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방어전(4)
덜컹. 덜컹덜컹.
레아는 눈을 떴다. 주위는 아직 어둡다.
이 시각에 깨다니. 매일 혹독한 수련으로 몸을 혹사하는 레아에게는 드문 일이다.
레아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문은 돌풍 때문인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후우.”
한숨을 내쉰 레아가 다시 잠에 들려던 그 순간.
드득. 득.
문 쪽에서 부자연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마치 누가 억지로 열려고 하는 듯한 소리.
아주 작은 소음이었지만, 레아의 귀는 들을 수 있었다.
‘암살자.’
이런 늦은 시각의 밤손님은 그 외에 달 리 없을 거다.
레아는 머리맡에 둔 검을 들었다.
갑옷도 입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은 없어 보였다.
이제 자물쇠를 따고 암살자들이 들이닥치겠지. 몇 명이나 될까. 5명? 10명?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거다. 실력 있는 암살자는 검사나 기사와는 다른 방식으로 까다로운 법이니.
레아는 순간 소리쳐 사람들을 불러모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이 암살자들을 누가 보냈을지에 생각이 닿았고, 이내 소리치는 걸 포기했다.
‘……정말로 이렇게 나올 줄이야.’
배신감 혹은 서글픔. 그녀조차 정확히 알 수 없는 감정에 레아는 강하게 쥔 주먹을 잘게 떨었다.
하지만 그녀는 기사다.
주위에서는 레아를 황녀라 생각하고 대우하지만, 적어도 그녀 자신만큼은 스스로를 황녀보다는 기사라 생각했다.
그리고 기사는 전투에 앞두고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법.
지금은 오로지 전투에 집중할 때다.
딸칵.
마침내 자물쇠가 풀렸다.
문이 스르르 열렸다.
레아는 곧장 단검을 집어 던졌다.
팍!
“……!”
문을 따고 들어오던 복면인의 가슴팍에 단검이 깊게 박혀 들었다.
복면인은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비명 하나 지르지 않았다.
다른 복면인들은 잠시 주춤했다.
설마 레아가 깨어 있을 줄은 예상 못 한 듯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다. 복면인들이 뱀처럼 은밀히 이동해 순식간에 방안에 들어왔다.
그 숫자는 무려 일곱. 죽은 이까지 더하면 여덟. 게다가 하나같이 잘 훈련된 암살자였다.
사람 하나 죽이기에는 과할 정도로 충분한 전력인 셈.
레아는 그들을 향해 검을 내밀며 말했다.
“나는 레아 클로딘이다. 묻겠다. 너희들은 그 사실을 알고 이곳에 온 건가?”
“…….”
대답하는 암살자는 없었다. 아니, 애초에 말 자체를 할 수 없는 이들일 수도 있다.
레아는 개의치 않았다.
검을 들었고 자세를 잡았다.
‘오라버니는 나 하나를 죽이기 위해 여덟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건가? 그렇다면…….’
그게 오산이라는 걸 깨닫게 해줄 수밖에.
레아는 이불을 끌어당긴 뒤 앞을 향해 힘껏 던졌다.
실크 재질의 고급 이불이 순간적으로 방을 반으로 갈랐다.
서로 간의 시야가 차단된 그때.
암살자들과 레아는 동시에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
뚝뚝.
조금 뒤. 레아의 방은 엉망이 되었다. 가구란 가구는 죄다 박살 나고 벽지는 온통 피범벅이었다.
하지만 그중에 레아의 피는 단 한 방울도 없다.
‘조금 위험할 뻔했어.’
만약 조금이라도 암살자들의 단검에 스쳤다면 레아도 위험했을 것이다.
단검에는 아마 극독이 발려 있을 테니.
하지만 격전 속에서도 암살자들은 끝내 레아에게 유효타를 성공시키지 못했다.
레아는 다시 칼을 검집에 넣었다. 명검의 날에는 피조차 묻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하지.’
이제부터 사방이 적이다.
그녀를 도와줄 만한 이들은 더는 황궁에 남아 있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했다.
‘도망친 다음에는…….’
떠오르는 건 검은 머리 청년. 이런 일을 미리 예견한 자이기도 하다.
