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85화 (186/222)

185. 방어전

“영주님께서 뵙자고 하신다.”

이안이 되물었다.

“지금?”

“시간이 나는 대로.”

“나 혼자는 아닐 테고…….”

“물론, 에스테반 경도 함께다. 영주님께서 꼭 직접 만나 감사를 표하고 싶으시다는군.”

“흐음.”

이 정도는 예상했다.

이안과 에스테반이 세운 공이 워낙 컸으니.

게다가 검광을 다룰 줄 아는 실력자는 대륙 전체를 봐도 그리 많지 않다.

‘이 기회에 안면을 트고 싶다는 건가?’

어쨌거나 거절할 이유는 딱히 없었다. 애초에 한 번 만나 봐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다만 지금은 조금 힘들 것 같네.”

이안은 만취해서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는 에스테반을 가리켰다.

“영주님 앞에 데려다 놓으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겠거든. 시간 나는 대로 보러 갈게.”

“알았다. 그럼 영주님께는 그리 전해두겠다.”

더글라스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걸어 나갔다.

이안이 물었다.

“그래도 이렇게 왔는데 술이라도 한잔하지?”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이번 사건으로 처리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군.”

“수비대장님은 공사가 다망하시네.”

이안은 더 권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냥 던져본 말이기도 하고.

다만, 고개를 슬쩍 돌린 더글라스가 이내 이쪽으로 걸어오더니 커다란 술잔을 집어 들었다.

그제야 더글라스의 방문을 알아차린 에스테반이 외쳤다.

“오오! 왔군!”

“한 잔만 하고 가겠다.”

더글라스는 술잔을 들더니 그대로 꿀꺽꿀꺽 전부 한입에 마셔버렸다.

입가에 묻은 거품을 닦아낸 그가 중얼거렸다.

“업무 중에 술을 마시는 건 오랜만이군.”

“그래도 돼?”

“이런 날 술을 한잔도 마시지 않으면 기사라고 할 수 없겠지.”

“하하하! 잘 말했다 더스트!”

“……더글라스입니다. 에스테반 경.”

한숨을 내쉰 더글라스는 고개를 까딱인 뒤, 주점 밖으로 걸어 나가 버렸다.

그 갑작스러운 등장과 퇴장에 떨떠름하게 있던 플로라가 이안에게 물었다.

“그래서? 영주를 보러 갈 거야?”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야지. 할 얘기가 있거든.”

***

쇠뿔도 단김에 빼란다고.

밝자마자 이안은 우선 교단에 이번에 있었던 일과 영주성에 간다는 걸 보고했다.

그다음에는 에스테반이 묵고 있는 싸구려 여관으로 했다.

만취한 에스테반은 방 안으로 들어가지조차 못했는지, 마굿간에서 레이야드를 껴안고 함께 자고 있었다.

이안은 에스테반을 깨운 뒤 우물물을 길어다 그가 씻을 수 있게 배려해주었다.

‘이러니 꼭 종자가 된 것 같네.’

이안은 에스테반이 대충 세수를 마치자 그를 끌고 큰길로 나왔다.

안장에 걸터앉은 에스테반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앓는 소리를 했다.

“으으. 머리가 쪼개질 것 같군.”

“그러게 적당히 좀 드시지 그랬어요.”

“적수가 너무나 강했다. 어떻게 사나이가 뒤로 물러설 수 있겠나?”

우마딜로와의 술내기를 말하는 듯했다.

“그래서. 누가 이겼는데요?”

“당연히 내가 이겼다! 아마도.”

“……기억 안 나시는 거죠?”

“그래. 하지만 분명 내가 이겼을 거다.”

우마딜로에게 물어보면 분명 다른 답이 나오겠지만, 이안은 그러려니 했다.

그렇게 가을 아침의 선선한 공기를 만끽하며 걷던 둘은 곧 영주성에 다다랐다.

아이벤의 영주성은 두껍고 잘 설계된 성벽으로 보호받고 있었다.

애초에 지하 미로로부터 바깥을 지키기 위해 지어진 요새다.

그 튼튼함 만큼은 의심할 나위 없었다.

이안과 에스테반이 도착하자 얼마 안 가 자기를 영주가 사는 저택의 집사라고 소개한 초로의 신사가 마중 나왔다.

집사는 정중히 인사했다.

“이안 님. 그리고 에스테반 경 맞으시죠? 이렇게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음! 나도 반갑소.”

“바로 안내하겠습니다.”

노인은 앞장서서 걸었다.

이안은 노인의 걸음걸이나 자세를 유심히 살폈다.

‘잘 단련된 흔적이 보이네요. 기사 출신일까요?’

[아마도 그럴 것 같네요.]

노인은 허리에 검을 하나 차고 있었다.

