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 시가전(3)
쿠웅!
무언가가 터져나가는 굉음은 황궁에도 울려 퍼졌다.
황제는 잔에 든 포도주를 홀짝이며 창밖을 보았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마법들이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형형색색의 빛깔들이 화려하게 수놓았다.
황제의 뒤에 있던 오테르가 고개를 숙이며 보고했다.
“폐하께서 예상하신 대로 놈들이 곧 황궁에 다다를 것 같습니다.”
“그래. 생각보다 빠르군.”
“폐하…….”
오테르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저는 아직 폐하의 생각을 잘 모르겠습니다. 성벽에 의지해 황도를 방어했다면, 굳이 이런 위험과 피해를 감수하지 않아도 되었지 않습니까.”
황제는 잔을 들어 술을 홀짝이고는 말했다.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소. 이번 전쟁의 승패는 둘 중 하나요. 내가 죽거나. 이안 그놈이 죽거나. 적의 모든 군대를 깨트려도, 그놈이 살아 있으면 승리한 게 아니오. 이렇게 미끼를 던지고 끌어들이는 게 최선이오.”
이안은 강하다.
흑기사를 쓰러트린 순간부터 이쪽에서는 절대 이안을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이안을 일반적인 방법으로 처치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엄청난 희생이 필요할 것이다.
그나마 이런 식으로 그를 끌어들이는 게 가장 피해가 적고 확실한 방법이었다.
“다소 위험성은 있지만, 놈을 가둘 함정으로 황궁보다 더 적합한 곳이 어디 있겠소.”
“하오나…….”
“그만!”
오테르의 말을 테이오스가 신경질적으로 끊었다.
최근 바쁘게 움직인 탓에 얼굴이 핼쑥해진 테이오스가 차갑게 말했다.
“오테르. 지금 이미 화살은 쏘아졌다. 이제 와서 화살의 방향을 바꿀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 사실도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을 텐데?”
“흠. 흠흠.”
테이오스의 말대로였다. 오테르는 할 말을 잃고 민망함에 헛기침만 터트렸다.
그 모습을 알 수 없는 미소로 보던 황제가 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자자. 오늘만큼은 그대들도 싸우지 말고, 한 잔씩 하시오.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지 않소.”
“……폐하. 그런 말은 하지 마십시오.”
“어서 받으시오. 긴 세월 함께했는데, 생각해보니 즐겁게 잔 한번 나누지 못하지 않았소?”
눈치를 살피던 테이오스와 오테르는 황제에게서 잔을 받아들였다.
황제는 친히 그 둘에게 직접 포도주를 넘칠 정도로 따라 주었다.
황제가 담담히 말했다.
“그동안 나를 지탱해 주어서 고맙소 둘 다. 이 자리까지 온 건 모두 그대들 덕이오.”
“그렇게 말하니 꼭 작별이라도 하는 것 같잖습니까.”
“하하. 그렇게 들리시오?”
“……걱정 마십시오 폐하. 이안이든. 뭐든. 제가 그 목을 베어 폐하께 바치겠습니다.”
“이거 믿음직하군.”
셋은 유리잔을 부딪친 뒤 포도주를 음미했다.
이내 잔이 비고.
황제는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아무래도 손님께서 찾아오신 것 같소.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할 것 같군.”
“맡겨 주십시오.”
“……먼저 가보겠습니다.”
손에 든 유리잔을 떨어트린 둘은 이내 알현실을 떠났다.
그 등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황제는 자신의 옥좌로 가 앉았다.
옥좌의 옆에는 그의 검이 기대여 있었다.
황제는 검을 굳게 잡았다.
***
“닫혀 있어.”
굳게 닫힌 황궁의 성문 앞에서 플로라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황궁까지 열어줄 정도로 친절하지는 않나 보네.”
“어떡하지? 내가 부술까?”
황궁의 성문을 부수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는 플로라를 보며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힘을 아껴야지. 벽은 몰라도 문 정도는 이걸로 뚫을 수 있을 거야.”
이안은 태양의 활을 꺼낸 뒤, 호크를 소환했다.
호크가 흩뿌린 빛은 이내 빛의 화살이 되었고, 이안은 충전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충분하다 싶을 때쯤. 툭 하고 시위를 놓자 환한 섬광이 황궁의 성문을 두드렸다.
콰아아!
과연 제국의 성문은 단단했다. 성문은 섬광에 부딪히고도 한참을 더 버텼다.
하지만 결국, 섬광에 직격당한 부분이 녹아내리면서 커다란 구멍이 생겨났다.
요란하게 구멍 난 성문을 보며 플로라가 말을 더듬었다.
“이, 이렇게 대놓고 들어와도 되나 모르겠네.”
“어차피 경계하고 있을 거야. 몰래 잠입해봤자 금방 들켜.”
잠시 열이 식기를 기다린 이안 일행은 그대로 황궁으로 들어섰다.
황궁의 넓은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처럼 아름다운 풍경은 아니었다.
비가 내리는 정원에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이들이 잔뜩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안 일행이 들어오자 흉흉히 안광을 빛냈다.