다시 생각해보니 레아에게는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레아는 마음을 굳혔다.
그녀는 검집에서 다시 검을 뽑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오늘 하루 동안은 검을 검집에 집어넣는 일은 다시 없을 것 같았다.
***
부탁했던 지원군이 도착했다.
교단에서 각지에서 끌어모은 실력 있는 성기사와 사제의 숫자가 20명.
미리 자신들의 임무를 듣고 온 그들은 사기가 매우 높았다.
“이안 님.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쿤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스스로를 쿤이라 부른 이는 피부가 까무잡잡한 근육질 사내였다.
그는 현재 이곳에 온 성기사들 중에서 지위가 가장 높다고 했다.
내심 성도에서 인연이 있던 게르하르트가 오지 않았을까 싶던 이안에게는 의외의 일이었다.
이안이 이에 대해 의문을 표하자 쿤은 넉살 좋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게르하르트 경은 현재 연무장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고 수련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관철하려면 더 강한 힘이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그렇군요. 어쨌든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함께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영웅…….아니. 이안 님. 부디 악수를 나눌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무슨 성자라도 영접한 듯 부담스러운 반응이었다.
‘아니. 교단의 영웅으로 선정되었으니 성자와 비슷하다고 봐야 하나?’
이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고, 쿤은 양손으로 이안의 손을 감싸 쥐며 황송한 표정을 지었다.
왠지 기분이 이상해 이안은 그 손을 서둘러 뿌리쳤다.
“아아.”
아쉬운 얼굴을 한 쿤에게 이안이 머쓱하게 말했다.
“뒤에 분들도 많이 기다리시는 것 같아서요.”
“아. 너무 흥분해 신경을 못 쓰고 있었군요! 과연 세심하십니다.”
쿤이 자리를 비켜주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사제와 성기사들이 우르르 다가와 이안과 손을 마주 잡았다.
흡사 아이돌 팬미팅이라도 온 듯한 분위기에 이안은 그들을 급하게 물려야 했다.
“아직 제 신분은 비밀이라 이렇게 눈에 띄는 짓은…… 예. 아시겠죠?”
“옙!”
성직자들은 일제히 큰 소리로 대답했다.
‘정말 알아듣긴 한 것인지…….’
한숨을 내쉰 이안은 성직자들을 우선 예배당으로 보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다음 지원군이 도착했다.
“안녕하시오. 로델이라하오. 로드릭 님께 얘기 많이 들었소.”
흰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그림에 그린 듯한 마법사가 자신을 소개했다.
그 뒤에 있는 연령과 성별 모두 제각각인 마법사들이 15명.
로드릭이 보내준 마법사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피에람의 방계이거나 마탑에 소속된 마법사들이었다.
‘로드릭이 힘을 좀 썼군.’
이안은 그들에게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위험한 일인 걸 아시면서도 먼길 달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로델은 느릿하게 손을 내저었다.
“그런 말 하실 필요 없소. 정의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참여해야 하지 않겠소? 마탑의 다른 동지들도 함께하지 못해 많이 아쉬워했소. 한데…… 혹시 플로라 양은 어디 있소? 얘기를 나눠보고 싶소만.”
플로라라는 말에 심드렁하게 서 있던 마법사들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아무래도 이들은 당장 플로라를 만나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역사에 남을 정도로 뛰어난 천재이니 어쩌면 당연하였다.
“금방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일단 성으로 가시죠.”
마법사들은 흑기사가 올 때까지 영주성에서 지낼 예정이었다.
영주에게도 나쁠 것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실력이 보장된 마법사들과 연을 맺을 수 있는 것 자체가 행운이었으니.
그날 저녁.
이안은 기사들, 마법사들, 그리고 성직자들과 동료들까지 모두 영주성으로 모이게 했다.
“엄청나군…….”
대륙에서도 한 손에 꼽힐 정도로 강한 전력이 자기 안뜰에 모인 게 감격스러운지, 영주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기분 좋기는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게임에서는 흑기사는 자기 힘으로 잡아야 했어요.’
마법사도 사제도 기사들의 지원도 없이 오로지 플레이어의 힘만으로 상대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엄청난 전력이 지금 이곳에 모여 있다.
