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 전쟁
이안의 목소리가 어찌나 쩌렁쩌렁 울렸는지 황제의 군사들은 물론, 저 멀리 성안에 있는 주민들까지 그 외침 들을 수 있었다.
우렁찬 고함에 반사적으로 귀를 막은 병사가 얼빠진 얼굴로 다시 물었다.
“……예?”
“그러니까 여기서 가장 센 놈 나오라고.”
“그게 무슨…….”
병사들이 넋을 놓고 있던 그때. 호통과 함께 한 기사가 말을 몰아 이쪽으로 달려왔다.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소란을 피우는 것이냐!”
그대로 무기를 휘두를 듯이 달려들던 기사는 이안의 바로 앞에서 말을 멈추었다.
여유롭게 가만히 서 있는 이안을 보며 이상함을 느낀 것이다.
기사는 말에서 내리지 않은 채 이안에게 물었다.
“너는 누구냐. 누구길래 건방지게 홀로 찾아온 것이냐.”
“이안.”
“이안……?”
기사가 멈칫했다.
흔한 이름이었지만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이안은 단 한 명 밖에 없을 터.
기사가 조심히 물었다.
“혹시 내가 아는 그 이안이 맞으시오?”
“그 이안이 맞습니다.”
이안의 정체를 알아챈 황제의 병사들이 웅성거렸다.
현재 황제는 교단과 이안이 간악한 왕국들의 거짓에 속아,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아무리 황제라도, 흑기사를 쓰러트린 이안이 선택받은 영웅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던 탓이다.
황제가 할 수 있는 건 이안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계속해 퍼뜨려 그 이름에 계속 흠집을 내는 정도.
주로 공격하는 건 바로 이안의 외견이었는데 이는 실제로 큰 성과를 보였다.
검은 머리 검은 눈은 악마의 상징이었으니 말이다.
황제의 병사들은 이안을 선망보다는 의심 섞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판단이 안 서는 듯했다.
주위가 웅성거리자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혀를 찬 기사가 정중하게 말에서 내려 예를 표했다.
“백사자 기사단의 가롤 긱스입니다. 소문의 영웅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도 반갑습니다. 긱스 경.”
백사자 기사단은 나름 제국에서 이름을 날리는 기사단이다.
이안은 예를 갖춰 긱스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일단 저돌적으로 찾아왔지만, 이런 일은 역시 예의를 갖춰 얘기하는 게 겉으로 보기에 그럴싸한 법이었다.
묘한 눈으로 이안을 쳐다본 긱스가 물었다.
“이제 말씀해주십시오. 대체 무슨 연유로 홀로 이곳에 찾아온 겁니까? 아! 혹시 마음을 바꿔 황제 폐하와 함께 하시겠다면 언제라도 환영입니다”
희망을 담아 말하는 긱스에게 이안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저는 이제 와 편을 바꿀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저는 문득 생각했습니다.”
이안은 긱스가 아닌, 주위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이안은 모두가 들을 수 있게 거인의 힘을 담아 말했다.
“전쟁이란 참으로 비극적인 일입니다! 윗사람들의 정의, 명예, 이득을 위해 싸우는데 정작 죽어 나가는 건 언제나 가장 아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일선의 병사들. 불운하게 휘말린 도시의 주민들.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과부와 어린아이들까지.”
“네…….”
긱스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일장 연설을 늘어놓으니, 잘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지?’
대의를 위해 다소의 희생이 있다고 해서 무슨 상관인가.
병사들이 싸우다 죽는 건 명예로운 일이며, 그 유족들은 자랑스러워할 일이 아니던가.
“그래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굳이 아랫사람들이 무의미하게 피를 흘리는 대신. 윗사람들끼리 알아서 해결하면 좋은 거 아닌가 하는.”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것이오.”
“결투를 제안하겠습니다! 누구든 나와 검을 겨루세요! 몇 명이든 상관없습니다! 더 싸우겠다는 사람이 없을 때까지, 몇 번이든 싸워드리죠! 그리고 만약 내가 패한다면 깔끔히 저 성을 내어주겠습니다!”
눈을 부릅뜬 긱스가 물었다.
“만약 우리가 진다면……?”
“그때는 물러나 주셔야겠습니다. 제 명예를 걸고 약속은 반드시 지켜질 겁니다. 제국의 귀족과 기사들의 명예로움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왔습니다. 비록 지금은 적이지만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는 것도 잘 압니다. 그러니, 그대들도 약속을 지켜줄 거라 의심하지 않습니다.”
