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89화 (190/222)

189. 방어전(5)

이안은 홀로 방안에 앉아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검을 쥐었다. 검에서는 새하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마치 바닷속의 해초처럼 검광은 이리저리 흔들렸다.

바람에 흔들리는 건 당연히 아니었다.

검광은 마음의 힘.

이렇게 무질서하게 흔들리는 검광은 곧 이안의 마음을 대변했다.

“…….”

이안은 이내 정신을 집중했다. 마음을 다잡았다.

자꾸만 주위로 퍼져나가려던 검광이 이내 검날로 모여들었다.

검광이 서서히 압축되었다. 더 선명하고 강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안은 그 검광의 빛을 최대한 얇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온몸을 타고 흘러내린 땀에 옷이 축축해졌다.

기사들과 온종일 대련해도 땀 몇 방울 흘리는 게 다였던 그다.

그만큼 검광을 다루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해야 한다.

당장 검광의 총량을 늘릴 수 없다면, 하다못해 효율적으로 싸우는 법을 배워야 한다.

더 적은 양으로 더 큰 위력을 내기 위해.

이내 검광은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자그맣게 압축되었다.

어찌나 얇은지 실선으로 보일 정도.

마치 쇳덩어리 위에 비단실 하나가 툭 놓인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상태를 오래 유지할 수 없었다.

이내 검광이 팟! 하고 입자가 되어 흩어져 버렸다.

그제야 이안은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후우우. 이거 진짜 죽을 맛이네요. 몇 번 더 했다가는 진짜 기절하겠어요.”

엄살이 아니다.

이안은 방금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조금만 해제가 늦었다면 꼼짝없이 기절했을 거다.

[그래도 엄청 늘었어요. 이 정도면 실전에서는 평소보다 두 배는 더 길게 검광을 사용할 수 있겠어요. 노력했네요, 이안.]

이네스는 제자의 성장이 마냥 기쁜 모양이다.

마음 같아서는 머리라도 쓰다듬어주고 싶은 눈치.

하지만 이안은 아직 만족하지 못했다.

“맞아요. 많이 늘긴 했어요. 하지만 흑기사를 상대로 이 정도로 충분할까 생각하면……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지금도 처음 흑기사와 대적한 그 순간이 생생히 기억난다. 그 ‘괴물’이라는 단어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존재를.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안은 두려웠다. 놈이 풍기는 죽음의 냄새가. 그가 휘두르는 대검에 담긴 힘이 두려웠다.

오히려 그렇기에 간절함을 얻었고, 검광을 터득할 수 있었지만…….

지금도 그 두려움은 여전히 마음 한켠에 남아 있었다.

“하아.”

답답한 마음에 한숨만 나왔다.

차라리 수련에 열중하면 좀 나으려만 지금 다시 수련을 했다가는 얄짤없이 기절이었다.

‘바람이나 쐐야겠어요.’

이안은 천천히 복도를 거닐었다.

그러다 동료들의 방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고른 숨소리가 들린다.

동료들이 잠에든 걸 확인한 이안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밖으로 나오자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벌써 늦가을이다.

두툼한 외투를 입어야 할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쌀쌀함은 이안에게 상쾌하기만 할 뿐이었다.

안뜰로 나와 가볍게 몸이나 풀려던 이안은 멈칫했다.

누군가 있었다.

설마 이 늦은 시각에 선객이 있을 줄이야.

조금 당황한 이안은 상대를 살폈다. 아는 얼굴이었다.

‘에스테반 경이잖아.’

에스테반은 멍하니 안뜰의 중앙에 서서 달을 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옆에는 레이야드가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이안은 에스테반의 이름을 불렀다.

“에스테반 경. 이 시간에 뭐 하세요.”

“…….”

에스테반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 시선과 마주쳤다.

이안은 굳었다.

광기가 줄줄 흐르던 평소의 눈빛과는 달랐다. 에스테반의 눈은 지극히 차분했고, 총기를 담고 있었다.

이안은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저게 화이트가드 가문의 젊은 천재였던 에스테반의 원래 모습이라는 걸.

‘이런 모습은 처음…… 아니. 예전에도 한 번 본 적 있지.’

에스테반과 함께했던 그 짧은 시간 동안. 이안은 에스테반의 이런 모습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때도 이렇게 서늘한 늦가을이었고.

