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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87화 (188/222)

187 방어전(3)

싸움은 일방적이었다.

이안은 기사들 사이를 파고들었고, 기사들은 그런 이안을 효과적으로 저지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사각에서 검을 내질러도, 마치 뒤에도 눈이 달린 것처럼 막아내니 별수가 있을까.

게다가 제대로 힘이 실리지 않은 공격은 이안의 피부에 상처조차 못 냈다.

그나마 대적할 만한 실력을 가진 건 더글라스였다.

하지만 이안은 더글라스를 철저히 피해 다녔다.

“도망치지 마라!”

기사를 방패로 삼아 요리조리 피해 다니니, 더글라스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

이안이 그런 더글라스를 상대한 건 기사들의 수가 충분히 줄이고 나서였다.

“후우. 끝인가.”

이안은 땀을 닦아냈다.

반나절. 반나절 간 쉬지 않고 이어진 격전에도, 이안은 고작 이마에 땀이 몇 방울 맺혔을 뿐이다.

영주는 그 모습을 보며 한 단어를 떠올렸다.

‘괴물.’

이안은 이미 평범한 인간은 벗어난 실력자였다.

‘검광을 다루는 초인들이 다 괴물 같은 인간이라는 건 들었지만…….’

그걸 눈으로 직접 보게 되니 기분이 남달랐다.

공들여 투자한 기사들이 처참하게 무너졌다.

하지만 기분은 이상하게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흥분하고 있었다.

대대로 아이벤 가문의 남자들은 강한 사람을 좋아했으니.

그리고 그건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수치스러워야 하는데, 그런 감정이 전혀 들지 않았다.

왠지 이안이 상대라면 지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안은 자신을 멍하니 쳐다보는 기사들을 하나하나 일으켜 세워주었다.

앞으로 한동안은 같이할 사이니, 미리 좋은 인상을 심어둬야 했다.

“수고했어요.”

“한 수 배웠습니다.”

“고생했어요. 사선에서 오르는 찌르기. 엄청 정교했어요.”

“……영광입니다!”

흥미진진한 눈으로 구경하던 에스테반이 그 모습에 살짝 눈을 훔쳤다.

“대련 후에 서로 격려하는 기사들이라니……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군. 어떻소. 내 종자지만 훌륭하지 않소?”

“……종자?”

영주는 잘 못 들었겠거니 하며 대답했다.

“그렇소. 솔직히 이 정도면 더 뭐라 하기도 그렇군.”

영주는 이안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좋소. 그대에게 모든 걸 맡기지. 부디, 아이벤을 잘 부탁하오.”

“일단 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둘이 악수를 나누자 기사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봤다.

이안은 그런 기사들에게 말했다.

“여러분은 당분간 제 지시에 따를 겁니다. 이 부분이 불만이 있으신 분은 지금 말해주세요.”

시선이 일제히 더글라스에게 쏠렸다. 더글라스는 고개를 저었다.

기사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걸로 결정이었다.

***

황실.

권좌에 앉아 있는 황제를 향해 레아가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동생아. 너마저 나를 그렇게 딱딱하게 대하니, 이 오라비는 너무나 슬프구나.”

“이제 제 오라버니가 아닌 황제이지 않으십니까.”

딱딱한 반응에 황제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레아. 그간 너무 바빠, 너에게는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해 미안하구나.”

“저도 이제 애가 아닙니다. 폐하께서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조금 까칠하군.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느냐?”

황제는 다정하게 물었다. 레아는 그 따뜻한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레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말하고 싶은 게 있지만, 쉽사리 입 밖에 내지 못했다.

그런 마음을 꿰뚫어 본 황제가 말했다.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 것 같구나. 너는 문제가 있다면 남에게 얘기하기보다는 혼자서 속앓이를 하는 아이였지.”

“……폐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나? 하하. 나는 언제나 원하는 대로 말하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한단다.”

황제의 너스레를 레아는 단호히 부정했다.

“아니요. 폐하도 늘 속마음을 숨기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 눈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글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황제는 어떠한 표정 변화도 없이 그리 답했다. 레아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황실에 안 좋은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나를 음해하려는 자는 어디에나 있는 법이지.”

“무시할 수 없는 소문이었습니다. 흑기사라거나 악마라거나.”

“그것참 재밌는 소문이구나.”

“……부정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촉촉이 젖어 드는 레아의 눈. 하지만 황제는 차갑게 말했다.

“이미 답을 정해두고 오지 않았느냐? 내가 무슨 답을 하든, 그게 의미가 있느냐?”

