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 황궁
이안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옆에는 레아가 쓰러져 있었고 앞에는 계단이 있었다.
‘역시 게임대로 인가.’
게임에서 플레이어의 동료들은 오테르의 마법에 뿔뿔이 흩어진다. 그리고 각각 황제의 수하를 하나씩 상대해야 한다.
‘게임에서는 내가 동료들도 직접 조종해 전투를 치러야 하는데…… 지금은 동료들을 믿을 수밖에 없겠네요’
[그들은 강해요. 그러니 이안은 이안의 일만을 생각해요.]
고개를 끄덕인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굳이 계단 앞에 이안을 전이한 데에서 의도가 보였다.
이안은 기절한 레아를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세요.”
“으, 응. 여긴……?”
“오테르의 마법에 당했어요.”
레아가 얼떨떨하게 말했다.
“……정말 이안 말대로 되었군요. 그리고 이 계단은…… 황제가 있는 최상층으로 향하는 계단이에요.”
“기다리고 있겠다 이거겠죠. 허세를 부리는 건지, 그만큼 자신감이 있는 건지.”
툴툴거린 이안은 레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레아는 그 손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요?”
“우리랑 다른 곳으로 떨어진 것 같아요. 위로 올라오라고 얘기해뒀으니, 늦지 않게 찾아오겠죠.”
잠시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던 레아가 표정을 굳혔다.
동료들은 강했고, 지금은 다른 누구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이안은 계단 위를 가리켰다.
“우리도 가야겠죠? 아무래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으니.”
“예.”
두 사람은 조심히 계단을 올랐다. 창문으로는 이따금 굉음이 들려오거나, 마법이 발산하는 형형색색의 빛깔들이 흘러들어왔다.
아군과 적군. 모두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었다.
이 싸움을 끝내기 위해서라면 황제와 결판을 내야 했다.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것이다.
이안은 레아보다 한 계단 앞서나가며 운을 뗐다.
“괜찮다면 남는 시간에 얘기나 좀 하죠.”
“네.”
“황제에 대해 얘기를 좀 해주시겠어요? 전 아직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거든요.”
싸움에 앞서서 이안은 황제에 대해 최대한 많은 걸 알고 싶었다.
그리고 레아의 의지를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었다.
‘여전히 황제에 대해 미련이 있다면, 차라리 나 혼자 싸우는 게 나아.’
단도직입적인 이안의 말에 레아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시작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솔직히. 오라버니…… 황제가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
“그런가요?”
“어렸을 때는 그냥 따뜻한 사람이었어요. 똑똑하고, 부드럽고, 씩씩한 사람. 소탈하고, 황족이라기에는 많이 검소한 사람이기도 했어요.”
“그건 의외네요.”
이안은 과할 정도로 화려하게 입고 다니는 황제를 떠올렸다.
도무지 소탈함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갑자기 사람이 달라지다니. 뭔가 사건이라도 있었나요?”
“사건…… 은 모르겠고. 갑자기 황제가 달라진 날이 있어요. 그래요. 오늘처럼 이렇게 비가 내리던 날이었어요.”
레아는 걸음을 우뚝 멈췄다. 창밖에는 여전히 비가 쏟아져 내라고 있었다.
레아는 창문을 통해 먼 과거를 보았다.
“밤중에 황제가…… 오라버니가 찾아왔어요. 저는 굉장히 신났었어요. 오라버니를 향해 열심히 재잘거렸죠. 한참을 떠들던 저는 문득, 오라버니를 올려다보았어요. 어두운 밤이었지만 저는 알 수 있었어요. 오라버니가 아주 슬픈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걸.”
레아는 씁쓸하게 창문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었다.
아무 근심 없던 그 시절과 그 시절의 황제를.
“대체 오라버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날 이후 오라버니는 변했어요. 점점 자기 사람을 모았고, 독해졌어요. 나중에 아버지를 오라버니가 독살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믿지 않았지만…….”
레아가 시선을 돌려 이안과 눈을 마주쳤다.
“저도 황제에 대해서는 정확히는 몰라요. 하지만 그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벌이는 사람이에요. 그러니 절대 방심하면 안 됩니다.”
“명심할게요.”
이안은 레아의 이야기를 토대로 곰곰이 생각을 정리했다.
‘황제의 본성은 원래 지금과 같지 않았다. 레아의 말대로라면 말이지. 그런 사람이 흑기사를 다루고, 악마숭배자들과 손을 잡았다. 아무 이유 없이 그렇게 될 일은 없는데…….’
