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 방어전(6)
구름을 빠져나온 흑기사의 몸이 지상을 향해 낙하했다.
워낙 높은 위치다.
흑기사의 몸은 기껏해야 손가락 한 마디 크기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도시에 있는 모두는 정확히 흑기사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크기와 상관없이 흑기사가 뿜어내는 기운.
그 너무나 사이하고 숨을 죄어 오는 기세는 무시하려야 무시할 수가 없었다.
더욱 공포에 질린 시민들은 미친 듯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이안은 그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지붕을 훌쩍 뛰어넘어 흑기사의 예상 추락지점으로 달렸다.
흑기사는 어떤 움직임도 없이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덕분에 어디로 추락할지 예측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도시의 중앙…… 영주성의 근처로 떨어질 것 같아요.’
아마 영주성이 목표일 것이다.
하지만 흑기사는 그보다 조금 떨어진 도심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아무리 대현자 오테르의 마법이라도 오차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달리는 사이.
마침내 흑기사가 지면의 근처까지 다다랐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떨어져 내린 흑기사는 꼿꼿하게 자세를 유지했다.
그리고 지면과 부딪혔다.
쿠웅!
강한 충격과 함께 지면이 흔들렸다. 주위에는 먼지구름이 퍼져나갔다.
마치 운석이라도 떨어진 듯한 충격이다.
이안은 흙먼지가 가득한 바람을 맞으면서도 눈을 감지 않았다. 아니. 도저히 감을 수 없었다.
저 구름 속에서도 엄청난 존재감을 뿜어내는 적을 상대로는 차마 눈을 감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후욱!
거센 바람과 함께 먼지구름이 걷혔다.
흑기사는 대검을 들고 서 있었다.
저 거대한 대검을 휘둘러 만든 검풍으로 먼지를 걷어낸 것이다.
흑기사는 이안을 보며 안광을 빛냈다.
“너…… 익숙한 느낌이다.”
음산한 목소리에 닭살이 돋았다.
이안은 성검을 꺼내 들었다.
온몸이 저릿저릿했지만, 허세라도 부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구면이니까 그렇지. 또 물어볼까 봐 말하는 거지만 내 이름은…….”
“이안. 강한 영혼을 지닌 검사.”
“뭐야.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이안은 눈썹을 삐죽였다.
저 지혜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괴물에게 기억력이란 게 있을 줄은 몰랐다.
당연히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흑기사에게도 지성이 있다는 증거니.
이안은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한번 싸워보자. 마침 1대1이니, 결투 느낌으로 하면 되겠네.”
다른 병력들이 준비를 마치기까지 시간을 벌어줘야 한다.
흑기사는 그런 이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투…… 좋다. 이안. 나의 이름을 걸고…… 내 이, 이름은.”
흑기사는 두통이라도 생긴 듯. 머리를 부여잡았다.
붉은 안광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뭐야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기회인 건 분명했다.
이안은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어찌나 은밀히 이동했는지,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한껏 몸을 낮춘 이안은 그대로 흑기사의 하체에 쇄도했다.
이대로 놈의 다리를 갑옷째로 잘라 버릴 생각이었다.
그때. 흑기사의 안광이 짙어졌다. 안광은 이안을 보았다.
대검이 이안의 머리를 향해 수직으로 떨어졌다.
‘씁! 살벌하네…….’
대검은 빠르고 묵직하다. 거대한 대검은 그 크기보다 더 커다란 존재감을 뿜어냈다.
피해야 한다!
겁에 질린 본능이 그리 외쳤다.
‘하지만 피하면 안 돼.’
이안은 양손으로 성검의 양쪽을 잡고 들어 올렸다.
쿵!
대검이 성검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지난번.
황도에서 흑기사와 마주쳤을 때와 똑같은 공방이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이안의 검에 전해진 충격은 발바닥으로 흘러나갔다.
흑기사는 연거푸 검을 내리쳤지만 이안에게는 별 충격을 주지 못했다.
심지어 이안은 반격까지 날렸다.
순간적으로 검을 뻗었고. 검광을 압축해냈다.
흑기사의 갑옷 위에 실선이 그어졌다.
만약 흑기사가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면 좀 더 제대로 된 타격을 줄 수 있었을 거다.
‘좋아. 수련의 성과가 있다.’
황도에서 검을 나누던 때와 지금의 이안은 다르다.
저 멀리 물러난 흑기사도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자기 대검을 쳐다보았다.
기억과 다르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이안은 그런 흑기사와 거리를 두고 달렸다.
아무리 성장했다 하나, 저 괴물과 힘 싸움을 벌이는 건 사양이었다.
흑기사도 그런 이안과 거리를 유지하며 달렸다.
쿵! 쿵!
흑기사가 한번 발을 디딜 때마다 도로가 깨져나갔다.
이내 둘은 같은 방향으로 달리며 검을 나눴다.