레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맞아요. 폐하께서는 언제나 제 생각을 꿰뚫어 보시는군요. 하지만 저는 폐하께서 부정해주셨으면 바랐습니다. 설령 거짓말이라도. 그렇다면 다시 한번 믿어 보았을 텐데…….”

“쉽사리 믿음을 주지 않지만, 한번 믿은 사람을 너무 과하게 신뢰하는 것도 네 단점이다.”

둘은 다시 눈을 맞췄다.

똑 닮은 황금빛 눈동자.

하지만 레아의 눈에서는 강직함이 느껴지는 반면, 황제의 눈은 형형하게 빛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레아는 등을 돌렸다.

감히 황제에게 인사도 없이 떠나려 하다니. 대단한 무례였음에도 황제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문을 열고 나가기 전.

레아는 멈춰선 뒤,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와 주실 순 없으십니까?”

일말의 간절함이 깃든 목소리.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차가웠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이제 네 오라버니가 아닌, 황제가 아니냐 레아 클로딘.”

레아의 등이 작게 떨렸다. 레아는 이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황제는 그 등에서 레아가 어떤 결심을 내렸다는 걸 엿봤다.

“저렇게 보내도 괜찮겠습니까?”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황제는 고개를 돌렸다.

초췌한 몰골의 마법사.

대현자 오테르가 아무것도 없던 빈 공간에서 나타났다.

황제가 빙그레 미소지으며 물었다.

“혹시 엿들은 것이오?”

“본의는 아니었습니다. 공간 마법의 준비가 거의 끝났다는 걸 말씀드리려 했는데…….”

“괜찮소. 그나저나 역시 오테르 공이오. 생각보다 빨리 준비가 끝났군.”

황송하다는 듯. 오테르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황제가 물었다.

“그나저나 저렇게 보내도 괜찮냐니. 무슨 말이오?”

“……지금 폐하께 가장 위험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레아 님입니다. 만약 레아 님이 적에게 간다면,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황제는 웃었다. 그 모습에 오테르는 미간을 좁혔다.

“왜 웃으십니까.”

“하하. 평소에는 테이오스 공이 할 법한 말을 오테르 공이 하니, 뭔가 재밌군. 테이오스 공이 자리에 없어서 그런가?”

“…….”

그 빌어먹을 놈과 비교되다니.

오테르는 울화통이 치밀었다. 누구는 이런 조언을 하는 게 좋겠는가?

하지만 할 말은 해야 하는 법이다.

오테르는 비통한 심정으로 말했다.

“만약을 대비해 레아 님은 감금이라도 해야 합니다. 폐하께서는 레아 님을 아끼시니, 당연히 탐탁지 않겠지만…….”

“아니. 할 거면 확실하게 해야 하는 법이오. 암살자라도 보내야겠소.”

과격한 말에 오테르가 굳었다.

황제의 말은 진심이었다.

오테르는 황제를 말리고 싶었지만 차마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황제의 말대로였다. 할 거면 확실하게 하는 게 좋았다.

그저 많은 피를 흘려 황위에 오른 이 젊은 황제가.

또다시 피를 봐야 한다는 게 오테르는 서글플 뿐이었다.

***

다음날부터 이안은 준비에 들어갔다.

매일 아침이면 영주성에 찾아가 기사들을 직접 지도 대련했다.

이미 한번 자존심을 꺾어 둔 터라, 기사들은 감사히 지도를 받았다.

“거기. 몸통이 너무 활짝 열렸잖아. 상대는 갑옷이 소용없는 적이야. 무조건 피하거나 흘린다는 생각으로 해. 맞아줄 생각하지 말고.”

“아, 알겠습니다.”

“흑기사랑은 절대 두 합 이상을 겨루지 마. 한번 때리면, 반드시 뒤로 빠져. 잘못하면 잡아먹힐 테니까.”

이안은 게임에서 숙지한 공략법과 현실에서 직접 마주친 경험을 기사들에게 아낌없이 전수했다.

마법사나 사제와 달리, 전열에서 싸우는 기사들이 가장 피해가 클 것이기 때문이다.

이안은 직접 흑기사의 역할을 맡아 다른 기사들을 상대했다.

딱!

“끄악!”

목검에 얻어맞은 기사가 저 멀리 날아갔다. 기사를 향해 이안이 엄숙히 말했다.

“방금 그걸로 죽은 거야. 흑기사였다면 몸통이 두 동강이 났겠지.”

“아, 알겠습니다.”

처음 이안이 기사들을 지휘하기 시작했을 때는 기사들도 탐탁지 않아 하는 감정이 있었다.