얼핏 모양만 봐도 예식용 검이 아닌 걸 알 수 있었다.

‘뛰어난 검사를 집사로 쓰는 영주라…….’

왠지 그 성격이 짐작되었다.

이안은 집사를 뒤따르며 성 내부를 구경했다.

바닥에는 반질반질한 돌로 길이 나 있었고. 주위에는 심플한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다만, 정원에 시야를 가릴만한 나무나 키 높은 덩굴이 없는 건 인상 깊었다.

뭐랄까. 오로지 방어라는 측면에 엄청 신경을 썼다는 게 느껴졌다.

안뜰 한편에 마련된 연무장에서는 기사들이 훈련을 하고 있었다.

더글라스의 지도 아래에 둘씩 나뉘어 대련하고 있었는데, 실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맹렬하게 싸웠다.

이따금 피가 튀거나 뼈가 부러졌지만, 그들은 더글라스가 멈추라고 하지 않는 이상 싸움을 계속했다.

그 모습에 에스테반도 감탄했다.

“음! 확실히 아이벤의 기사들은 수련에도 최선을 다하는군. 강철 기사단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어.”

“하하. 매일같이 저런 훈련을 하고 있답니다. 저희 기사들이 이 근방에서는 최고로 평가받는 비결이지요.”

집사가 뿌듯하게 설명했다.

대륙 제일의 기사단 출신인 에스테반의 칭찬이 퍽 기쁜 모양이다.

그러던 와중에 더글라스와 시선이 맞았다.

더글라스는 고개를 꾸벅인 뒤, 다시 지도를 시작했다.

‘꽤 의욕이 넘치는데요.’

[어쩌면 이번 일로 무언가 느끼는 게 있었을 수도 있겠죠. 검광을 다루는 검사를 둘이나 만났으니까요.]

이안과 에스테반과의 만남이 더글라스의 열정에 불을 붙였을 수도 있다.

더글라스 역시 실력 있는 검사였으니. 그 역시 언젠가는 검광을 사용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할 수도 있다.

걷다 보니 어느새 저택 앞이었다.

집사는 레이야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말은 저희가 마굿간에 데려가겠습니다.”

“조심히 다루시오. 레이야드는 화가 나면 참지 않는 성격이거든.”

“……명심하지요.”

집사는 하인을 한 명 불러, 레이야드를 데려가도록 했다.

레이야드는 슬쩍 에스테반과 시선을 교환한 뒤 순순히 마굿간으로 향했다.

그 뒤. 집사는 저택으로 둘을 데려갔다.

저택 역시 아름다움보다는 실용적인 면을 중점으로 지어진 듯한 인상이었다.

복도에는 그 흔한 그림 한 점이 없는 대신, 여러 병장기가 전시되어 있었다.

‘귀족가보다는 무가(武家)에 더 가깝네요.’

응접실로 둘을 안내한 집사가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렇게 말한 집사가 다시 돌아오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급하게 뛰어온 듯한 모습의 영주가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둘 다 반갑소!”

아이벤의 영주는 웬만한 기사들보다 몸이 더 단련된 사내였다.

짧게 깎은 짙은 금발의 머리와 날카로운 눈빛은 왜인지 군인을 연상케 했다.

이안과 에스테반이 자리에서 일어나 마주 인사하자, 영주는 다시 앉으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얘기는 더글라스 경에게 많이 들었소! 둘 다 검광을 피울 줄 안다더군?”

당연히 미로에서 활약한 걸 먼저 말할 줄 알았던 이안은 조금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아, 예. 그렇죠.”

“에스테반 경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들어왔소. 검을 쥐는 자에게 화이트가드 가문의 젊은 천재는 너무나 유명하니.”

“음! 내가 좀 천재긴 하지. 젊기도 하고.”

신기한 듯 에스테반을 쳐다보던 영주는 이번에는 이안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근데, 검광을 다루는 검은 머리 검사라니. 들어본 적도 없소. 당신은 대체 누구시오? 듣기로는 교단의 손님이라는데.”

영주는 탐색전이고 뭐고 없이 거침없이 찔러 들어오는 타입이었다.

이안은 적당히 받아쳤다.

“이안이라고 합니다.”

“이름을 물어보는 게 아님을 그대도 알지 않소?”

“제 정체에 대해서는 말할 기회가 금방 올 겁니다.”

“정체? 이안. 혹시 뭔가 숨기고 있는 거라도 있나?”

옆에서 어리둥절한 얼굴로 에스테반을 무시하며 이안이 이어 말했다.

“그냥. 지금은 교단이랑 좀 친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끄응. 어쩔 수 없지. 알겠소.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해주시오.”

