 느려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15분이에요. 하지만 고지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요.]
‘뒤쪽에 있는 팀까지 고려하면 더 서둘러야 해요.’
이안은 이미 온 힘을 다해 괴수들을 뚫어내고 있었다.
이 이상 속도를 올리는 건 힘들었다.
결국, 어떻게든 집중해서 길을 뚫는 수밖에.
그리고 그런 노력 끝에.
이안은 마침내 계단 아래까지 도착했다.
“도, 도착했다!”
그런 이안을 시작으로 조사대원들이 하나둘 계단에 다다랐다.
하지만 이곳에서 쉬고 있을 여유는 없다.
아직 뒤쪽의 팀들은 괴수들을 상대하고 있으니.
이안은 곧바로 뒤쪽으로 달려가 팀을 지원했다.
괴수와의 싸움에 힘들어하던 조사대원들은 이안이 합세하는 것만으로도 싸움이 훨씬 편해지는 걸 느꼈다.
‘단 한 사람이 왔을 뿐인데.’
‘혼자서 이렇게까지 활약하다니…….’
그런 감탄 어린 시선을 받으며 도와주다 보니 어느새 4번째 팀까지 계단에 다다랐다.
남은 건 더글라스가 속한 한 팀.
조금뿐이지만 시간에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문제가 발생하기 전까지는.
“브, 브라운 사제님이 다치셨다!”
“이대로 가다가는 더글라스 경이 시간 안에 못 올 것 같습니다!”
상황은 이랬다.
전투 중에 사제가 다리에 부상을 입어 버린 것.
게다가 격한 전투를 거치며 신성이 모두 고갈 나 버려 치료도 불가능했다.
의외로 더글라스는 그런 사제를 포기하지 않고, 등 뒤에 업고 달리고 있었다.
당연히 그 속도는 그리 빠르지 못했다.
‘씁. 그냥 버려?’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
하지만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이네스에게 보이기 부끄러운 모습이기도 했고, 교단이나 아이벤의 영주와 관계를 생각해서라도 저 둘을 살려야 한다.
당장 흑기사를 상대할 때 도움이 될 이들이고.
무엇보다…….
[여러 이유를 붙였지만, 그냥 이안의 마음이 그러고 싶은 거죠?]
“……저 재수 없는 놈도 사제를 버리지 않았는데, 제가 버리는 건 기분이 좀 그러네요.”
이안은 대답 없이 질주해, 더글라스와 사제가 있는 곳까지 순식간에 다다랐다.
더글라스와 사제가 눈을 부릅떴다.
“이안 님!”
“너……!”
“업히세요.”
“저는 이곳에 두고 두 분이라도 살아…… 억!”
이안은 대답도 듣지 않고 그대로 사제를 들어 등에 업고 달렸다.
불만 가득한 얼굴의 더글라스도 이번만큼은 순순히 이안을 따랐다.
사제를 업느라 이안에게 생긴 공백을 더글라스가 메우는 식이다.
그렇게 둘.
아니 셋은 빠르게 미로 안을 질주했다.
이안이 물었다.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나요?’
[40초! 이제부터 39초입니다!]
저 바로 앞에 계단이 보였다.
조사대원들은 긴장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슬아슬한데. 싸워서는 시간이 안 맞겠어.’
정말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인지, 남은 괴수들이 더더욱 맹렬히 이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모습을 냉정히 살피던 이안이 바닥을 박차 힘껏 뛰어올랐다.
밀려들던 괴수들이 높이 떠오른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이안은 그런 괴수들의 얼굴 위를 밟고 지나가기 시작했다.
팍! 팍! 팍!
마치 징검다리를 걷듯. 괴수들의 머리를 밟고 돌진하는 이안.
그 모습을 뒤에서 아연히 바라보던 더글라스도 똑같이 따라 하기 시작했다.
싸움을 포기한 둘의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가끔 무기나 발톱 따위가 피부를 스쳤지만, 지금의 이안에게는 간지러울 뿐.
이제 입구까지는 불과 10걸음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8초 남았어요!]
‘그 정도면 여유롭죠!’
마지막으로 이안이 괴수의 머리를 밟고 힘껏 날아오르려던 그때.
뒤에서 더글라스의 신음이 들렸다.
“으윽!”
무거운 판금 갑옷이 문제였다.
이안과 마찬가지로 괴수들의 머리를 밟다, 그만 괴수들의 틈에 파묻혀 버린 것.
더글라스는 이안보다 요령이 떨어지는 사람이었다.
“쯧. 하여튼 귀찮게.”
“……!”
혀를 찬 이안은 곧장 뒤로 가, 더글라스의 손을 잡고 잡아당겼다.
[5초 남았어요! 4, 3, 2…….]
초를 다투는 시각. 하지만 계단까지도 이제 불과 세 걸음이었다.
더글라스와 이안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네 달렸고, 계단 바로 앞까지 도착했다.
이안은 계단을 향해 발을 뻗었다.
‘도착했다!’
그리고 그 순간.
복도 벽에 박혀 있던 발광석이 일제히 그 빛을 잃고, 주위가 순식간에 어둠에 잠겼다.
시간이 되었다는 뜻.
그리고 다시 빛이 돌아왔을 때는…….
“뭐야.”
계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주위에 보이는 건 사방으로 뚫린 복도.
잠시 침묵하던 더글라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무래도 미로 구조가 변한 모양이군.”
결국, 그들은 시간에 맞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