이안은 레아에게 다시 물었다.
“혹시 그날. 황제가 찾아온 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짐작 가는 게 없나요? 괴로울 수도 있지만, 기억을 되짚어주세요.”
“아뇨. 딱히 괴롭지는 않아요…… 하지만 저도 짐작 가는 바가 없어요. 도움이 못 돼서 죄송해요.”
“그런가요. 어쩔 수 없죠.”
황제에 대해 모르는 부분은 직접 부딪히는 수밖에.
이안은 성큼성큼 걸어 올랐다.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 싸움을 끝내야 했다.
계단도 금방 끝나 알현실의 문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이안의 팔을 레아가 붙잡았다.
“잠깐. 잠깐만요.”
“……?”
“아직 할 얘기가 남았어요. 제 사명에 관한 이야기에요. 지금껏 누구에게도 해본 적 없지만. 이안이라면. 그리고 지금이 아니면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 진지한 눈빛에 이안은 걸음을 멈췄다.
레아는 홀로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살던 사람이다.
코르디스에서 다가오는 이들을 모조리 쳐내고, 혼자서 외로이 검을 휘두르던 그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느낄 수 있다.
그런 레아가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가 찾아온 그 날 밤. 오라버니는 많은 얘기를 했어요. 어려서 잘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그 슬픈 표정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얘기라는 건 알고 있었죠. 오라버니는 긴 설명 끝에 제게 이렇게 말했어요.”
―레아.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사명이 있어.
―신께서는 너에게 검에 대한 천재적인 재능을 주셨어. 그리고 그만큼 위대하고 커다란 사명을 주셨어.
―언젠가 네 힘이 꼭 중히 쓰일 거야. 그러니 재능을 연마해. 죽을힘을 다해서. 이제 어린애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끝났어.
황제는 슬픈 얼굴로. 아직 어린 레아의 어깨를 붙잡고 그렇게 말했다.
늘 부드럽게 미소 짓던 황제가 그런 표정을 지은 건 처음이었다.
예삿일은 아닐 것이다. 어린 레아는 알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 공포는 절박함이 되어, 레아를 평생 얽매었다.
“오라버니가 말했던 제 힘이 중요하게 쓰일 거라는 것. 저는 당연히 악마 처단에 관한 얘기라고 짐작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잘 모르겠네요. 진짜로.”
레아는 고개를 푹 숙이며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안이 입을 열었다.
“이제 좀 알 것 같아요.”
“아. 오라버니에 대해…….”
“아뇨. 황제는 여전히 모르겠고. 레아 님에 대해서 좀 알 것 같아요.”
이안이 이어 말했다.
“레아 님은 여전히 황제의 그늘 아래에 있어요.”
레아의 행동은 결국 모두 황제로 인한 것이다.
온 인생에 걸쳐 그토록 검에 열중하던 것도 결국에는 황제의 말 때문.
심지어 갈등하다가 황궁을 떠나기로 한 것도, 그가 암살자를 보냈기 때문에 사실상 강제된 것이었다.
핵심을 찌르는 이안의 말에 레아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안의 말이 맞았으니까.
‘어쩌면 레아는 싸움에 참여시키지 않는 게 좋을 수도 있겠어요.’
여전히 레아는 황제에 대한 미련을 끊어내지 못했다.
만약 결정적인 상황에서 레아가 망설인다면. 단순히 이안과 레아가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런 계산을 하며 이안은 다시 계단을 올랐다.
마침내 최상층에 도착했다.
눈앞에 커다란 문이 보였다.
이안은 문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레아의 얘기를 듣고도 황제가 어떤 사람인지 당최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이제는…… 부딪혀 보는 수밖에요.’
이안은 알현실의 문을 힘껏 잡아당겼다. 커다란 문은 별 저항 없이 간단히 열렸다.
“환영한다. 이안. 그리고 동생아.”
권좌에 앉아 있는 황제는 그렇게 말했다.
***
콰아아아!
플로라의 불꽃과 테이오스의 마법이 허공에서 격돌했다.
붉은 화염과 녹색 기운이 어지럽게 얽히며,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 일렁였다.
그 기세는 호각이다.
플로라의 불꽃이 화력은 더 뛰어났지만 테이오스가 좀 더 노련했다.
테이오스는 마법을 사용하는 틈틈이 다른 마법을 사용해 플로라의 빈틈을 노렸다.
때문에 플로라는 온전히 눈앞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빨리 끝내야 하는데. 내가 도움을 주러 가야 해.’