그때도 이렇게 보름달이 휘황하게 뜬 밤이었다.

꽤 타이밍이 오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밤에 무슨 일이냐. 이안.”

멍하니 서 있는 이안에게 에스테반이 그리 물었다.

평소처럼 심지가 굳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좀 더 차분한 어조였다.

이안이 반문했다.

“그러는 에스테반 경이야말로 뭐 하시는데요. 멍하니 하늘만 보고 있고.”

“허허.”

에스테반은 고개를 올렸다.

“기사에게는 가끔 달을 올려다보고 싶은 날이 있는 법이다. 달에는 형언할 수 없는 마력이 있거든.”

“……잘 이해가 안 되는데요?”

“기사가 된다면 이해할 거다.”

“기사들은 뭐 늑대인간이라도 되나 보죠?”

이안이 건넨 농에 에스테반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다시 하늘을 보아 달을 쳐다봤다. 이안은 그 옆 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침묵 속에서 갑자기 묻고 싶은 게 생겼다.

“경은 왜 갑자기 기사단을 뛰쳐나온 건가요?”

“음?”

예전부터 궁금했었던 부분이다.

물어봤자 제대로 된 대답은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서 무시했었지만, 지금은 왠지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안이 이어 말했다.

“솔직히 그렇잖아요. 훌륭한 가문에 대륙 제일의 기사단 소속. 심지어 재능도 엄청나고요.”

가만히만 있어도 명예와 성공은 보장된 것과 다름없었다.

그대로 착실히 수행했으면 기사단장의 자리를 맡았을 거고, 역사서에도 이름을 남겼을 거다.

기사라면 모두 꿈꾸는 일 아닌가?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해도 험지를 돌며 미치광이라는 조롱을 듣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글쎄…….”

에스테반은 그답지 않게 말을 흐렸다.

하지만 이안의 예상대로 대답을 들려주었다.

“확실히. 나도 너와 비슷하게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나를 죽이고 주위에 기대에 따라 사는 게 올바르다고 여기던 시절이.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런 삶밖에 몰랐던 거지.”

처음으로 자기 얘기를 풀어놓는 에스테반. 이안은 입을 다물고 경청했다.

“그런 나에게 다른 삶도 있다는 걸 가르쳐 준 사람이 있었다. 지금 이렇게 사는 건…… 전적으로 그녀 덕분이겠지.”

그녀.

분명 보통 사이는 아닐 거다.

이안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분은 지금 어디 계시죠?”

“죽었다.”

에스테반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표정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안은 왜인지 그 모습이 더 슬프게 보였다.

에스테반은 평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들어라 이안. 기사란 지키는 존재다.”

“예.”

“뭘 지킬지는 네가 선택하는 거다. 하지만 지켜야 한다고 마음을 먹었으면, 반드시 지켜내라. 알겠나?”

마치 다짐을 받듯이 묻는 말에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지금은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야만 할 것 같았다.

말을 마친 에스테반은 검을 뽑았다.

검이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새파랗게 날이 서 있는 검은 보는 것만으로도 오싹하게 했다.

에스테반은 검날을 묵묵히 쳐다보았다. 에스테반의 눈동자에도 날카로운 빛이 맴돌았다.

말없이 서 있던 이안이 그런 에스테반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날도 추운데 이제 그만 들어가죠. 내일 또 훈련하려면 조금이라도 자둬야죠.”

“……이안. 아까 내가 한 얘기 기억나나? 내게 다른 삶을 알려준 그녀가 죽었다는 걸.”

“예? 예…….”

갑작스러운 화제에 이안은 당황했다. 에스테반은 하늘을 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그녀를 죽인 게 바로 흑기사였다.

“예?”

“그리고 아무래도 오늘, 드디어 복수의 때가 온 것 같군.”

이안도 에스테반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흐릿하던 하늘이 점점 밝아졌다.

동이 트는 걸까? 아니다. 햇빛이 아니었다.

어스름하던 하늘에는 이내 강렬한 푸른색 빛무리가 소용돌이쳤다.

잠시 한곳으로 모여들었던 빛무리는 이내 원형으로 퍼져나가더니 온 밤하늘을 그 빛으로 뒤덮었다.

푸른 오로라.

