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91화 (192/222)

191. 방어전(7)

“야 밥맛. 뭐 재밌는 거 없냐?”

“……지금 나 말하는 거냐?”

“그래 병신아. 지금 여기에 너 말고 누가 있는데.”

“벼, 병신?”

달이 휘황하게 뜬 늦가을의 어느 밤이었다.

에스테반은 보름달만큼이나 땡그래진 눈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암청색 머리를 동그랗게 땋아올 린 주근깨 가득한 소녀였다.

소녀는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뭘 쳐다봐 인마.”

“……됐다.”

심히 불량스러운 어조에 에스테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국의 기사라기에는 너무나 품위 없는 모습이었지만 에스테반은 그러려니 했다.

그도 그럴 게. 저 여자는 평민이 아닌가?

고양이에게 물갈퀴가 없고 물고기에는 날개가 없는 것처럼, 평민에게 예의와 교양이 없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적어도 에스테반은 그렇게 생각했다.

“너 지금 뭔가 재수 없는 생각하고 있지?”

“……시비 걸 거면 다른 사람에게 해라.”

“지금 다 자고 있고 주위에는 너밖에 없는데 다른 사람이 어딨어?”

“그럼 제대로 경계를 서라. 경계 소홀은 군법에서도 엄중히 처벌하는 항목이다.”

“하여간에 고지식한 새끼.”

소녀가 혀를 찼다.

사실, 혀를 차고 싶은 건 오히려 에스테반이었다.

감히 화이트가드의 장남에게 폭언을 퍼붓는 건 이해할 수 있다.

강철 기사단에서는 명목상이지만 신분을 따지지 않고, 이 둘은 동기였으니까.

‘그저 기사단의 명예가 이렇게까지 떨어진 게 마음이 아프구나.’

강철 기사단은 전통 있는 기사단이다. 한때 제국의 기사하면 강철 기사단이 우선 떠오를 정도로 유명했다.

하지만 기사단은 점점 쇠락해 이제는 그 이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정치적인 이유였다.

황궁의 정치 싸움 속에서 강철 기사단은 몇 번 줄을 잘못 섰고, 그 대가를 치렀다.

그리고 지금, 기사단은 3황자에게 마지막 기대를 걸고 있었다.

솔직히 에스테반이 보기에는 확률 낮은 도박이었다. 다른 형제들이 너무 유리한 위치에 있어, 레온 황자가 이기기 쉽지 않아 보였다.

‘나야 어차피 강철 기사단의 이름만 좀 누리다, 다시 가문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지만.’

그래도 에스테반은 내심 3황자를 응원했다.

직접 만나 본 그가 제법 괜찮은 사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하께서도 실수하시는군.’

저 건방진 소녀도 바로 황자가 데려온 이였다.

민생을 살피기 위해 몰래 도시로 나갔다가 우연히 뒷골목을 지나고 있었는데, 소녀가 몽둥이 하나를 들고 장정 다섯을 때려눕히는 광경을 직접 본 것이다.

그 날로 황자는 곧바로 소녀를 기사단으로 데려왔다.

비천한 출신, 여자, 게다가 검은색에 가까운 암청색 머리까지.

도무지 기사단에서 좋게 봐줄 만한 조건이 하나도 없었다.

당연히 반발이 거셌다.

하지만 소녀에게 검을 쥐여주고 휘둘러보게 시킨 순간.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소녀는 천재라는 걸.

누군가는 에스테반보다 더 뛰어난 재능이라고 쑥덕대기도 했다.

내색은 안 했지만 에스테반도 소녀의 재능을 인정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가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이 경지에 이른 것이었고. 소녀는 뒷골목에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으면서도 재능을 개화한 거였으니까.

가끔 그녀가 성장하는 모습은 감탄마저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다.

에스테반은 일부러 그녀를 피해왔다. 하지만 오늘, 운 나쁘게도 같이 경계를 서게 되어 버렸다.

‘무시하면 금방 지쳐서 관심을 끄겠지.’

에스테반은 고집스럽게 앞을 쳐다 봤다. 절대 옆을 보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소녀는 개의치 않았다.

“넌 그렇게 살면 재밌냐?”

“…….”

“그냥 엄마 아빠가 정한 대로. 남들이 시키는 대로 사는 게 재밌어? 엉? 남자가 말이야. 기사가 됐으면 꿈이 있어야지.”

다른 건 참아도 뒷골목에서 소매치기나 하던 여자에게 인생 훈수를 드는 건 견딜 수 없었다.

참다못한 에스테반이 쏘아붙였다.

“그러는 너는 얼마나 대단한 꿈을 가지고 있는데 그리 잘난 척이냐.”