싸움이 길어지자 마음은 점점 조급해졌다.
적지에 있다는 위기감이. 당장 동료들과 합류해야 한다는 초조함이 집중을 방해했다.
테이오스는 그 상태를 날카롭게 포착했다.
테이오스가 발산하던 마법에 순간적으로 힘을 불어넣었다.
화아악!
플로라의 불꽃을 테이오스의 마법이 순식간에 집어삼켜, 플로라를 타격했다.
“꺄악!”
플로라가 비명을 지르며 저 멀리 날아갔다.
만약 마지막 순간 반사적으로 불꽃을 몸에 두르지 않았다면, 치명상이 되었을 것이다.
비틀거리며 다시 일어나는 플로라를 향해 테이오스가 이죽거렸다.
“나도 참 어지간히도 우습게 보이나 보군. 싸우는 와중에 잡생각을 하니 말이야. 다른 동료 걱정이라도 했나?”
정곡을 찌르는 말에 플로라는 입을 다물었다.
그 알기 쉬운 반응에 테이오스가 비열한 웃음을 지었다.
‘네 마음의 틈이 보이는구나. 어디 한번, 흔들어볼까?’
테이오스가 그 간악한 혀를 놀렸다.
“하하. 솔직해서 좋군. 하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야. 왜인 줄 알아?”
“……왜인데.”
“다른 놈들은 이미 전투를 벌였다. 벌써 결과도 나왔지. 어떻게 됐을 것 같나?”
플로라의 이성이 말했다. 저 질문에 답해서는 안 된다고. 상대에게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플로라는 저도 모르게 물어보고 말았다.
“어떻게 됐는데?”
“죽었다. 전부. 처참하게.”
“그럴 리 없어!”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플로라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런 반응은 테이오스를 더 즐겁게 할 뿐이었다.
“이거, 놈들의 시체를 어떻게 사용할까 벌써 기대되는군. 마수와 합쳐서 다시 되살리는 것도 괜찮겠지. 특히 그 이안이란 놈의 시체는 유용하게 쓸 수…….”
이죽거리던 테이오스가 입을 다물었다.
플로라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네 말은 안 믿어. 이안이랑 다른 사람들이 질 리 없어.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 거야.”
플로라의 주위에 크고 작은 불덩이가 빠르게 생겨났다.
불덩이들은 서로 합쳐지거나 나뉘면서 빠르게 그 숫자를 불려 나갔다.
플로라의 주위가 불덩이로 가득 찼을 때. 돌연. 불덩이의 색깔이 변했다.
밝은 주황색에서 보기만 해도 섬뜩할 정도의 푸른색으로.
이전보다 명백히 뜨거워진 불꽃.
어마어마한 열기는 황궁의 바닥과 기둥마저 녹였다.
지금 플로라는 분노하고 있었다.
그리고 분노는 예로부터 화염 마법사들이 마법을 태우는 좋은 연료였다.
세 치 혀로 플로라를 흔들어 볼 속셈이었지만, 도리어 역효과만 발휘한 셈.
테이오스는 주춤했다.
예상보다 불꽃이 너무 뜨거웠다.
지옥의 용암도 이 정도로 뜨겁지는 않을 것이다.
‘설마 이 정도였다니…….’
하지만 자존심 강한 테이오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온 힘을 끌어모아 사방에 녹색 장막을 펼쳤다.
“어림없다―!”
이내 플로라가 손을 내밀자 하늘에 떠다니던 불덩이가 일제히 테이오스에게 향했다.
테이오스는 온 힘을 다해 마법을 펼쳤다.
불꽃과 녹색 장막이 이내 격돌하고, 거대한 폭발이 주위를 감쌌다.
콰아아앙!
너무나 뜨거운 열기와 강한 폭발에 주위가 무너져 내렸다.
어찌나 충격이 큰지, 황궁 전체가 흔들렸다.
플로라는 지극히 무표정한 표정으로 자신이 만들어낸 참상을 살폈다.
검은 연기가 사방에 퍼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흥.”
플로라는 코웃음을 친 뒤 걸음을 옮겼다. 굳이 시체를 확인하지는 않았다.
이런 불꽃을 정통으로 맞고 살아 있을 리 없으니.
플로라는 걸음을 서둘렀다.
“괜찮을 거야.”
그녀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동료들은 살아 있다. 이안은 살아 있다. 테이오스의 말은 거짓이다. 거짓이어야만 한다.
하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그녀는 기꺼이 이 황궁 전체를 불태울 것이다. 재조차 남기지 않고. 철저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