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 합류(3)
레아의 존재는 크다.
여전히 많은 제국의 세력들이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아무리 황제의 행보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제국을 배신하는 일에는 거부감이 컸던 것이다.
하지만 이쪽에 레아가 있다면 얘기가 다르다.
현 황제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오히려 이쪽이야말로 제국의 적법한 통치자라는 명분을 내세울 수 있다.
교단과 이안 역시 이쪽의 편인 데다, 황제는 악마와 연이 있다는 추문이 퍼져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중립을 지키는 세력도 앞다투어 이쪽에 합류할 것이다.
“우선 돌아가서 상의해보겠습니다. 하지만 전하께서는 분명 긍정적으로 생각하실 겁니다. 그 누구보다 정의를 중시하는 분이시니.”
회의에서 가장 먼저 일어선 건 텔 왕국의 외교관이었다.
그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늘어놓으며 상의해보겠다고 했지만, 이미 그의 표정만 봐도 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쪽에 붙기로 한 것이다.
그를 시작으로 다른 영주들도 연달아 일어나 레아와 이안에게 예를 표한 뒤, 회의장을 나섰다.
‘이 사람들을 시작으로 다른 세력들도 모여들겠지.’
일단 균형이 깨졌다고 생각되면 사람들은 우르르 몰려들 것이다.
패배하는 쪽에 서고 싶지는 않을 테니.
오히려 로드릭은 다른 부분이 걱정이었다.
“갑자기 황제가 전쟁을 멈출까 오히려 그게 더 걱정이군.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이쪽이 더 승산이 높지 않나?”
만약 황제가 전쟁을 포기한다면 이쪽의 입장도 조금 애매해진다.
그런 로드릭의 고민에 이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전쟁이 일어나길 바라야 한다니. 꽤 아이러니하네요.”
“……나도 이런 내가 싫군. 일단은 지켜보는 게 좋겠네.”
그런 로드릭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
올해 겨울은 유독 길었다.
원래라면 이미 한참 전에 따스한 봄이 오고도 남았을 시기이건만 주위는 여전히 싸늘했다.
농부들은 딱딱하게 얼어 있는 밭을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진즉에 씨를 뿌려야 하는데, 겨울이 길어져 농사 일정이 밀리고 있었다.
벌써부터 사람들은 올해는 흉작이 될 거라고 예측했다.
식량이 귀해질 걸 예측해 발 빠르게 곡식을 쟁여 놓는 상인들도 있었다.
불안과 걱정, 부정적인 분위기가 사람들 사이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런 와중에 황제가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했다.
대상은 텔 왕국과 왕국 연합.
사사로운 전쟁으로 대륙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제국의 권위를 무시했다는 게 그 이유다.
그와 동시에 반 황제파는 황제에게 맞서서 싸울 것을 공표했다.
레아가 직접 쓴 선언문이 교단을 통해 온 대륙에 퍼졌고, 주저하던 이들도 결심을 굳혀 힘을 보탰다.
제국과 그 외 대륙 전체의 전쟁이 성사된 것이다.
명백히 이쪽이 유리한 상황.
하지만 방심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만큼 황제와 제국의 힘이 강하다고 증거겠지.’
이안 일행은 피에람 영지의 외곽에 위치한 도시에 있었다.
이안은 썩 높지 않은 성벽 위에 앉아 저 멀리 평야에 자리 잡은 황제의 군대를 보았다.
한눈에 봐도 군기가 잡혀 있고 잘 훈련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명분이 부족한 전쟁이어도 흔들리지 않는 저 굳건함.
제국의 저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아깝네. 저게 다 나중에 내 아군인데.’
이번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그게 끝이 아니다.
황제와 전쟁 다음에는 악마의 군세가 대륙에 찾아온다.
그때 저 군사들은 악마를 함께 막아설 중요한 전력이 되어줄 것이다.
악마는 인간이라면 닥치는 대로 죽이니 싫어도 맞서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 전쟁이 중요하다.
‘그냥 이기는 데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최대한 빨리. 그리고 서로의 피해 없이 이겨야만 해요.’
문제는 그 방법이다.
이안은 분명 강해졌다.
동료인 플로라나 스텔 역시 싸움 하나하나의 판도를 바꿀 만큼 강하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큰 관점에서 보면 분명 한계는 있었다.