워낙 빠른 속도로 달리는 터라 아까처럼 내리찍는 공격은 불가능했다.
이안이 노리던 바였다.
흑기사는 검은 검광이 아른거리는 대검을 횡으로 힘껏 휘둘렀다.
이안은 허리를 꺾었다.
대검이 코 위 한 뼘 정도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뛰어서 피해 볼까도 생각했지만 그랬다가는 후속타에 곧바로 몸이 두 동강 날 것 같았다.
이안은 다시 허리를 펴려 했다. 흑기사는 발길질을 날렸다.
이안은 허리를 펴다 말고 그대로 바닥에 넘어지듯이 누워 버렸다.
‘발차기는 강력한 만큼 리스크가 크지.’
이안은 뻗어져 오는 흑기사의 발을 향해 양손으로 활짝 펴 내밀었다.
발과 양손이 부딪혔다.
찰나의 힘겨루기 후 밀리는 쪽은 발이었다.
한쪽 발만으로는 힘을 싣는 데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흑기사가 균형을 잃었다. 순간적으로 그 거체가 허공에 떠올랐다.
이안은 벌떡 일어나 그 몸통을 향해 번개처럼 성검을 내질렀다.
‘먹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흑기사는 순간적으로 오른 주먹을 땅에 힘껏 내리쳤다.
비스듬하게 넘어가던 흑기사의 몸이 마치 어항 속 물고기처럼 튀어 올랐다.
이안의 검은 자연스럽게 허공을 갈랐다.
‘이게 무슨…….’
한 가지 잘못 생각한 게 있다.
흑기사는 단순히 강한 힘과 단단한 몸을 가진 게 아니었다.
수준급의 검술과 전투 센스.
이 괴물은 싸움 자체를 잘했다.
‘너무 우습게 봤어.’
곧바로 반격을 가하는 흑기사를 보며 이안은 이를 악물고 다리에 힘을 줬다.
순간적으로 이안의 몸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 속도를 이용해 이안은 계속 달렸다.
뒤에서 흑기사는 성큼성큼 쫓아왔다.
이안은 더더욱 속도를 냈다. 하지만 거리는 벌어지기는커녕, 조금씩 좁혀져 갔다.
그렇게 짧은 추격전 끝에 탁 트인 공간이 드러났다.
도시의 중앙 광장.
도시를 세웠다는 초대 아이벤의 영주 석상이 세워진 이곳에서 이안은 멈췄다.
하지만 흑기사는 멈추지 않았다.
‘나참. 이럴 때는 한번 멈춰주는 게 예의 아닌가.’
싸움의 무대가 변한 건 관심 없었다. 흑기사는 그저 이안을 죽이기 위해 맹렬히 달려들 뿐이다.
흑기사는 마지막 도약을 위해 땅을 밟았다. 그리고 그때.
놈이 밟은 땅이 움푹 내려앉았다.
“……!”
생각보다 깊다.
흑기사조차 예상하지 못했을 거다. 이런 곳에 함정이 있었을 줄이야.
하지만 흑기사는 흑기사다.
곧바로 땅을 박차 위로 튀어오르려 했다.
하지만…….
쿵!
어디선가 날아온 거대한 바위가 막 튀어 오르려던 흑기사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물론 부서지는 쪽은 바위였다.
하지만 잠깐 흑기사의 도약을 저지할 수는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이안이 호크를 소환해 위로 날려 보냈다.
공격 신호였다.
“모두 공격!”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들. 그 지붕 위에서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발리스타나 거대한 쇠뇌 따위를 들고 있었다.
도시의 정예병들은 명령을 받자마자 신속하게 움직였다.
화살 세례가 흑기사를 향해 날아들었다.
두두두두.
흑기사의 갑옷을 화살이 때렸다. 하지만 단단한 갑옷을 뚫지 못하고 맥없이 떨어졌다.
흑기사는 고개를 들었다.
상황이 언뜻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애초에 화살로 타격을 줄 수 있을 거라고 기대도 하지 않았다.
본체는 화살에 걸린 자루들. 더 정확히는 그 안에 들어있는 연금술 시약병이다.
차캉!
유리병 깨진 소리와 함께 그 안에 든 시약이 흘러나왔다.
공기에 닿으면 마치 접착제처럼 끈적해지고 굳어 버리는 그런 액체였다.
흑기사는 손가락으로 갑옷에 묻은 시약을 떨쳐내려 했다.
하지만 도리어 손가락에 시약이 묻어 버렸다. 손가락을 뒤로 빼자 떨어지지 않는 긴 실이 생겨났다.
흑기사는 이안을 쳐다보며 말했다. 조금 실망한 목소리로.
“결투가 아니었나?”
“뭐?”
의외의 말에 이안도 멍하니 반문했다.
그 와중에도 공격은 계속됐다.
