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 방어전(2)
“지금 뭐라고 했소?”
“앞으로 제가 할 일에 대해 전부 협조해달라고 말했습니다.”
영주가 눈매를 좁혔다.
말이 협조지, 이는 사실상 시키는 대로 하라는 말과 다를 바 없었다.
귀족이자 도시를 통치하는 영주들은 이런 부분에 있어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안은 미리 자기가 실력이 있다는 걸 강조했고, 교단의 권위를 앞세웠다.
알게 모르게 에스테반의 존재도 영향을 주었고 말이다.
‘아무래도 검광을 다루는 검사가 하나인 것과 둘인 건 다르게 느껴지겠죠.’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에스테반은 마치 이안의 동료인 듯한 모양이 되었다.
이런 포석들을 깔아두었기에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 수 있는 것이다.
영주의 얼굴에서는 순간적으로 분노의 감정이 떠올랐다가 이내 원래대로 돌아갔다.
여전히 기분은 나빠 보였다.
하지만 그걸 바로 토해낼 정도로 멍청한 인물은 아니었다.
“할 일에 전부 협조하라……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을 말하는지 궁금하군.”
고민하던 영주는 그리 말했다.
“흑기사를 잡기 위해 미리 도시 곳곳에 준비를 해 둘 겁니다. 함정을 만들거나, 엄폐물을 만든다거나. 그 모든 걸 비밀리에 진행하려면 영주님의 동의와 도움이 필요합니다.”
“또?”
“곧 사제와 성기사들이 올 겁니다. 피에람 가문에 요청해둔 마법사도 올 거고요.”
“피에람이라고?”
그 이름에 영주는 또 한 번 놀랐다.
피에람이면 교단 못지않은 거물이다.
이안이 그런 곳과도 연이 있다는 건 놀라웠다.
‘아니. 어쩌면 당연하지. 요즘 반 전쟁파와 교단이 힘을 합쳤다는 말이 많으니. 그렇다면 이 사내는 생각보다 더 거물일 수 있겠군.’
열심히 상황을 파악하는 영주에게 이안이 이어 말했다.
“예. 실력 있는 마법사는 전부 보내주겠다는 약조를 받았습니다.”
”성기사에 기사. 사제와 마법사. 정말이지 호화로운 구성이군.”
“흑기사를 상대하려면 이 정도는 준비해야 하니까요. 실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오히려 흑기사의 먹이가 되어, 방해만 될 겁니다.”
이안은 침을 삼키며 영주의 반응을 살폈다.
일단 노한 기색은 사라졌다.
거의 다 넘어온 셈.
이안은 차분히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개개인이 강하다 해도, 군대로서 강한 건 별개의 이야기입니다. 훈련되지 않은 집단은 도리어 서로의 발을 붙잡기도 하는 법이니까요.”
“……그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오.”
동의하는 영주를 보며 이안은 침착하게 마무리를 했다.
“흑기사가 올 때까지 합동 훈련을 할 생각입니다. 제가 지휘관 역할을 할 거고, 당연히 흑기사의 싸움에서도 제가 그들을 이끌 겁니다. 그 점에 대해서 협조해주십시오.”
이런 막강한 인재들을 이끌고 벌이는 흑기사와의 전투.
이는 분명 역사책에도 남을 정도로 전설적인 싸움이 될 것이다.
만약 그 싸움의 지휘관이 될 수 있다면 어떨까?
엄청난 명예는 물론, 시간이 지나도 그 명성은 계속 울려 퍼질 것이다.
아이벤 가문의 자손들 역시 대대손손 득을 볼 터.
명예에 미친 귀족들에게는 군침이 줄줄 흐를만한 기회였다.
‘부디 이 영주가 욕심이 적은 편이어야 할 텐데요.’
이안은 내심 긴장하며 영주의 기색을 살폈다.
만약 영주가 욕심을 부린다면?
그렇다면 기사들에 대한 지휘권을 잃게 된다.
이안은 성직자들과 마법사를 이끌고, 영주는 기사들을 이끈다.
전투의 지휘관이 두 명이 되는 셈.
그것만큼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두 명의 명장보다, 한 명의 졸장이 낫다는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성직자들과 마법사들에 대한 지휘권을 포기한다는 건 더욱 말이 안 되고.’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영주는 고개를 숙인 채 긴 시간을 들여 고민했다.
옆에 있던 에스테반은 꾸벅꾸벅 졸았고, 이안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주었다.
잔 속의 차가 다 식어 미지근해졌을 때쯤.
비로소 영주가 입을 열었다.