그 기세만으로도 밖에서 마주쳤던 어중이떠중이랑은 다르다는 게 느껴졌다.
“……꼭 검은 로브만 골라 입는 이유가 있나.”
악마 숭배자들이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안과 동료들의 영혼을 취하고 싶어, 손이 근질거리는 게 눈에 보였다.
감출 수 없을 정도로 짙은 피 냄새와 짐승인지 사람인지 구분 못 할 저 광기.
참으로 악마숭배자 다웠다.
이안은 동료들에게 빠르게 설명했다.
“미리 얘기한 대로 이곳에서부터는 황궁까지 쉬지 않고 갈 거야. 이제부터 힘을 아끼지 말고. 우리 말고는 전부 적이니까, 마음껏 펑펑 터트려. 다들 알았지?”
“응.”
“알겠다.”
“알았어요.”
“……응.”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은 이안이 성검을 앞을 향해 겨눴다.
악마숭배자들도 자세를 잡으며 싸움을 준비했다.
‘시작은 가볍게.’
이안은 곧장 단검을 던져 손을 퍼렇게 물들이던 악마 숭배자의 심장에 박아 넣었다.
제법 실력이 있어 보이는 놈이었지만 죽음은 허무했다.
그리고 그걸 신호로 전투가 벌어졌다.
“일어나라―!”
약 십여 명의 악마 숭배자들이 손을 붙잡고 주문을 외자, 바닥이 꿈틀거리더니 시체들이 하나둘 일어섰다.
그 숫자만 족히 수천을 될 법한 어마어마한 대군.
레아가 당황했다.
“황궁 어디에 이 많은 시체들이!”
“아래를 잘 봐요. 이미 레아 님이 알던 황궁이 아니에요.”
“아.”
황궁의 땅은 거무스름하게 죽어 있었다.
악마 숭배자들이 이안 일행을 기다리며 변질시켜 놓은 것이다.
“자! 가서 마음껏 뜯어먹어라!”
“꺄아아악―!”
일어선 시체들은 동시에 고개를 젖혀 끔찍한 비명을 지르더니, 이쪽을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이안이 외쳤다.
“플로라!”
“맡겨둬!”
정신을 집중한 플로라가 땅을 한번 세게 밟자 불길이 원형을 퍼져나갔다.
플로라는 연속해서 발을 굴렀고, 그때마다 불길이 새로 퍼져 동심원을 그렸다.
첫 번째 불길에 시체 대부분이 타 버렸다. 그나마 강력한 개체도 두세 번째 불길에 모조리 타 없어졌다.
경이로울 정도의 마법 활용.
그 모습에 악마 숭배자들이 질린 사이. 이안이 외쳤다.
“가자!”
이안이 앞장서서 길을 뚫었다.
걸리는 상대가 있으면 괴수든 악마숭배자든 거침없이 베기 시작했다.
그런 이안을 악마숭배자들이 일제히 공격했다.
인간의 뼈와 힘줄로 이루어진 사슬이 사방에서 뻗어지고, 바닥에는 검은 가시가. 검게 물든 대지에서는 이따금 촉수같은 것이 뻗어와 이안을 후려치려 했다.
하지만 이안은 성검을 한 번.
단 한 번 가볍게 휘두르는 것으로 그 모든 공격을 파훼했다.
워낙 상대의 숫자가 많아 전부 막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안이 공격을 놓치면 스텔이 기적을 부려 방어했다.
“이거나 먹어!”
틈이 생기면 플로라는 불꽃의 파도를 일으켜 악마숭배자들을 휩쓸었다.
사람을 죽인다는 죄책감도 없었다.
일전에 인질 사건으로 악마숭배자는 사람으로 생각해줄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으니.
그녀가 한번 손짓하면 악마숭배자가 열 명씩 불타 죽었다.
우마딜로는 넝쿨을 이용해 그런 스텔과 플로라를 보호했다.
레아는 이안의 옆에서 검을 휘두르며, 황궁까지 가장 가까운 길을 안내했다.
모두가 자기 역할대로 한 몸처럼 나아가니 그 전진을 막을 수가 없었다.
상대하는 악마숭배자들은 크게 당황했다.
“뭐, 뭐야 이거.”
“이 많은 숫자로도 안 된다고?”
“수준 차이가 너무 나잖아…….”
그들이 애초에 예상했던 건 압도적인 수를 내세워 포위 후 일방적인 공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 반대였다.
포위는 불가했고, 일방적으로 공격을 당하는 쪽은 자신들이 아닌가?
게다가 문제는 또 있었다.
“잠깐! 왜 우리만 앞에 서 있는 거지? 너희들은 대체 뭘 하는데!”
“……우리는 원거리 공격이 주력이라서 그렇다.”
“내 알 바냐!”
여러 단체를 그러모은 탓일까.
이들은 같은 악마숭배자지만 협동심이 없었다.
이안의 영혼을 얻겠다는 목적만이 같을 뿐, 누구 하나 나서서 희생하려 하지 않았다.
