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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209화 (210/222)

209 황제

“환영한다. 이안. 그리고 동생아.”

황제는 마치 반가운 손님을 맞이하듯, 여상한 어조로 이안과 레아를 환영했다.

하지만 이안과 레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권좌에 앉아 있는 황제에게서 풍기는 분위기에 압도당하고 만 것이다.

새하얀 피부에 부드러운 눈매.

찰랑거리는 금발.

전체적으로 선이 고와 온화한 인상의 미남으로 보일 수도 있는 남자.

하지만 그의 눈동자.

형형히 빛나는 그의 눈동자가 분위기를 완전히 뒤바꾼다.

많은 걸 담고 기억했을 그 눈동자는 너무나 깊어, 과연 제국을 통치하는 군주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백성들에게 인기 있는 성군이자 수많은 정적을 물리치고 자리를 차지한 야심가.

그 생각을 읽을 수 없으며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내.

그리고 제국에서 순위를 다투는 검사.

그 사내가 지금, 이안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이안은 저도 모르게 성검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아직 황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이안이 내보내는 적의에도 황제는 그저 가만히 앉아 야릇한 얼굴을 했다.

도무지 읽어낼 수 없는 표정이었다.

어딘가 후련한 것도 같았고, 기쁜 것 같아 보이는 동시에 조금 슬퍼 보이기도 했다.

꽈릉!

창밖에 번개가 내리쳤다. 직후에 천둥이 주위를 뒤흔들었다.

제법 가까운 곳에 번개가 내린 모양이다.

자연스러운 번개일까?

아니면 마법사들이 물러낸 마법일까.

확신할 수 없었다.

어쨌건, 천둥소리는 황제의 분위기에 압도당하던 이안을 다시 일깨워주었다.

이안은 검을 들어 황제를 겨눴다.

“검을 들어. 괜히 여러 사람 피 흘리게 하는 것보다, 우리 둘이 결착을 내는 게 낫잖아?”

황제가 미소지었다.

“당돌하구나. 많이 건방져졌어. 코르디스에서 봤을 때는 가능성이 있긴 하나, 어수룩한 청년이었는데.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게 이런 건가?”

“그때의 내가 아니거든.”

이안이 여유롭게 받아치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많이 성장한 것 같구나. 오늘 싸움은 제법 땀을 빼야 할 것 같아.”

“……마치 자기가 반드시 이길 거라는 것처럼 들리는데?”

“네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게 맞는 것이겠지.”

황제는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로 턱을 괴며 말했다.

아직은 일어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냥 지금 달려들어서 콱 검을 휘둘러?’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일단은 황제의 장단에 맞춰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런 하찮은 기습이 통할 상대도 아니고.

그런 이안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황제가 물었다.

“일단 물어보마. 지금이라도 나와 함께할 생각은 없느냐? 너는 죽이기에는 너무 아까운 인재구나.”

진심.

황제는 진심으로 이안을 아까워하고 있었다.

이안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 목숨을 보전하길 바라고 있었다.

수많은 부하를 죽이고, 군사를 물리치고, 이렇게 코앞에 다가왔지만.

황제에게는 어떠한 적의도 보이지 않았다.

그 태도에 잠깐 주춤했지만 이안은 곧바로 답했다.

“내가 그걸 받아들이겠어?”

황제는 에스테반을 죽인 흑기사를. 그리고 이곳에 오며 숱하게 마주쳤던 악마숭배자들을 거느렸다.

악마숭배자들은 하나같이 망가진 이들이었다.

인간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괴물들.

어떤 이유에서건 황제가 그런 괴물들과 손을 잡은 이상, 이안이 황제와 함께할 일은 없었다.

“그래? 그거 아쉽구나. 너와 내가 함께라면, 많은 걸 할 수 있을 텐데.”

안타까움이 뚝뚝 묻어나오는 탄식에 이안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물었다.

“나도 하나 물어볼 게 있어.”

“무엇이든 물어보거라.”

“우리를 황궁으로 유인한 건 대충 이해가 가. 우리가 도망 다니면서 제국을 괴롭히면, 너도 손 쓸 방법이 없으니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나를 잡고 싶었던 거겠지.”