하지만 이안과 함께 수련을 시작하자, 그런 감정들은 싹 사라졌다.

‘역시 실전처럼 하는 게 좋긴 좋네요.’

원래도 다치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격하게 수련하던 그들이다.

이안은 무자비할 정도로 온 힘을 다해 기사들을 때렸다.

때리고 또 때렸다.

공포를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흑기사의 일격에 닿으면 죽는다는 공포. 반드시 피해내야 한다는 절박함.

‘그걸 몸에 새기기 위해서라면 역시 고통을 좀 줘야겠죠.’

그리고 고통은 사람의 정신을 꺾어놓는 법.

기사들은 이안의 지휘권에 대해 더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오로지 이안의 공격을 피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다른 생각 없이.

그리고 그 결과는 확실했다.

기사들은 점점 더 예민하게. 즉각적으로 공격에 반응하고 있었다.

강자와의 싸움에서는 언제나 큰 가르침을 얻을 수 있는 법이니.

게다가 이안은 한 번의 훈련이 끝나면, 기사들 한 명 한 명을 붙잡고 직접 조언을 해주었다.

단점과 습관.

앞으로 주의할 점이나 보완해야 할 부분을 간단히 알려주는 식이다.

하지만 실력자의 시선에서 건네준 조언은 아무리 간단한 것이라도 유용한 법이다.

조언을 들은 기사들은 이내 깨달음을 얻고 발전해나가기 시작했다.

실력이 느는 게 눈에 보이니 점점 기사들도 의욕을 냈고, 이안을 다른 시선으로 보았다.

‘처음에는 좀 못 미더웠는데…….’

‘실력 하나는 확실하다. 그리고 우리의 움직임을 세심하게 봐주고 있어.’

‘이건 엄청난 행운이야. 이 기회에 실력을 가능한 한 늘려둬야 해.’

그리고 그런 가르침을 받는 기사중에는 더글라스도 있었다.

“아, 이안 님. 다음은…….”

“씁. 내가 먼저다.”

“아, 알겠습니다.”

심지어 더글라스는 자기 지위를 이용해 기사들보다 먼저 조언을 받기도 했다.

기사들은 그런 더글라스를 원망스러운 얼굴로 쳐다보았지만 더글라스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애초에 더글라스의 실력이 제일 뛰어났기에, 이안도 그런 더글라스를 좀 더 챙겨주었고.

이안이 지치면 에스테반이 대신 훈련을 맡기도 했다.

“다 덤벼라! 어서!”

“…….”

“왜 안 덤비나? 설마 겁을 먹었나?”

“에스테반 경은 좀…….”

주춤하는 기사들을 향해 에스테반이 돌진하는 것으로 훈련은 재개되었다.

그 모습을 보며 이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원래는 딱히 맡길 생각 없었지만, 워낙 심심하다고 징징대니…….’

에스테반 덕에 여유 시간이 좀 생긴 이안은 분주하게 도시를 돌아다녔다.

도시는 지금 흑기사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주 은밀하게.

‘좋아. 곳곳에 제대로 지어지고 있네.’

흑기사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한 엄폐물. 발을 묶어둘 함정들. 은밀하게 설치되는 마법적인 기구들까지.

그렇게 큰 위력을 발휘하지는 못하겠지만, 하나하나가 모이면 분명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낼 거라고 이안은 확신했다.

“…….”

이안은 높다란 건물의 지붕에 올랐다.

지붕 위에는 발리스타가 설치되어 있었고, 그 옆에는 스텔이 쪼그려 앉아 있었다.

발리스타가 제대로 설치되었는지 확인한 이안이 스텔에게 물었다.

“수련. 아직도 하고 있는 거야?”

“응.”

스텔은 이안이 내준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고마웠고 기특했다.

이안은 문득. 스텔의 시선을 따라 길거리로 고개를 내렸다.

해질녘의 거리는 수많은 사람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노동자들.

미로에서 돌아와 갑옷에 피가 잔뜩 묻은 용병들.

그런 용병들을 불러세우는 주점 주인들과 호객꾼들.

마굴 위에 세워진 도시 아이벤은 아이러니하게 그 어느 도시보다 활기가 넘쳤다.

‘이제 곧 이곳은 쑥대밭이 되겠지.’

시민들을 미리 대피시킬 수는 없다.

언제 흑기사가 올지도 모르거니와 그렇게 눈에 띄는 짓을 하면 어떤 변화가 생길지 모른다.

그렇기에 남은 수는 하나밖에 없다.

‘반드시 막아내는 수밖에.’

어떻게든 흑기사를 막을 것이다.

새삼 이안은 결의를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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