사위가 정적에 휩싸였다.
거인의 힘을 담은 목소리다.
이안을 뒤늦게 지원하기 위해 나오던 아군도.
멀뚱히 서로를 쳐다보는 황실의 병사들도.
그리고 저 뒤에 설치되어있는 막사에 있을 지휘관들도.
모두 이안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잠시 고요해졌던 분위기가 이전보다 훨씬 소란스러워졌다.
지휘관급 되는 인물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특히 힐끔 뒤돌아본 아군의 지휘관들은 거의 울 듯한 얼굴이었다.
그럴 만도 하다.
상의 없이 다짜고짜 성을 도박판에 올려 버렸으니.
[이안…….]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상의했다면 분명 반대했을 거라고요. 허락 맡는 것보다 용서받는 게 더 쉽다고 그러잖아요?’
[그 얘기를 했다가는 아군의 혈압이 올라 쓰러질 것 같으니, 조용히 있죠.]
반응은 적들도 비슷했다.
기사들끼리의 결투로 승패를 정하다니?
소규모 영지전이라면 몰라도, 이번처럼 걸린 게 많은 대규모 전쟁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문제는 거절할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긱스는 다급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안의 연설에 감명받은 병사들이 기대 어린 표정으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영웅이 아랫사람들을 위해 직접 명예를 걸고 결투를 신청했다. 여기서 거절하면 겁쟁이. 명예도 모르는 놈이라고 평생을 손가락질받을 터.’
이쪽에 접근할 때 다짜고짜 공격을 퍼부었어야 했다.
그러지 못하고 이안이 입을 여는 걸 허락한 이상 이미 선택지는 없는 셈이었다.
“어서 대답을 주시죠.”
이안이 재촉하자 긱스는 초조한 얼굴로 뒤를 보았다.
한창 회의가 진행 중인지 막사에서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주위에서 지켜보는 병사들의 시선이 따갑다.
마치 긱스에게 결정권이 있는 것 같은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어, 어떡하지.’
거절하는 게 옳다.
겨우 결투의 승패로 군대를 물리라니.
이 무슨 꿈같은 얘기인가?
하지만 그의 기사로서의 명예는 말했다.
이곳에서 싸워야 한다고.
차라리 패배하더라도, 역사책에는 영웅에 맞서 명예롭게 싸운 기사로 기록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도망친다?
이후에 어떤 조롱을 들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개인의 명예냐 아니면 군대의 승리냐.
긱스가 머리를 팽팽히 굴리던 그때.
막사에서 건장한 체격의 중년인이 걸어 나왔다.
잘 단련된 근육과 갑옷 대신 입은 두꺼운 가죽옷.
풍성한 회색 머리카락과 잘 갈무리된 눈빛.
전체적으로 사자를 연상시키는 사내였다.
사내는 부관을 데리고 이쪽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이안 앞에 서더니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백사자 기사단장인 로엘 스콜드라 한다. 지금은 일단 이곳의 병사들을 이끌고 있지.”
“이안입니다.”
이안은 스콜드의 손을 굳게 잡았다.
투박하고 억센 손이었다.
펜보다는 검이 어울리는 손.
이안은 마주 잡은 손에서 스콜드의 감정이 느낄 수 있었다.
강한 호승심.
스콜드는 지휘관보다는 전사라는 느낌이 더 강한 사내였다.
그리고 그는 이안을 영웅이 아닌 한 명의 전사로서 바라보고 있었다.
스콜드의 입에서 중저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까 한 말은 사실인가? 결투에서 패배한다면 성을 내어주겠다는 것?”
“사실입니다. 레아 님께서도 허락한 일입니다.”
은근슬쩍 레아의 이름을 팔자 스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 정도의 사내가 거짓말을 할 것 같지는 않군. 네가 이룬 검의 경지에 경의를 표하며, 네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스콜드의 진심 어린 말에 그의 부관과 기사들이 놀라워했다.
“그 엄격하신 스콜드 님께서 다른 누군가를 인정하다니…….”
“아니. 그보다 제안을 받아들이셨어!”
상황이 극적으로 돌아가자 모두가 흥분하기 시작했다.
손을 푼 스콜드가 기대 가득한 얼굴의 기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검을 휘두르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하군. 하지만 젊은이들의 기회를 빼앗아 갈 수는 없지. 먼저 와 결투를 벌일 자는 누구인가!”
만약, 이곳에서 영웅을 결투를 통해 무찌른다면 전설적인 명성을 떨치게 될 것이다.