이안도 게임에서 일방적인 플레이어의 스펙을 훨씬 웃돌고 있다.
‘모든 상황이 긍정적으로 돌아가고 있어.’
기쁘다. 하지만 방심할 수 없다.
흑기사는 강한 적이다.
그리고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이 싸움이 끝난 후에도 계속 이안의 전력이 되어줄 이들이다.
승리를 거둬도 이들을 다 잃으면 패배나 다름없다.
이안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시선이 쏠렸다.
인원이 처음으로 모인 만큼 무언가 장엄한 연설이라도 하지 않을까 하는 눈치였다.
이안은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말했다.
“이곳에 서 있다는 건 이미 죽음을 각오했다는 거겠죠?”
누구는 피식 웃었다. 너무나 당연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다른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또 다른 누군가는 입으로 조그맣게 ‘각오했습니다.’라고 중얼거렸다.
그런 이들에게 이안이 말했다.
“하지만 당신들은 안 죽을 거예요. 제가 그렇게 할 겁니다.”
이안이 불러모은 이들이다.
만약 흑기사에게 목숨을 잃는다면, 그건 이안 때문인 것과 마찬가지다.
이안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생각이 없었다.
이런 위험한 곳에 불러 놓은 주제에 모순적이라 할 수 있지만…….
“반드시 살아남읍시다. 그리고 이깁시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위해 모였는지는 모른다.
명예. 명성. 혹은 다른 무언가의 이득.
하지만 이안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언제나 하나였다.
생존.
이안은 이번에도 살아남을 거다.
이곳에 있는 모두와 같이.
***
황제는 권좌에 앉아 지루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시녀들은 혹 자신들이 실수라도 한 게 아닌가, 옆에서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했다.
늘 이랬다.
황제는 딱히 시녀들에게 화를 내거나, 벌을 내리거나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시녀들은 늘 황제를 두려워했다.
어쩌면 본능적인 공포일 수도 있다.
초식동물은 맹수를 두려워하는 법이다. 아무리 얌전한 맹수라도.
시녀들의 그런 기색이 전해졌을까?
황제는 인상을 찌푸렸다.
“모두 나가거라.”
“하, 하오나.”
“어서.”
시녀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종종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혼자 남은 황제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지루하구나. 함께 담소를 나눌 연인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또 그 얘기를 하시는 겁니까?”
뒤쪽에서 오테르가 스르륵 나타났다. 황제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 오테르 공. 마침 지루해 죽으려던 참이었소.”
“불과 얼마 전에 적절한 여인들의 목록을 추려 올리지 않았습니까. 그녀들 모두 폐하의 비가 되기 손색이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맞소. 모두 좋은 여인들이었지. 훌륭한 집안. 뛰어난 외모. 깊이 있는 교양.”
“그렇다면 왜…….”
“뭐 어쩌겠소. 내 심장이 뛰질 않는데.”
황제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마치 개구쟁이 소년처럼.
오테르는 고개를 저었다.
“아시다시피 황가의 혼약은 사랑보다는 대국적인 이득을…… 후우. 됐습니다.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해봤자 무슨 소용이겠습니다.”
“우리 대현자께서 더 현명해지셨군.”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 오테르가 표정을 다잡았다. 그리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레아 님께서 성을 탈출하셨습니다. 막아서는 이들을 오직 검 한 자루로 모조리 뚫어내셨다고…….”
황제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역시 내 동생. 벌써 실력이 그 정도까지 성장했을 줄이야.”
“가벼이 여길 일이 아닙니다. 폐하.”
“뭐. 추격대라도 보내면 되지 않겠소. 그것보다 준비는 끝났소?”
오테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그 얘기를 하러 오다, 레아의 소식을 들은 참이었다.
황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럼 슬슬 준비해야겠군!”
“폐하…….”
“이번에는 세상이 좀 더 크게 놀랄 것이오. 분명.”
자리에서 일어난 황제는 창가로 걸어갔다.
날이 흐렸다. 짙게 낀 구름이 별과 달을 가리고 있었다. 유독 어두운 밤이었다.
“일을 벌이기에는 딱 적당한 날씨군.”
밤하늘을 보는 황제의 눈은 형형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