‘차라리 황궁에 찾아가 황제를 암살한다? 아니. 그건 너무 위험해. 황제가 약한 것도 아니고.’
생각이 어지럽게 이어지던 그때.
레아가 성벽 위로 올라와 이안의 곁에 다가섰다.
“복잡한 표정이네요. 무언가 고민이라도 있나요?”
이안은 상념을 털어내며 답했다.
“그냥요. 어떻게 하면 전쟁을 신속하고 깔끔하게 끝낼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의외로 불필요한 피를 흘리는 걸 선호하지 않는 부류였군요.”
“의외?”
잠시 멈칫한 이안이 한숨을 내쉰 이안은 진을 치고 있는 황제의 병사들을 가리켰다.
“웬만하면 죽이고 싶지 않아요.”
“적인데도요?”
레아가 조금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저 사람들도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기왕이면 살아 돌아가는 게 낫죠. 집에 가족도 있고 기다리는 사람도 있을 텐데.”
“제국의 병사가 되었다는 건 죽음을 각오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고요.”
“그래도 말이죠…….”
이안을 흘끔 본 레아가 지나가는 어조로 말했다.
“저는 가끔 이안이 굉장히 특이하다고 생각해요.”
“예?”
“처음 만났을 때 저에게 아무렇지 않게 다가온 것도 그렇고. 가끔 보여주는 사고방식도 그렇고. 뭐라고 해야 할까요? 마치 대륙 바깥에서 온 사람처럼 느껴진다 해야 할까요?”
레아의 날카로운 통찰력에 이안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대로 그는 이곳 출신이 아니니까.
레아가 덧붙였다.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생각이 다르다는 것. 오히려 그 점 때문에 신께서 이안을 선택하신 게 아닐까 생각이 드네요.”
레아가 맑게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을 멍하니 쳐다보던 이안은 생각했다.
‘지금 보니 웃는 모습이 이네스 님과 엄청 닮았네요.’
[…… 저랑 피가 이어져 있으니까요.]
이안이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자, 레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듣고 있어요 이안?”
“아, 예.”
“어쨌든.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이 없어요. 병사를 지휘한다거나 전체 형세를 아우르는 전략을 짠다거나 하는 건 저희 전문이 아니잖아요?”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로드릭은 이안에게 병사들을 내어주겠다 했지만 이안은 거절했다.
당장 동료들을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벅찬 데, 병사들까지 신경 쓰기는 힘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안이 할 수 있는 건 선봉에 서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하는 것.
그리고…….
“오라버니…… 황제의 곁에도 강한 인재들이 많이 있어요. 지휘관. 기사. 그리고 마법사까지. 수는 적어도 저쪽에도 신관은 있고요. 그런 사람들을 이안이 꺾는다면, 큰 도움이 되겠죠.”
“흠…… 지휘관이라.”
이안이 생각에 잠겨 들었다가, 이내 눈썹을 꿈틀였다.
레아는 그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고 물었다.
“뭔가 좋은 생각이라도 떠올랐나요?”
이안은 머뭇거렸다.
“떠오른 방법이 하나 있는데, 이걸 해도 될지 안 될지 고민이네요.”
이때 레아는 좀 더 신중했어야 했다.
하지만 아직 이안과 함께 다닌 시간이 적은 레아가 고민 없이 말했다.
“이안의 마음 가는 대로 하세요. 결국, 저 사람들을 최대한 살리고 싶은 올곧은 마음을 바탕으로 행동하는 거잖아요? 누가 뭐라 하겠어요?”
“흠. 역시 그렇죠?”
“예.”
“레아 님이 하라고 한 겁니다? 잘못돼도 전 몰라요?”
“……예?”
혹시 자기가 잘 못 들었나 싶어 레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레아는 이안에게 방금 한 말의 의미를 물어보려 했다.
하지만 이안은 이미 성벽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성 내를 빠르게 걷자 많은 이들이 이안을 알아보았다.
병사. 지휘관. 주민 할 거 없이 이안을 보며 환한 표정으로 다가와 어떻게든 손이라도 한번 잡아보려 했다.
솔직히 귀찮게 했지만…….