“좋소. 도시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인들 못 하겠소.”
도시의 운명과 개인의 명예.
이 둘을 저울질한 끝에 결국, 영주는 전자를 택했다.
상대가 흑기사가 아니었다면 달랐을 수도 있다.
그만큼 흑기사는 이 세계 사람들에게 두려운 존재였다.
“단. 조건이 있소.”
“말씀하세요.”
“당신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건 들었소. 검광을 사용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지. 하지만 흑기사를 상대로는 다르오. 아시다시피 텔 왕국의 기사단장도 검광을 다룰 줄 아는 검사였소.”
검광을 다루는 검사들은 두말할 것 없이 모두 강하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도 강함의 척도는 나뉜다.
흑기사를 상대하려면 단순히 검광을 다룰 수 있는 수준만으로는 안 된다.
영주는 과연 이안이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지를 물어보고 있었다.
“또. 기사들은 긴 시간 나에게 충성을 바치던 이들이오. 내가 따르라고 말하면 시키는 대로 하겠지만, 마음 한쪽에는 불만이 있겠지.”
“요컨대 제대로 실력을 보여주라는 거네요? 기사들도 직접 설득하고요.”
“그렇소. 제대로 실력을 보여주면, 그때는 깔끔히 인정하겠소.”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입으로 흑기사를 상대한다고 했으니, 그 자격을 증명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너무나 깔끔한 영주의 제안에 이안은 고마움마저 느낄 지경이었다.
“그렇다면 바로 증명하기 위해 바깥으로 나가보죠. 에스테반 경. 일어나요.”
“……헙! 식사시간인가?”
“나가죠. 몸 좀 풀게.”
“그거 좋지!”
이안은 그대로 응접실을 나가 연무장으로 향했다.
더글라스는 여전히 기사들을 혹독하게 굴리고 있었다.
이안이 다가가자 더글라스가 의아한 얼굴로 이쪽으로 바라보았다.
“영주님과 얘기는 다 끝난 건가?”
“그래. 그리고 실력을 보여달라 하시더라고.”
“흐음?”
더글라스는 뒤쪽에서 걸어오는 영주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영주는 이렇다 할 대답 없이 짧게 답했다.
“그렇게 됐네. 협조해주게나.”
“……알았습니다.”
그렇게 되긴 뭐가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더글라스는 그저 명령받은 대로 할 뿐이다.
“그럼 간단히 대련이면 되겠지? 너를 상대하려면 보자…….”
“잠깐.”
이안은 손을 들어 더글라스를 제지했다.
이안은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래야 영주가 인정할 수밖에 없을 테니.
이안은 허리에 건 홀스터를 풀어 성검과 함께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기사단이 한꺼번에 덤벼. 너희는 진검도 쓰고. 물론, 더글라스 너도 포함이야.”
“……지금 뭐라고 했나?”
더글라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조용히 지켜보던 기사들도 모욕당했다 생각하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들이 보내오는 살기가 이안의 피부 위를 짜르르 타고 흘렀다.
하지만 이런 반응은 당연했다.
기사단 전체를 혼자. 심지어 맨손으로 상대하겠다니.
아무리 너그러운 기사라도 모욕으로 받아들일 만했다.
뒤에서 구경하던 에스테반은 폭소를 터트렸지만.
“하하하! 역시 이안! 참으로 사나이답군!”
그 웃음소리 때문에 더더욱 짜증이 났는지, 더글라스가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지금 내가 잘 못 들은 건가? 부디 그렇다고 해라. 너에 대해 조금이나마 생겨났던 좋은 감정이 전부 사라지기 전에.”
더글라스는 금방이라도 검을 뽑아 벨 듯한 기세를 풍겼다.
그의 심정이 이해가 되지만 이안도 어쩔 수 없다.
영주가 안심시키기 위해서 이거보다 나은 방법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검을 들면 너무 빨리 끝날 것 같아서.”
“…….”
더글라스는 뒤쪽의 영주를 다시 쳐다보았다.
영주도 이안의 발언에 기분이 상한 듯했다.
자기가 심혈을 기울여 키운 기사들이 무시당하였으니.
영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글라스도 마주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좋다. 다른 놈이었다면 곧바로 베어 버렸겠지만, 네 실력을 존중하니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 단. 우리는 수련을 실전처럼 한다. 싸우다가 크게 다치는 경우도 많지. 죽을 수도 있고. 후회는 안 하나?”
“그래. 안 하니까 제대로 덤벼.”
더글라스가 곧바로 외쳤다.
“모두 위치로!”