“정확한 추리구나. 훌륭해. 지금이 아니면 너를 죽일 수 없겠다고 판단했다. 기회를 주면 네가 반드시 부딪혀 올 거라는 것도 예상하기도 했고.”

황제의 칭찬에 얼굴을 잠시 찌푸린 이안이 다시 물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건 황궁에 설치된 마법이야. 오테르의 공간 마법으로 뿔뿔이 흩어놓은 거잖아?”

“맞다.”

“그게 이해가 안 가. 나 같으면 한 명씩 따로 떨어트려서 네 부하들을 상대하는 게 아니라, 떨어트린 뒤에 우르르 몰려가 각개격파하는 게 효율적일 것 같거든.”

만약 이 자리에 황제와 오테르, 테이오스, 기사단장이 함께 있고 이안이 혼자 전이해왔다면?

아무리 이안이라도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황제는 친절하게 동료들을 떨어트린 뒤, 측근들을 한 명씩 보냈다.

마치 이쪽 사정을 최대한 배려해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안의 의문을 곰곰이 곱씹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나도 신기하구나. 흩어진 너희의 동료들에게 내 측근들이 한 명씩 찾아갔다는 걸, 대체 어떻게 아는 것이냐? 마법을 부리는 것 같지는 않은데.”

“…….”

날카로운 지적에 이안은 입을 다물었다.

게임에서 봐서 알고 있다라고는 대답할 수 없었다.

옆에서 레아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그러고 보니 이안은 황궁에 들어오기 전에 미리 함정을 예상했었는데…….’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민하던 이안은 그냥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그냥. 아는 방법이 다 있어. 그 방법까지 내가 알려줘야 할 필요는 없잖아?”

“하하. 그건 그렇지. 다만, 내가 싸움에서 이긴다면 그 이유에 대해서 꼭 알려줘야겠다.”

“그러시든지. 그래서?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황제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며 답했다.

“기대하던 이 시간이 방해받길 원하지 않았으니까.”

황제는 검을 뽑았다.

제국에 대대로 내려져 오는 보검 ‘임페리얼 엣지’.

성검이 악마를 베는 무기라면 임페리얼 엣지는 사람을 베는 무기.

그 검날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베여 버릴 것 같은 날카로운 기세를 내뿜었다.

“그럼 슬슬 시작하자꾸나. 더 얘기를 나누고 싶지만, 아래의 싸움이 끝나면 방해를 받을 테니.”

“그래.”

이안도 검 끝을 황제에게 향한 채 무게중심을 단단히 했다.

이제부터 다른 말은 불필요.

오로지 검을 통해 승부를 가를 뿐이다.

이안과 황제는 곧바로 검을 들고 쏘아져 나가려 했지만…….

“잠깐!”

레아가 급하게 둘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어딘가 절박한 눈으로 황제에게 말했다.

“황제. 아니. 오라버니. 저에게는 하실 말씀 없으신가요?”

“……?”

그 간절한 눈빛을 유심히 살피던 황제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아직도 결심을 굳히지 못했구나. 이런 한심한 질문이나 하고 있고…… 실망이다. 레아.”

“……!”

“방해하지 말고 썩 꺼져라.”

레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황제가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

충격받은 레아에게 이안도 부드럽게 말했다.

“뒤쪽에서 마음을 추스르고 있어요.”

“저는…… 저도 도와야…….”

“일단 마음을 진정하세요. 지금 싸웠다가는 그냥 개죽음밖에 안 돼요. 아시겠죠?”

레아는 아직 황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상태다.

솔직히 말해, 이런 상태에서 함께 싸워봤자 짐밖에 되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레아도 멍하니 고개를 끄덕여 뒤로 물러났다.

‘아무래도 표정을 보니 오늘 안에 회복하긴 그른 것 같네요. 혼자 싸워야겠어요.’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다.

황제라는 거대한 적을 홀로 상대해야 한다.

하지만 황제는 언제고 넘어야 할 산이었다.

그 이후의 적을 물리치고,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황제 정도는 꺾어낼 수 있는 실력이 있어야 한다.

