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지하미로(11)
위층으로 올라간 이안 일행은 얼마 안 가 더글라스를 구하기 위해 3층을 배회하던 조사대와 마주칠 수 있었다.
더글라스는 그런 조사대를 엄하게 꾸짖었지만, 끝에 가서는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브라운 사제는 조사대의 다른 사제들에게 치유 받을 수 있었다.
조금만 늦었다면 정말 큰일 날 수 있었다고 다른 사제가 설명했다.
‘더 안 내려가길 잘했네.’
아직 찝찝한 기분이 좀 남았지만…….
미로 탐색은 나중에라도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조사대는 미로를 무사히 빠져나왔다.
부상당한 이들은 있지만, 전사자는 없었다.
이는 놀라운 결과였다.
그리고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었던 건 이안의 덕이 컸다.
더글라스도 그 점을 잘 아는지, 이안에게 말했다.
“네가 없었다면 이 사람들은 모두 꼼짝없이 죽어 언데드가 되었겠지. 이번 일에 대해서 영주님께서 후하게 보상하실 거다. 그리고 나 개인적으로도 감사를 표한다.”
“그래. 감사한 마음을 잊지 마라. 은혜도 꼭 갚고.”
“……알겠다.”
더글라스는 더는 이안의 건방진 말에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그와 이안 사이의 격차가 어느 정도인지를 잘 알았기 때문.
그런 둘에게 에스테반이 소리쳤다.
“자자! 어서 가자고! 나는 지금 술이 몹시 고프다!”
그렇게 외친 에스테반이 레이야드를 타고 먼저 달려나가 버렸다.
저 앞에 햇빛이 비쳐드는 출구가 보였다.
조사대는 그 모습에 감격에 젖어 웅성거렸다.
불과 미로에 이틀을 머물렀을 뿐인데, 마치 몇 년은 늙은 기분이었다.
에스테반을 따라 나가려는 이안에게 더글라스가 말했다.
“먼저 가 있어라. 나는 영주님께 우선 보고해야 한다.”
“어 그래. 술집은…… 알아서 찾아와.”
“그래. 늦을 수도 있다. 어쩌면 못 갈 수도 있고. 그때는 에스테반 경께 잘 설명드려라.”
“어차피 에스테반 경은 별로 신경 안 쓸 것 같은데.”
“……그것도 그렇군.”
더글라스는 쓴웃음을 지었고, 이내 조사대를 재정렬 시켰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에게 절도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런 세심한 부분 하나하나가 시민들에게 신뢰를 주는 법이죠.]
‘확실히 수비대장답네요. 실력은 조금 떨어져도.’
조사대는 들어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늠름하게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바깥에 서 있던 경비병들은 조사대와 더글라스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곧장 소식을 알렸다.
“조사대가 돌아왔다!”
“모두 살아 돌아왔다!”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주점에서 죽치고 앉아 있던 용병은 물론, 시민들까지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만큼 이번 미궁에서의 이변과 조사대의 파견은 아이벤에 중요한 사건이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도시 자체가 몰락해버릴 수 있었으니.
시민들은 조사대의 등장에 호기심을 빛냈고, 몇몇은 친우와 가족의 귀환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더글라스 경! 대체 미로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와! 케니 이놈 멀쩡히 살아 돌아온 거 봐!”
“여보!”
더글라스는 이안을 슬쩍 쳐다보며 물었다.
“지하에서의 일을 설명해야 하는데, 괜찮겠나?”
조사대의 성공은 결국 조사대장인 더글라스의 공이 되어버린다.
이안이 세운 공을 가로채는 모양이 되다 보니 더글라스는 신경쓰이는 모양.
이안은 괜찮다는 듯. 손을 휘위휘이 저었다.
“영주님한테나 잘 좀 말해줘.”
“알았다.”
승낙을 받은 더글라스는 오른팔을 들었다.
연이은 격전으로 팔에는 오물과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그 살벌한 몰골에 아우성치던 사람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더글라스는 담담히 설명했다.
“미로에서 비올라 해긴스라는 이름의 사령술사와 조우했다. 미로의 괴수를 조종하고, 죽은 용병들을 전부 언데드로 되살릴 정도로 막강한 적이었다.”
“…….”
침묵이 내려앉았다.
사람들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설마 지하 미로에 사령술사가 숨어들었을 줄이야.
그것도 실력이 아주 뛰어난 사령술사가.
그들은 이윽고 기대감을 담아 더글라스의 입을 쳐다보았다.
제발 그 입에서 그들이 원하는 대답이 나오길 기도하며.
그런 분위기를 읽고, 한차례 뜸을 들인 더글라스가 말했다.