환하게 빛나는 거대한 손바닥 하나가 흑기사를 눌렀다.
스텔이 부린 기적이다.
그 손바닥 위에 다른 사제들인 방출한 신성이 더해졌다.
아무리 흑기사라도 쉽사리 움직일 수 없는 압박감이었다.
그런 흑기사를 우마딜로의 나무줄기가 한차례 휘감고. 그 위에 마법사들이 부린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았다.
한 명에게 집중하기에는 과분할 정도의 온갖 신비들이 흑기사에게 집중되었다.
이안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좋아! 아무리 흑기사라도 이걸 버틸 수는 없어.’
덫을 놓고, 적을 유인하고, 훈련을 하고, 미리 합을 맞추고 한 모든 노력이 결실을 보였다.
흑기사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이 속박을 떨쳐내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것이다.
하지만 순수히 힘만으로는 떨쳐낼 수 없었다.
‘자랑하는 공격들도 지금 상태에서는 못 쓰겠지.’
검은 검광이 서린 대검을 휘두르거나, 갑옷 중앙의 입을 열거나.
완전히 속박된 지금은 불가능한 기술이었다.
이안은 옆을 보았다.
어느새 걸어온 에스테반이 옆에 섰다.
그의 검에는 새파랗게 검광이 서려 있었다.
“한 번에 끝내는 거예요. 알겠죠?”
“그래.”
“왜 그래요? 표정이 안 좋은데.”
“……아니. 이런 식으로 놈과 끝장을 볼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렇게 깔끔하게 처리하는 게 오히려 좋겠지.”
기사답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일까?
에스테반은 지금 이 방법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에스테반은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그저 차분한 얼굴로 흑기사를 향해 걸어갔다.
이안도 그 뒤를 따랐다.
이제 남은 건 간단하다.
흑기사가 속박된 지금.
검광을 두른 검으로 한 번에 베어내면 그만이다.
아무리 단단한 갑옷이라도 검광을 받아낼 수는 없다.
검광은 오로지 검광으로만 막아낼 수 있다.
에스테반의 검광은 그 어느 때보다 거친 기세로 흔들리고 있었다.
에스테반이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선언했다.
“흑기사. 네가 행한 죄업에 대한 대가를 이제 치를 시간이…….”
그리고 그때. 뒤쪽에서 들려온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에스테반의 말을 끊었다.
“끄아아아아악!”
흑기사에게 집중하던 아군을 눈만 슬쩍 돌려 뒤를 확인했다.
그리고 이내 커다래진 눈으로 아예 뒤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곳에 있는 건 괴수들이었다.
도시의 골목을 가득 메울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괴수들.
그리고 괴수들의 종류는 낯이 익었다.
“미로에 있어야 할 놈들이 왜 이곳에…….”
지하 미로에 갇혀 있어야 할 괴수들. 잠시 미로의 감시가 소홀해졌다 하나, 이렇게 대규모로 빠져나온 건 이상하다.
한 병사가 눈을 부릅뜨고 중얼거렸다.
“아니. 자세히 봐. 뭔가 좀 크지 않아?”
그 말대로였다.
괴수들은 미궁에서 봤던 것보다 1.5배 정도는 커다랬다.
동굴 트롤에 이르러서는 웬만한 건물 크기에 필적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안이 주목하는 건 다른 점이었다.
괴수들 사이에서 이질적인 존재가 하나 있었다.
황금빛 자수가 새겨진 검은색 로브를 깊이 눌러쓴 마법사.
마법사는 트롤의 어깨 위에 앉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후방에서 전투를 함께 지휘하던 영주가 그를 보며 소리쳤다.
“누구냐 넌! 정체를 밝혀라!”
하지만 마법사는 영주의 말을 무시하며, 자기 할 말만 내뱉었다.
“혹시나 싶어 와보길 잘했어. 자칫 잘못했다가는 소중한 전력을 잃을 뻔했잖아.”
“누구냐고 묻지 않나!”
“시끄러워. 나한테 소리치지 마. 곱게 죽고 싶으면.”
음산한 기운이 가득한 목소리에 영주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마법사는 로브를 젖혔다.
달빛 아래에 그 얼굴이 드러났다.
사나운 인상에 짧게 깎은 머리. 초점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흐릿한 회색 눈.
이 젊은 마법사는 너무나 유명한 인물이었다.
누군가 중얼거렸다.
“테이오스…….”
황제의 최측근 중 하나이자 강력한 마법사. 또한 악마 숭배자인 테이오스의 등장에 좌중이 싸늘해졌다.
그리고 가장 놀란 건 이안이었다.
이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테이오스 저 새끼가 왜…… 환장하겠네.’
테이오스 역시 최후반부에 싸워야 할 적이다.
그런 테이오스를 흑기사와 동시에 상대해야 한다.
꿈에서도 상상하기 싫을 끔찍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