별수 없다 여겼는지 영주는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지하미로에서 크게 활약하셨다고 들었소. 덕분에 기사들과 더글라스 경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소. 부디 제가 보답하게 해주시오. 원하는 게 있으시오?”

“나는 됐소. 애초에 보답을 바라고 한 일도 아니고.”

에스테반은 깔끔하게 거절했다.

“역시. 듣던 대로 명예로운 분이시오. 그럼 아이벤에 머무실 동안은 제가 계속 대접해드리겠소.”

“됐다니까 그러오.”

“이 정도도 하지 않으면 제가 주위에 욕을 먹소. 부디 저를 생각해서라도 호의를 받아주시오.”

그렇게까지 말하자 에스테반은 별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영주는 몹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면 엄청나게 싸게 먹힌 것이다.

그들의 공을 생각하면 금화를 궤짝으로 가져와도 모자랄 테니.

영주가 이번에는 이안을 보았다.

“그대는 어떻소. 뭐든 말해보시오.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든 해드리리다.”

“뭐든지 말이죠?”

“하하. 그렇게 말하니 조금 무섭군. 대체 뭘 말하려고 그렇게 겁을 주는 것이오?”

넉살 좋게 웃는 영주를 보며 이안은 잠시 뜸을 들였다.

농담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는지 이내 영주의 입꼬리가 내려갔다.

이안이 본론을 꺼냈다.

“머지않아 이 도시는 공격당할 겁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영주가 눈매를 좁혔다.

“공격이라…….”

살짝 말을 흐린 영주는 이안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이어 말했다.

“텔 왕국을 말하는 거요? 분명 우리는 지금 왕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지만, 이곳은 전선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이요. 게다가 아이벤은 난공불락으로 유명한 요새요. 잇따른 사건으로 전쟁이 사실상 소강상태인 지금, 어떻게 이곳이 공격당한다는 거요.”

이안은 검지를 들어 위쪽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북쪽에 있지 않습니까. 그럴만한 사람들이.”

“……제국을 말하는 것이군. 하지만 머지않아 겨울이오. 겨울에 공성전을 벌이는 건 아무리 제국이라도 무리요.”

영주의 말은 지극히 상식적이었다.

하지만 가끔, 상식의 틀 바깥에 있는 존재도 있기 마련이다.

이안이 물었다.

“겨우 그겁니까? 안전하다고 여기는 이유가?”

“……더 무엇이 필요하오.”

“아까 영주님께서 말했던 그 잇따른 사건이 뭡니까.”

전쟁이 소강상태인 이유.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건 흑기사의 왕국 습격이다.

그런 막강한 적이 언제 떨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그 두려움 때문에 각 세력의 통치자들은 전선에 나간 정예병력을 대거 후방으로 돌렸다.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자기 목숨이기 때문.

영주가 중얼거렸다.

“……흑기사를 말하는 거군.”

“예. 흑기사가 이곳에 떨어질 겁니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곧이겠죠.”

영주가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잘 이해가 안 되는군. 대체 왜 흑기사가 이곳에 온다는 말이오.”

“제국이 전쟁을 일으킬 때, 가장 거슬릴 게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죠.”

“……지금 그 말은 제국에서 흑기사를 다룬다는 뜬소문이 사실이란 말이오?”

“교단에서는 그렇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일부러 교단의 권위를 내세웠다.

이미 영주는 이안이 교단의 예배당에 거주하며, 진짜로 중요한 위치라는 걸 파악했을 거다.

그런 이안이 말하니만큼 허튼소리일 확률은 적을 터.

이안은 골치 아픈 얼굴로 생각에 잠긴 영주를 향해 말했다.

“곧 교단의 실력 있는 사제와 성기사들이 올 겁니다. 저희는 이곳에서 반드시 흑기사를 막아낼 겁니다. 더 피해가 커지기 전에 말이죠.”

“…….”

“교단 입장에서는 아이벤을 포기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하지만 굳이 그러지는 않았죠. 그 점에 대해서 영주님께서는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안은 마치 이게 교단의 뜻인 양 은근한 압박을 가했다.

이제 영주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달은 듯.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렸다.

“검광을 쓰는 실력자 둘이 왜 이런 시기에 찾아 왔는지 의아했는데…… 흑기사를 상대하기 위해서였군.”

에스테반은 사실 그저 우연에 불과했지만, 이안은 모른 척했다.

영주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그래서. 나에게 원하는 게 뭐요.”

“우리는 이 도시 전체를 흑기사를 잡기 위한 덫으로 만들 것이오. 그리고 그걸 위해서…….”

잠시 뜸을 들인 이안이 마저 말했다.

“앞으로 내가 도시에서 할 모든 일들에 대해 영주님께서 전부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

폭탄 같은 발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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