“오! 드디어 표정 바꿨다. 너도 화를 낼 줄 아는구나? 감정 없는 인형이나 그런 건 줄 알았지.”

에스테반은 서둘러 표정을 되돌렸다. 하지만 소녀는 이미 원하는 걸 봐서 만족한다는 듯.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에스테반은 그 미소가 조금 예쁘다고 생각했다.

‘내가 미쳤지…… 보름달을 보면 미쳐 버릴 수도 있다는 게 사실이었군.’

에스테반은 고개를 세차게 저어 머릿속 생각을 흩어 버렸다.

그런 에스테반을 의아하게 보던 소녀가 품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내밀었다.

어찌나 많이 읽었는지, 종이가 다 헤져 있었다.

“자. 이거 받아. 이 누님의 꿈이 실린 책이다.”

에스테반은 책을 받아 그 제목을 확인하고는 중얼거렸다.

“기사 소설?”

세간에 유행하는 통속 소설이었다.

방랑 기사가 대륙을 돌며 악인과 괴물을 무찌르고 사람들을 구해내는. 그런 흔하디흔한 책이었다.

에스테반과는 별로 연이 없는 종류의 책이었다. 그의 동생이 몰래 보다가 아버지한테 걸려서 크게 혼나는 모습을 본 정도?

“이건 왜…….”

“다 읽어. 그 안에 진짜 기사가 뭔지 들어있으니까 그걸 읽으면 너 같은 샌님도 조금 느끼는 게 있겠지.”

에스테반은 거절할까 고민했다. 솔직히 말해 별로 읽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읽지 않으면 소녀는 계속 그를 귀찮게 할 것 같았다.

결국, 에스테반은 근무가 끝나면 책을 읽어보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둘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큰일이다.

갑작스러운 테이오스의 등장에 모두가 떠올린 생각이다.

가장 먼저 충격에서 헤어나온 건 의외로 에스테반이었다.

혀를 찬 에스테반은 땅을 박찼다.

상황이 어그러지기 전에 흑기사를 처리할 속셈이었다.

그제야 이안도 에스테반의 뒤를 따라 달렸다.

“어딜!”

테이오스가 손을 한번 휘젓자 주위 괴수들의 눈동자에서 초록색 기운이 빠져나왔다.

생명력.

테이오스는 생명력을 뭉쳐 화살 모양으로 만든 뒤, 손을 한 번 더 휘저어 화살을 날렸다.

화살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날아갔다. 화살 끝이 향한 곳에 있는 건 스텔.

지붕 위에 서 있는 스텔에게는 그녀를 호위하기 위한 기사가 둘 있었다.

“저희가 막겠습니다!”

두 기사는 두꺼운 방패를 들고 용감히 외쳤다. 하지만 스텔은 고개를 저었다.

방패 따위로 막을 수 없는 일격이었다.

순간 기적을 부려 흑기사를 억누르는 와중, 주위에 방벽을 쳤다.

이안이 일러준 과제를 수행한 게 결실을 본 셈이다.

화아아악.

방벽과 화살이 부딪쳤다. 화살은 입자가 되어 퍼져나갔고, 이내 다시 방벽으로 모여들어 달라붙었다.

드득. 드득.

커다란 아가리의 형상으로 변한 화살은 방벽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 힘이 강해 스텔은 얼굴을 찌푸렸다.

이대로면 깨져 버릴 것 같았다.

스텔은 신성을 더 쏟아부어 장벽을 강화했다.

테이오스가 날린 화살은 결국 스텔의 장벽을 뚫지 못했다.

하지만 장벽에 투자하느라 흑기사를 얽매던 압력이 느슨해졌다.

흑기사의 투구 속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놈은 폭발적인 힘으로 자신을 압박하는 힘들을 끊어냈다.

연금술 시약. 냉기 마법. 사제들의 신성력까지.

그 모든 걸 단순히 힘만으로 이겨낸 뒤, 땅을 박차려 했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에스테반이 놈에게 쇄도한 순간이었다.

“받아라!”

새파랗게 검광이 서린 에스테반의 검이 횡으로 휘둘러졌다.

정확하고 깔끔하게 목을 베는 궤적이다.

아무리 흑기사라도 머리가 잘리면 치명상일 터.

흑기사는 땅을 박차는 대신 고개를 있는 힘껏 젖혔다.

에스테반도 중간에 손목을 꺾어 집요하게 흑기사의 목을 노렸다.

하지만 흑기사의 움직임에 완전히 따라갈 수는 없었다.

샤악!

에스테반의 검은 흑기사의 목이 아닌 투구의 윗 상단을 갈랐다.

마치 피를 흘리듯, 검은 기운이 깨진 투구에서 검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그 틈에서 거죽이 뼈에 상접한 노인의 얼굴이 보였다.