명성에 목마른 젊은 기사들에게는 너무나 군침이 도는 기회.
스콜드의 외침에 가장 먼저 대답한 건 앞에 있던 긱스였다.
긱스는 말에서 내려 스콜드의 앞에 부복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좋다. 첫 번째 결투인 만큼, 부끄럽지 않게 싸우도록!”
“넵!”
스콜드가 눈짓을 하자 지휘관들은 병사들을 뒤로 물려 원형의 공터를 만들었다.
스콜드는 이어서 멀뚱히 거리를 두고 서 있는 아군에게 외쳤다.
“그대들도 무기를 놓고 이곳에 오라! 너희들도 무기를 내려놓아라!”
스콜드의 호통 한꺼번에 병사들은 일제히 검과 창을 후두둑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보고 망설이던 아군도 이내 무기를 내려놓고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진풍경이었다.
양측의 병사들이 무기 없이 함께 서다니.
긴장과 어이없음. 불안함과 기대가 섞인 분위기 속에서 결투 준비가 척척 진행되었다.
팔짱을 낀 이안은 여유롭게 그 모습을 구경했다.
“음. 역시 일을 좀 막무가내로 벌였나?”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마, 마, 만약 이곳에서 진다면…….”
옆에 있던 지휘관이 검게 죽은 얼굴로 손을 달달 떨었다.
“뭐. 이기면 되는 거잖아요. 그죠?”
“아니. 그. 하아…….”
차마 교단의 영웅을 향해 욕을 할 수도 없고.
지휘관들이 속으로 열불을 식힐 때, 이안의 동료들이 다가왔다.
당황한 레아가 물었다.
“이, 이안.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요. 다짜고짜 결투라니…….”
“아까 말했잖아요. 피해를 줄이기 위해 수를 생각했는데 해도 될지 안 될지 고민했다고. 그래도 레아 님께서 허락해주시고 응원해주셔서, 용기 내 올 수 있었어요.”
“네? 그게 그 얘기였나요? 그리고…… 일이 이렇게 된 게 제 탓?”
교묘하게 책임소재를 떠넘기는 이안을 보며 레아의 넋이 나갔다.
반면, 다른 동료들은 그러려니 했다.
“어쩐지 이상한 표정 짓고 있더라니. 이러려고 그런 거였어?”
“그래.”
“이번엔 좀 어처구니없긴 하네. 근데, 자신 있으니까 이렇게 나선 거지?”
이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이안이 패배하기 위해서는 군대 단위로 집중 공격을 하거나, 테이오스 정도의 인물은 데려와야 했다.
‘여기서 지휘관급 인물들만 꺾어 전력을 보존한다면, 무조건 이득이다. 더 좋은 건 지휘관들 역시 포섭하는 거겠지.’
이안은 검을 들고 공터의 중앙으로 나섰다.
긱스가 말에 타 기다리고 있었다.
이안이 맨몸으로 걸어 나오는 걸 보며 긱스가 물었다.
“……말은 없는 것이오?”
“예. 그쪽은 딱히 말을 타도 상관없어요.”
“그럴 수는 없소. 기사의 결투는 언제나 공정해야 하오.”
긱스는 말에서 내린 뒤 단창을 들었다.
아무래도 그의 주 무기는 검이 아닌 창인 듯했다.
대치하는 둘을 보며 스콜드가 외쳤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엄중히 지켜볼 것이다! 부디 명예롭고 후회 없는 싸움을 하도록!”
“넵!”
우렁차게 대답한 긱스가 자세를 잡으며 말했다.
“이미 알다시피 백사자 기사단의 가롤 긱스요.”
“이안입니다.”
이어지는 잠깐의 대치.
긱스는 이안을 보며 속으로 마른 침을 삼켰다.
‘대단한 실력이다. 자세에서 빈틈이 전혀 없다. 도저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솔직히 두렵다. 하지만 일격이라면…….’
시간을 끌수록. 생각이 많아질수록 두려움만 커질 뿐.
“하압!”
용기를 쥐어 짜낸 긱스는 외마디 기합과 함께 땅을 박찼다.
동시에 이안도 땅을 박차며, 둘의 신형이 교차했다.
“……!”
긱스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내렸다.
분명 자신의 목이 베였다 생각했는데,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그리고 잠시 뒤.
긱스의 단창에 실선이 생겨나더니, 여덟 조각으로 나뉘어 떨어졌다.
당황하는 긱스에게 이안이 물었다.
“이게 전부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