‘그래. 나를 프로 선수라고 생각하자. 팬이 나를 좋아해 주면 고마워해야 하는 일인 거지.’
스스로 그렇게 주문을 걸자, 그들의 관심이 귀찮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애초에 프로 선수를 목표했으며, 대중의 관심을 꿈에 그리던 이안이 아닌가?
이안은 다가오는 이들에게 진심 어린 미소를 그리며 하나하나 손을 잡아주었다.
그러면 몇몇 사람은 감격에 울먹였고, 대부분의 사람은 행복한 웃음을 터트렸다.
“영웅님. 우리 아들이 군에 입대했는데 살 수 있겠죠?”
“제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희가 이길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올해 농사가 참 걱정인데…….”
“힘내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은 이안을 신의 대리자쯤으로 보고 있었고, 그들이 가진 불안을 털어놓았다.
그 걱정에 성실히 답하며 용기를 북돋는 이안의 모습에 뒤따라오던 레아도 안심했다.
‘혹여나 이상한 일이라도 벌일 생각인가 걱정했는데. 이런 이안이 그럴 리 없죠.’
그렇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상대해준 이안은 한참 뒤에야 다시 걸음을 옮겼다.
향하는 곳은 지휘관들이 모두 모인 막사.
이안은 망설임 없이 막사로 들어갔고, 레아도 그 뒤를 따랐다.
지휘관들은 지도 위에 돌을 깎아 만든 말을 두고 전략을 회의하고 있었다.
“황제의 군대는 크게 세 갈래로 남하하고 있습니다.”
“아이벤 구릉에서는 이미 몇 차례 전투가 벌어졌더군.”
“이 앞에 집결한 적의 숫자가 벌써 1만을 넘어섭니다. 지원군이 더 오기 전에 저희가 먼저 공격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주위에서 다양한 정보들이 날아왔고.
지휘관들은 그 정보를 읽으며 머리를 쥐어 싸매고 있었다.
그러다 이안이 들어오자 그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참석해달라고 부탁해도 잘 오지 않던 이안이 아닌가.
이곳의 방위를 맡은 카돌 장군은 이안을 반갑게 맞이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혹시 뭔가 할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뇨. 잠시 나갔다 올 건데, 미리 얘기는 해놔야 할 것 같아서요.”
“예?”
외출 신고를 왜 이곳에 와서 한단 말인가?
어리둥절하게 쳐다보는 장군이었지만 용건을 마친 이안은 다시 막사를 나섰다.
뒤따라오던 레아는 막사에 들어서자마자 다시 밖으로 다시 나가야 했다.
그런 이안의 태도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낀 건가?
장군과 지휘관들도 서둘러 이안의 뒤를 따랐다.
밖으로 나서자 이안은 다른 동료들과 마주쳤다.
플로라가 이안에게 물었다.
“뭐야. 왜 거기서 나와?
“그럴 일이 좀 있어서. 스텔. 축복을 좀 걸어주겠어? 제일 효과가 센 놈으로.”
“……응.”
“뭐야. 어디 싸우러 가기라도 해?”
“아마도?”
이안의 애매한 대답에 플로라도 해괴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안은 신경 쓰지 않고, 몸에 축복이 차오르자마자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하는 곳은 성문이었다.
그것도 적들이 있는 방향의 성문.
그제야 무언가 불안함을 느낀 레아가 급하게 물었다.
“이안. 대체 무슨 일을 하려고 그러는 거예요!”
“윗사람들끼리 싸우는 데에 괜히 아랫사람들이 소모될 필요 없잖아요?”
“설마…….”
이안은 그 설마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적 진영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탁 트인 평야를 이안 홀로 걸어오자, 적들도 이내 이안을 발견했다.
병사들은 당황해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첩자인가? 그렇다기에는 너무 당당하다.
전향자인가? 그렇다면 왜 저렇게 여유 있게 다가오지?
차분히 걸어오는 이안에게 병사 중 하나가 활을 겨누며 외쳤다.
“머, 멈춰! 너 누구야! 왜 찾아왔어!”
이안은 병사에게 시선을 힐끗 줬다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이내 배에 힘을 주며 목소리를 토해냈다.
“여기서 가장 센 놈 나와―!”
이안의 목소리가 평야를 뒤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