주름이 너무 심해 흉한 걸 넘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이안은 놀랐다.

‘당연히 안에도 비어있을 줄 알았는데.’

저 괴물에게 인간의 부분이 남아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놀람과는 별개로 이안은 멈추지 않았고, 에스테반의 뒤를 이어 검을 내질렀다.

흑기사는 팔을 내뻗었다.

검광이 서린 성검은 흑기사의 팔뚝 부분을 깊게 베었다.

유효타였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경악할 만한 움직임으로 두 공격을 받아낸 흑기사가 높이 뛰어올랐다.

이안과 에스테반도 동시에 뛰어올라 검을 내질렀다.

흑기사는 대검을 들었고, 비로소 자유로워진 몸으로 반격을 시작했다.

제대로 싸움의 시작이었다.

“어떡하지?”

“이, 일단 뒤쪽부터 막아야 해!”

“괴수들이 온다!”

진을 이루고 있는 아군들은 잠시 갈등하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더는 그들이 이안과 에스테반을 돕기 힘들 것 같기 때문이었다.

뒤에서는 테이오스가 괴수의 군단을 이끌고 다가오고 있었다.

저 괴수들도 위협적이지만 더 두려운 건 바로 테이오스다.

테이오스는 자기 마법을 늘 꽁꽁 숨겼고, 그래서 그가 어떻게 싸우는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플로라는 냉정하게 테이오스의 마법을 분석했다.

“괴수들을 조종하는 마법은 아마 정신계열이고. 괴수들을 변이해 강화하는 마법에 아까 그건 생명력을 뽑아 쓰는 마법인가? 하나같이 악취가 진동하는 마법들이잖아. 왜 숨겼는지 알 것 같아.”

저런 종류의 마법은 악마의 그것과 굉장히 비슷하다.

마음속에 악마를 품고 있든, 아니면 악마에게 힘을 받았든. 악마와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있다는 증거였다.

‘내가 막아야 해.’

황제의 최측근일 정도의 실력자다.

이곳에 있는 사람 중에 막을 수 있는 건 플로라와 동료들 정도.

우마딜로가 힘껏 뛰어 플로라의 옆에 안착했다.

그의 허리춤에는 스텔이 짐짝처럼 들려 있었다.

“저 사악한 마법사를 우리가 죽여야 한다.”

플로라는 뒤쪽을 흘끗 쳐다보았다.

에스테반과 이안은 맹렬하게 흑기사를 몰아붙였다. 심지어 흑기사에게 부상까지 입혔다.

하지만 놈은 밀리지 않으며 접전을 펼치고 있었다.

워낙 빠른 싸움이라 제대로 보이진 않지만, 이안이 엄청난 위험 속에서 싸워나가고 있는 건 잘 보였다.

‘이안이 목숨 걸고 싸우고 있어. 저 마법사만큼은 반드시 막아내야 해.’

강한 상대일 터지만 플로라의 옆에는 스텔과 우마딜로가 있다.

옆에 동료들이 있으니 마음이 이렇데 든든할 수가 없었다.

코르디스에서도 추종자는 있었지, 친구는 없었던 플로라에게는 참으로 간질간질한 기분이었다.

“괴수들이 온다. 어떻게 할 건가?”

괴수들은 이쪽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그 수가 어찌나 많은지, 도시의 골목이 괴수들로 가득 찰 정도였다.

플로라를 코웃음을 쳤다.

“흥. 나한테 맡겨.”

그 말과 동시에 플로라의 발바닥 아래에서 불길이 퍼져나갔다.

자그마하던 불길은 이내 파도가 되어 밀려 들어오던 괴수들을 덮쳤다.

괴수들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불타올랐다.

하지만 불길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괴수들을 연료 삼아 들불처럼 번져나갔고, 마침내 테이오스에게까지 도달했다.

테이오스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휙 내저었다. 그것만으로도 플로라의 불길은 너무나 쉽게 꺼져버렸다.

“피에람의 여식도 여기 있었을 줄은 몰랐군. 좋은 제물이 되겠어.”

테이오스는 끈적한 눈으로 플로라를 살폈다.

여길 오길 진심으로 잘했다고 생각하는 눈빛이었다.

그 눈에 자기나 흑기사가 패배할 거라는 의심은 없었다.

자존심 강한 플로라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속 분노를 다스리며 플로라가 말했다.

“오랜만에 실력 좀 발휘하죠? 다들 몸이 근질근질했을 텐데.”

“바라던 바다.”

“……응.”

저 뒤에 이안이 격전을 벌이고 있다.

어서 마법사를 쓰러트리고, 이안을 도울 생각으로 동료들은 의욕이 솟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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