기사들은 일제히 산개했다가 모여들어 이안을 일사불란하게 포위했다.
20명의 기사들이 4명, 6명, 10명씩 원을 만들어 이안을 세 겹으로 둘러쌌다.
그 진형에서는 쉽사리 빈틈을 찾을 수 없었다.
이안은 목을 꺾어 몸을 풀었다.
마냥 무시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집중해야 해요. 이안. 한 몸처럼 움직이는 사람들이에요.]
‘당연히 방심할 생각은 없어요.’
이안은 왼쪽 주먹을 앞으로, 오른쪽 주먹은 허리에 댄 채 하체를 낮췄다.
그러면서도 감각으로 주위를 훑는 걸 멈추지 않았다.
‘공격이 온다면 분명 사각이겠지.’
뜸을 들이던 기사들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날카로워졌다.
시선이 빠르게 오고 갔다.
기분 탓일까? 이안은 왠지 그 시선이 점선의 형태로 눈에 보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온다.’
탓!
앞과 뒤에서 기사가 한 명씩 튀어나왔다.
기사보다는 암살자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은밀한 발걸음이었다.
‘받아치기 위해 한쪽에 치우치면 안 돼. 그러면 바로 공격이 들어올 거야.’
이안은 제자리에 선 채 기사들의 공격을 기다렸다.
둘은 거의 동일한 타이밍에 검을 내질렀다. 감탄이 나올 정도의 연계. 하지만 앞쪽의 기사가 미세하게 더 빨랐다.
이안은 그 자그마한 틈을 파고들었다.
훅!
이안은 순간적으로 발걸음을 앞으로 내디뎌 주먹을 뻗었다.
주먹은 뻗어오던 검의 옆면을 때린 뒤 다시 회수되었다.
동시에 이안은 허리를 틀어 발을 뻗었다.
멋들어지게 날아간 돌려차기가 뒤쪽에서 달려오던 기사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깡!
“컥!”
분명 갑옷을 입었건만, 전해지는 묵직한 충격에 기사는 신음을 흘렸다.
하체의 균형이 무너졌다.
이안은 그대로 거리를 좁혀 마무리하려 했다.
하지만 약속이라도 한 듯. 그를 향해 여러 방향에서 검이 뻗어와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공격당한 기사는 진형의 뒤로 물러나고, 다른 기사가 앞으로 섰다.
‘역시. 잘 훈련되어 있어요.’
별다른 명령이 없었는데도 보이는 굉장히 유기적인 움직임.
단 한 번의 공방만으로도 기사들의 수준이 여실히 드러났다.
‘어쩌면 좀 더 오래 걸릴 수도 있겠어요.’
기사들은 처음과 같은 방식으로 계속 공격해왔다.
둘이 튀어나와 공격하고. 위험에 처하면 동료들이 구한다.
지치거나 위급하면 뒷줄과 교대.
이상적인 형태의 연계였다.
틈을 보이거나 조급해져 변화를 줄 법도 하건만.
기사들은 지독하리만치 동일한 수법으로 이안을 공격해왔다.
싸움이라기보다는 마치 사나운 맹수를 사냥하는 느낌에 더 가까웠다.
‘이대로 깎아나가겠다는 건가?’
더글라스에게서는 지구전으로만 끌고 가면 반드시 이긴다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정작 이안도 체력적으로나 집중력으로나 밀릴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지만…….
‘그래서는 압도적인 승리가 아니잖아.’
지금도 영주는 날카롭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영주를 만족시키려면 지금처럼은 안 된다.
마음을 먹은 이안은 땅을 힘껏 박차 하늘로 날아올랐다.
기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위로 쏠렸다.
“호크. 환하게.”
“핍!”
갑작스럽게 나타난 호크가 사방에 강한 빛을 흩뿌렸다.
기사들은 순간적으로 시야를 잃었다. 잠깐. 아주 잠깐이었다.
하지만 이안에게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툭.
“어?”
이안은 기사들의 한가운데에 내려섰다.
본디 밀집대형은 이런 식으로 안쪽으로 파고들면 곤란해지는 법.
당황한 기사들이 반사적으로 단검을 꺼내 내리찍으려 했다.
하지만 단검은 이안의 피부를 찌르기에 충분히 힘이 실리지 못했다.
“어?”
이안은 얼빠진 표정을 한 양옆의 기사들에게 친절하게 말했다.
“이빨 안 나가게 조심해.”
퍽!
빠르게 뻗은 주먹이 양옆 기사의 턱을 강타하고.
그렇게 화려하게 싸움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