덕분에 효율적인 협동 공격은 불가능. 심지어 자기들끼리 공격하며 내분을 일으키기도 했다.
‘역시. 게임 속 npc들이랑은 다르다 이건가.’
게임 속에서 악마숭배자들이 서로 싸우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악마숭배자들의 내분 덕분에 이안 일행은 훨씬 빠르게 황궁을 가로지를 수 있었다.
가끔 정신을 차린 악마숭배자들이 협공을 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플로라의 불꽃에 휩쓸려 나갔다.
그 과정을 몇 번 겪으니 눈에 보이는 게 없던 악마숭배자들도 주춤했다.
두려움을 모르던 그들이 이안 일행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그쯤에 이르러서는 더는 거칠 게 없었다.
파죽지세.
이안과 동료들은 거의 달리다시피 정원을 가로질렀다.
그렇게 해서 격전을 벌이길 한참.
마침내 황궁이 눈앞에 보였다.
‘좋아. 이제 황궁이다. 이제 저 입구에서…… 아.’
무언가 떠오른 이안이 급하게 멈춰 섰다.
따라 달려오던 플로라가 이안의 등에 얼굴을 부딪쳤다.
“악! 갑자기 멈춰서면 어떡해.”
“말해둘 게 있어서.”
“어?”
이안은 황궁을 가리켰다.
“저곳에는 테이오스나 기사단장,아니면 오테르가 있을 거야. 특히 대현자 오테르는 공간 마법의 달인. 어떤 마법적인 함정을 준비해뒀을지 몰라.”
이안은 동료들과 시선을 맞췄다.
“어쩌면 마법에 당해서 뿔뿔이 흩어질 수도 있어. 만약 그렇게 되면 다른 건 신경쓰지 말고 곧바로 황제가 있는 최상층으로 와. 알았지?”
“어? 어어. 근데 너무 괜한 걱정 아니야? 아무리 대현자라도…….”
“내 말 들어. 알았지?”
“으응.”
이안의 진지한 눈빛에 플로라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꼭 살아서 보자고. 어. 혹시 만약에 떨어진다면 말이야.”
“알았으니까 슬슬 이동하면 안 될까?”
“그래. 가자.”
이안은 다시 앞서나갔고, 동료들이 뒤따랐다.
웅장한 궁전의 입구에 다다른 이안은 마지막으로 한번 더 뒤를 돌아 동료들을 보았고.
이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이안의 발이 황궁의 대리석 바닥에 닿는 순간.
푸른 기운이 안개처럼 자욱하게 퍼져나와 그들의 몸을 감쌌다.
***
“으으. 여긴 어디야.”
플로라가 머리를 부여잡고 주위를 살폈다.
정신을 차리니 황궁 어딘가에 있는 넓은 홀에 전이해 있었다.
‘설마 진짜 이안 말대로 된 건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이안이 미리 일러둔 덕에 혼란에서 빠르게 벗어날 수 있었다.
플로라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 맞아. 어서 황제한테 가야 해.”
“그렇게는 안 되지.”
뒤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플로라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얼굴을 있는 대로 찡그렸다.
“너랑은 반드시 만날 거라 생각했다.”
“으으. 왜 하필 너야.”
질색하는 플로라를 향해 테이오스는 차갑게 미소지었다.
“마침 잘 됐어. 네놈을 죽여서 내 하수인으로 부리면, 도움이 많이 될 거야.”
“그래 뭐.”
플로라가 새침하게 고개를 치켜들며 말했다.
“할 수 있으면 해봐.”
***
같은 시각.
스텔은 흰 로브를 입은 노령의 마법사를 상대하고 있었다.
대현자라는 별명을 가진 마법사. 오테르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이거, 이야기는 많이 들었소. 실제로 보니 더 놀랍군. 어린 나이에 대단한 신성이오.”
“……응.”
“다른 때에 만났으면 분명 즐거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 텐데…… 미안하오. 이 뒤는 보내드릴 수 없소. 혹시라도 싸우고 싶지 않으면 말씀해주시오. 그럼 저도 가만히 있어드리리다.”
스텔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짧게. 의지를 담아 말했다.
“위로 가야 해.”
오테르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그럼 시작하시겠소?”
“……응.”
이내 신성과 마법이 어지럽게 얽히기 시작했다.
***
우마딜로는 손도끼를 굳게 쥔 채 건장한 체격의 사내를 쳐다보았다.
사내가 활짝 미소지으며 말했다.
“만나서 반갑다. 숲의 전사여. 나는 강철 기사단의 단장. 콜 베넨이라 한다. 그대의 이름은?”
“우마딜로.”
“힘이 느껴지는 멋진 이름이군.”
“너의 이름 역시 훌륭한 울림이다.”
기사단장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이렇게 마음에 드는 친구랑은 겨뤄보는 건 오랜만인데. 혹시 기사단에 관심 없나?”
“너는 말이 조금 많은 것 같다.”
“아. 그래. 미안하다. 전사라면 이걸로 대화하는 것이었지.”
기사단장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황제 폐하를 위하여.”
이내 그 검날이 환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