이안은 이 현상이 무엇인지를 안다. 주춤하던 이안이 소리쳤다.

“벌써…… 이런 씨!”

이안은 땅을 박차며 외쳤다.

“에스테반 경! 다른 사람들을 모두 깨워요!”

“그래. 그리하겠다.”

다급한 이안과 달리 에스테반은 몹시 차분했다.

그는 엎드려 자고 있던 레이야드를 툭툭 쳐 깨웠다.

“일어나라 이 잠꾸러기야. 다시 달릴 시간이다.”

아직 잠이 덜 깬 듯.

느릿느릿 일어나는 레이야드를 보며 에스테반은 검집을 땅에 버렸다.

마치 다시는 사용하지 않을 것처럼.

***

땡! 땡! 땡!

경고를 알리는 종소리가 도시의 새벽을 요란하게 울렸다.

이안은 빠르게 달리며 생각했다.

‘공간 마법이 발동할 때까지는 좀 시간이 있어. 그 전에 모두 깨우고 준비를 마쳐야 해.’

우선 시민들을 대피시켜야 했다.

흑기사와의 싸움은 쉽지 않을 것이다. 시민들을 염려하며 싸울 여력은 없었다.

싸움에 휘말린 시민들은 반드시 죽을 것이다.

‘아니. 차라리 그냥 죽으면 낫지.’

흑기사는 영혼을 잡아먹는 괴물이다. 운 나쁘게 흑기사에게 영혼을 빼앗긴다면 죽어서도 끔찍한 고통을 받아야 한다.

“모두 질서를 갖추고 대피하도록!”

“짐을 챙길 시간은 없다! 어서 빨리 성 밖으로 피신하라!”

영주의 사병과 경비병들은 시민들을 재빨리 대피시켰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에 시민들은 당황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전쟁이라도 났답니까?”

“아이씨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닥치고 빨리 움직여!”

병사들도 흑기사가 온다는 사실은 몰랐다.

그저 훈련받은 대로 따를 뿐.

병사들의 태도에서 위기감이 안 보이자, 시민들도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이안은 혀를 찼다.

‘이대로는 안 돼.’

대피 속도가 생각보다 너무 느리다. 전부를 성에서 내보낼 수는 없어도 적어도 격전지가 될 중앙 구역 정도는 비워둬야 한다.

‘혼란이 생길 수도 있지만…….’

이안은 근처 건물의 지붕에 올라간 뒤, 힘껏 외쳤다.

“흑기사! 흑기사가 이곳에 온다아―!”

이안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시민들은 그런 이안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이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이안이 다시 외쳤다.

“흑기사가 온다! 이곳에 있으면 전부 죽는다아―!”

모두가 입을 다물었기 때문에 두 번째 외침은 더 선명하게 울렸다.

시민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흑기사라니. 너무 뜬금없는 말 아닌가?

하지만 이안의 목소리는 묘한 신뢰감을 주었다. 절대로 거짓말이 아닐 거라는 신뢰감을.

그제야 위기감이 시민들의 마음속에 생겨났다.

“흑기사라고?”

“지금 경고종이 울리는 것도…….”

“빠, 빨리 비켜! 난 어서 나가야 겠어!”

하나둘 달리기 시작했다. 공포는 전염되는 법.

이윽고 시민들은 두려움에 질려 무질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황한 경비병들은 그런 시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주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여러 명이 다칠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지.’

이곳에 멍하니 있다가 흑기사에게 전부 잡아먹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시민들이 대피하는 모습을 슬쩍 훑은 이안은 다시 하늘을 보았다.

오로라의 한 가운데에 구멍이 생겨났다.

흑기사는 저 구멍에서 떨어질 터.

낙하지점을 보고 흑기사를 유인하는 게 이안의 역할이었다.

이안은 지붕을 뛰어다니며 그 구멍의 위치를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온다.’

이내 오로라 속의 구멍에 빛무리가 모여들었다.

공간을 왜곡시키는 저 푸른빛 속에서 구름 같은 게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 구름에서 무언가가 삐죽 튀어나왔다.

거대한 대검을 짊어진 칠흑의 기사. 놈의 투구 속에서는 새빨간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이안은 흑기사를 봤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지만, 흑기사도 이안을 마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안은 이마에 맺히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드디어 왔구나.”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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