이안은 다시 자세를 잡고 집중력을 끌어 올렸다.

황제가 취한 자세와 팔과 다리의 아주 미세한 각도부터. 그의 자그마한 호흡과 심장 소리까지 포착하고 분석했다.

반면. 황제는 여유롭게 이쪽을 쳐다보기만 했다.

[분명 특별할 게 없는 자세에요. 하지만 이상하게 그 어떤 빈틈도 보이지 않아요. 이런 건 저와 상대의 실력이 아득하게 차이나거나…….]

‘상대에게 뭔가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거겠죠.’

전자일 가능성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이안은 이네스를 신뢰한다. 이네스가 가진 능력들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았다.

특히 검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이안이 엄청난 실력을 갖춘 지금도 이네스는 여전히 그보다 몇 수는 위였다.

아니. 그마저도 이네스가 모든 실력을 발휘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이네스보다 더 뛰어난 검사가 있을 확률은 없다.

‘분명 어떤 능력이 있는 것일 텐데…….’

결국, 그것도 부딪혀봐야 알 수 있는 것일 터.

이안은 생각을 멈추고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제부터는 온 신경을 전투에 쏟아야 할 때였다.

그렇게 둘은 서로를 조용히 바라보며, 잠시간 대치했다.

영겁과도 같은 잠시였다.

이안의 이마를 타고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어찌나 신경을 집중했던지, 턱 끝에 맺힌 물방울이 땅을 향해 추락하는 순간. 그 찰나의 순간이 영화처럼 느릿하게 재생되었다.

마치 누군가가 시간을 억지로 잡아 늘인듯한 기묘한 감각이었다.

땀방울이 점점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거의 지면에 닿았을 때쯤.

번개가 번쩍였다.

창문에서 흘러들어온 벼락 빛이 땀방울을 투과해 산란했다.

꽈릉! 뒤늦게 천둥이 울렸다. 벼락 빛을 담은 땀방울이 마침내 지면과 부딪혔다. 그리고 산산이 조각났다.

그게 신호였다.

이안이 땅을 세게 밟았다. 이안의 몸이 순간 흐릿해졌다.

황제가 다시 이안의 몸을 포착했을 때. 그는 어느새 황제에게 도달한 그는 성검을 내지르고 있었다.

마치 멈춰 버린 세상 속에서 이안만이 홀로 움직인듯한 기묘한 느낌.

그만큼 이안의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쐐액!

검이 지나가고, 한발 늦게 파공음이 울렸다.

섬뜩한 궤적을 그리는 일격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당황하지 않았다.

자세를 잡았고. 부드럽게 검을 올렸다.

카각!

수직으로 교차한 검과 검 사이에 불티가 튀었다.

황제는 그대로 검을 들어 성검의 궤적을 틀려고 했다.

그 의도를 읽은 이안은 빠르게 스텝을 밟아 옆으로 이동했다.

서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두 사람은 검을 맞댄 채 같은 자리를 빙빙 돌았다.

시간으로 치면 그 모든 과정이 이뤄진 건 찰나.

하지만 잠깐 검을 맞댄 그 찰나에서 이안은 많은 걸 알아차렸다.

‘힘과 속도는 오히려 내가 한 수 위야. 확실하지는 않지만, 기교에서도 딱히 밀리는 것 같지 않고.’

힘과 속도. 실력 모두 이안이 우세.

원래라면 이안이 조금씩 몰아붙여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정말 기묘한 일이지만, 주도권이 점점 황제 쪽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안은 처음에는 그 느낌을 착각이라 생각하고 무시하려 했다.

하지만 착각이라 생각했던 느낌은 사라지긴커녕, 점점 선명해져 갔다,

이안은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뒤로 훌쩍 뛰어 거리를 벌린 이안이 황제에게 물었다.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거야?”

황제는 여유롭게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전부 실력 차이인 거지. 그게 전부인가? 건방지게 말한 것 치고는 조금 실망이구나.”

비웃듯이 말하는 황제의 말에 이안이 이를 악물었다.

“그래. 어디 한번 제대로 해보자고.”

성검에 검광이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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