“사령술사는 처치했다. 시체조차 남지 않았지. 그러니 이제부터는 안심하고 지하미로에 들어가도 된다.”
시민들이 원하던 바로 그 말.
함성이 터져 나오는 건 한 박자 뒤였다.
“와아아아!”
“조사대 만세! 더글라스 경 만세! 아이벤 만세!”
“당장 애들 모아! 바로 일하러 간다!”
축제를 연상케 하는 분위기.
그 모습을 내심 뿌듯하게 쳐다보던 이안은 이내 익숙한 얼굴들을 발견했다.
“이안!”
인파 속에서 팔짝팔짝 뛰며 손을 흔드는 빨간 머리.
그 옆에 무심한 얼굴로 선 나무를 닮은 사내와 무표정한 소녀.
언제 소문을 듣고 왔는지 동료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마중이라니. 이건 또 신선한 기분이네요.’
동료들은 인파를 헤치고 다가왔다. 사람들은 쉽사리 길을 터주려 하지 않았지만, 우마딜로의 완력에는 저항할 수 없었다.
“왔나 이안?”
“별일 없었어?”
“……치유해줄까?”
동시에 물어오는 동료들을 보며 이안은 피식 웃었다.
“별일이야 있었지. 안 다쳤으니 걱정 말고.”
하지만 스텔은 이미 치유 기적을 부리고 있었다.
우마딜로는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플로라는 미로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 죽겠다는 듯. 입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이안은 생각했다.
‘이틀 만에 보는 건데 왜 이리 반갑냐.’
그건 아마 미로에서 동료들이 없어 아쉬웠던 상황이 많았기 때문이다.
스텔이 있었다면 언데드 떼가 거슬리지 않았을 거다.
우마딜로가 있었다면 효과적으로 공간을 장악할 수 있었을 거고, 플로라가 있었다면 쉽게 적 들을 쓸어버렸을 거다.
있다 없으면 비로소 그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는 법.
그런 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던 이안에게 플로라가 새침하게 말했다.
“왜 실실 웃어. 기분 나쁘게.”
“아니다. 어서 돌아가자.”
이안은 동료들을 데리고 인파를 헤쳐나갔다.
에스테반이 어디 갔는지 굳이 찾을 필요는 없었다.
그도 그럴게, 신나게 달려나간 에스테반은 사람들의 함성을 듣고는 곧장 돌아왔으니까.
“하하하! 더 환호해라! 내가 바로 에스테반이다!”
인파 한가운데에서 레이야드를 타고 펄떡펄떡 뛰는 에스테반. 레이야드가 한번 튀어 오를 때마다 시민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 다녔다.
그런 에스테반을 보며 동료들은 한마디씩 뱉었다.
“뭐야 저 사람. 머리가 좀 아픈가 봐.”
“지혜로운 자는 저런 이들과 멀리하는 법이다.”
“……응.”
“…….”
참담한 평가에 이안은 말을 잃었다.
그때. 에스테반이 고개를 돌렸다.
명백히 이쪽과 눈이 마주쳤다.
“으으. 눈 마주쳤어. 혹시 시비 걸지는 않겠지?”
“이쪽으로 온다.”
에스테반이 인파를 해치고 이곳으로 오자 동료들이 질색했다.
“이안! 뭐 하는가! 시민들이 우리를 위해 환호하고 있지 않나! 근데 옆에 이 친구들은 누구지? 아는 사람인가?”
동료들이 일제히 이안을 쳐다봤다.
이안은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예. 그렇게 됐네요.”
***
술집.
에스테반과 이안, 그리고 동료들은 해후를 나누었다.
“하하하! 이쪽의 레이디가 설마 그 피에람의 가문의 여식이었다니! 이거 놀랍소!”
“저도 설마 화이트가드 가문의 유명인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플로라는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답했다.
“이쪽은 자그마한 몸에 엄청난 신성을 몸에 품고 있군! 이런 자그마한 몸에!”
“……작다고 하지 마.”
스텔은 눈매가 아주 조금 사나워졌다.
“그리고 이쪽은 숲의…… 숲의……!”
“숲의 종족. 그냥 우마딜로라 불러라.”
“그래! 숲의 종족이군. 이거, 아주 재밌는 친구들이랑 다니는구만. 스콰이어 이안 자네가 부러울 정도야. 진심으로!”
연거푸 술을 들이마신 에스테반은 흥이 올라 떠벌댔다.
정작 듣고 있는 동료들은 에스테반의 침이 음식에 다 튀는 걸 차가운 눈으로 보고 있었지만.
플로라가 이안에게 귓속말했다.
“스콰이어라니. 저거 진짜야?”
“어.”
“네가 누구 종자 노릇하는 게 상상도 안 되는 데…… 그것도 저런 사람이랑. 아니. 저런 사람이니까 오히려 더 잘 맞는 건가?”
이안은 과거에 에스테반과 있었던 일을 적당히 설명했다.
그와 어떻게 만났는지, 그리고 에스테반이 무얼 해주었는지도.
플로라가 그제야 상황이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이안에게는 스승 비슷한 거구나?”
“그렇게도 볼 수 있지. 일단 은인이기도 하고. 내가 코르디스 입학할 때 화이트가드의 문양도 선뜻 내주었으니까.”
에스테반은 이안에게 있어 그 의미가 남다른 인물이다.
게임에서는 꽤 좋아하던 캐릭터이며, 이곳에서는 어쩌면 처음으로 친절을 베풀어준 인물.
그리고 게임에서 에스테반은 반드시 죽는다.
어쩌면 그 무모한 성격을 생각하면 당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거야.’
게임에서는 살리지 못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라면. 이미 많은 게 변한 이곳에서라면 살릴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보다 에스테반 경은 많이 유명한가? 귀족들은 거진 다 알고 있는 눈치던데.”
“……유명하다마다. 그 화이트가드 가문의 장남이잖아? 심지어 최연소의 나이로 강철 기사단에 들어가, 다음 기사단장 후보로 거론된 두 사람 중 한 명이었거든. 그런 사람이 갑자기 미쳐가지고는 대륙을 떠도니, 소문이 돌 수밖에.”
이제 들으니 제법 화려한 경력이긴 하다.
확실히. 귀족들 사이에서 소문이 돌지 않는 게 이상하다.
공부 잘하던 똑똑한 모범생이 갑자기 뒤늦게 사춘기가 온 셈이니 말이다.
다만, 이안이 신경 쓰인 건 다른 부분이었다.
“근데 기사단장 후보가 두명이었다고? 에스테반을 빼고 그 급의 인재가 한 명 더 있다는 건데…… 이번에 강철 기사단에 그 정도 인재는 없었는데.”
“아…… 뭔가 사고에 휘말려서 목숨을 잃었다나 봐. 그 부분은 자세히 모르겠네.”
“그래?”
어쨌든 에스테반에 대해 좀 더 알게 되었다.
이렇게 단서가 쌓이다 보면 에스테반에 대해서 이해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니.
이안은 에스테반이 단순히 미치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광기는 진짜이지만, 그게 에스테반의 본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딱히 근거는 없고, 어디까지나 이안의 감에 지나지 않지만…….
이안과 플로라가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 이미 술자리는 무르익고 있었다.
에스테반은 다른 이들에게 거침없이 술을 권했다. 스텔은 진작에 기절.
잔뜩 취한 우마딜로와 에스테반은 서로 누가 주량이 센가 내기하고 있었다.
“하하! 나무 친구! 제법 하는구만!”
“너도 마찬가지다.”
의외로 둘은 죽이 잘 맞았다.
내심 에스테반의 주정을 받을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리던 이안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기본적으로 좋은 사람이니, 다른 동료들이랑도 잘 지낼 거야.’
문득.
이안은 그런 생각을 했다.
에스테반을 동료로 들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레아의 자리는…… 솔직히 에스테반이 대체 가능해.’
애초에 처음 동료 후보를 고를 때는 철저히 성능 위주로 선별했다.
게임에서 죽는 게 정해져 있는 에스테반은 후보군에 있지도 않았다.
에스테반이 살기 바랐지만, 속으로는 막연히 그게 힘들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이안은 게임에서 정해진 시스템을 뒤엎을 생각이었다.
‘당장 검광을 다룰 정도에 재능도 남달라. 조금 막무가내지만 말을 하면 안 듣는 성격도 아니고.’
무엇보다 에스테반은 이안이 제안하면 거절하지 않을 거다.
아니. 오히려 받아주지 않더라도 따라나서겠다고 고집부릴 것이다.
악마를 토벌하는 건 에스테반이 꿈꾸는 위대한 모험 그 자체였으니까.
‘그렇다면 레아는…….’
하지만 레아 역시 포기하기에는 아까운 인재이기도 했다.
미리 말을 해 놓은 것도 있고.
그렇게 이안이 속으로 고심을 거듭할 때.
술집의 문이 열리며 판금 갑옷을 입은 기사가 들어왔다.
얼굴을 볼 것도 없이, 더글라스였다.
“왔냐?”
이안이 손을 슬쩍 흔들자 더글라스가 걸어왔다.
그러고는 이안 앞에 서며 말했다.
“이안. 그리고 에스테반 경. 영주님께서 뵙자고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