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황제(2)
쩡! 쩌정!
신성으로 이뤄진 손바닥이 오테르를 향해 휘둘러졌다.
오테르가 재빨리 마법을 읊었다.
푸른 입자가 오테르를 감싸더니, 이내 그의 몸이 몇 걸음 옆의 공간으로 이동시켜주었다.
벌써 몇 번이고 반복해왔던 공방에 오테르가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아주 강력한 일격이오. 하지만 이제 슬슬 알지 않소? 그 속도로는 날 잡을 수 없다는걸.”
“…….”
조금 짜증이 났는지, 스텔의 눈매가 미세하게 좁혀졌다.
오테르는 보기와 다르게 기동성을 이용한 속도전을 펼쳤다.
이곳저곳에 어지럽게 공간을 이동시키며 이동하다가 때때로 기습을 날리는 스타일.
스텔에게는 몹시 상대하기 까다로운 타입이었다.
그렇다면 오테르는 편하냐고 한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찌그러져라!”
오테르가 주먹을 오므리자 스텔 주위의 공간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공간 그 자체를 구겨 상대를 눌러 죽이는 마법.
하지만 오테르의 마법은 스텔이 만들어낸 방어벽을 끝내 부수지 못했다.
‘쯧. 금도 안 간다 이건가. 10년만 젊었어도…….’
애초에 공간 마법은 전투에 썩 적합한 마법이 아니었으며, 오테르도 전투 마법사보다는 학자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스텔의 방벽을 뚫을 만한 위력의 마법이 없었다.
단단하지만 둔한 스텔.
재빠르지만 힘이 부족한 오테르.
두 사람의 장단점이 맞물려 전투는 끝없는 평행선을 그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의미 없는 소모전만 계속 이어질 터.
그렇게 둘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감한 싸움을 계속하던 그때였다.
쿠구궁.
황궁이 흔들렸다.
스텔과 오테르는 동시에 위를 쳐다보았다.
분명 흔들림의 발원지는 위가 아니었다. 하지만 둘은 위를 보았다.
소중한 사람이 위에 있었으니까.
그 순간. 둘은 적이었지만 동질감을 느꼈다.
스텔은 오테르의 눈에서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와 비슷한 감정을 엿보았다.
그리고 오테르는 정확히 반대의 감정을 읽었다.
당황하던 오테르는 잠시 고민하더니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하아. 됐소. 무의미한 싸움은 그만두겠소.”
“……?”
당장에라도 스텔의 공격이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오테르는 차분히 말했다.
“방금 난 그대의 마음을 이해해버리고 말았소. 나와 다를 게 없다는 것을 말이오. 이해 한 상대와 싸우고 싶지 않소.”
“……응.”
잠시 갈등하던 스텔도 이내 경계를 풀었다.
스텔도 눈앞의 늙은 마법사와 딱히 싸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모습에 빙그레 미소 지은 오테르가 물었다.
“어떻소. 우리 둘 다 위에 있는 사람들이 걱정인 듯한데, 함께 가보지 않겠소?”
“응. 알았어.”
“의외로 시원시원한 아가씨였군. 내 손을 잡으시오. 위까지 모셔다드리리다.”
“응.”
스텔은 의심 없이 오테르가 내민 손을 잡았다.
푸른 입자가 두 사람을 감싸고, 이내 두 사람의 모습은 어디에도 남지 않았다.
***
탐색전은 끝.
이안은 새하얀 검광을 피워냈다.
그 모습을 본 황제 역시 검날에 검광을 덧씌웠다.
자신의 머리카락 색과 똑 닮은 황금색 검광. 레아의 검광과도 비슷한 빛깔이었지만, 이쪽이 몇배는 진했다.
게다가 그 검광은 어마어마한 출력을 선보였다.
검광은 곧 마음의 힘.
황제는 이안이 상대해왔던 그 어떤 적보다 강한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
‘검광은 호각인가.’
만약 흑기사에게서 힘을 얻지 못했다면, 밀리는 건 이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질 일은 없어. 이번엔 제대로 간다.’
이안은 빠르게 달렸다.
여러 전투 기술들을 개량해 자신의 것으로 만든 이안이다.
단순히 뛰는 동작에도 복잡한 원리가 깔려 있고, 정직하게 내지르는 검에도 속임수와 노림수가 몇 개나 섞여 있다.
검광이 서려 있는 만큼 일격 하나하나가 치명타가 될 터.
이안은 모든 역량을 끌어내 황제에게 부딪혔다.
그리고 승리를 자신했다.
‘어디 한번 막아봐라.’
설령 황제가 막는다해도 이미 그 뒤로 이어질 수들까지 모두 계산한 뒤였다.
그 모든 일격들을 정확하고 완벽하게 막아내지 못한다면 황제에게 승산은 없다.
이안은 황제를 향해 검을 곧게 뻗었다.
그리고 황제는…….
캉!
막았다.
캉!
막았다.
캉!
또 막았다. 이후에 이어지는 무자비한 연격도 황제는 모두 여유롭게 막아내었다.
정확하고 완벽하게.
흠잡을 데가 없는 수비였다.
상황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자 이안은 당황했다.
‘실력이 이 정도였다고?’
아까 검을 맞대었을 때. 이안은 이미 황제의 실력을 가늠했었다.
그의 계산상으로 황제는 절대 이 정도의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황제는 이안의 공격을 깔끔히 막아내고 있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점점 이쪽을 압박해오기 시작했다.
분명 이쪽이 더 강하고, 빠르고, 기술도 뛰어난데 점점 주도권이 넘어가는 기묘한 감각.
상식의 괴리.
수렁에 천천히 가라앉는 듯한 답답함.
하지만 숱한 싸움을 거쳐온 이안은 안다.
이럴 때 흥분해서 급하게 행동하면 그게 바로 황제가 원하는 바다.
이안은 초조함을 가라앉히고 마치 내가 아닌 남의 싸움을 보듯. 침착하게 싸움을 관조했다.
도대체 이 마법 같은 일이 어떻게 가능한 건가?
이안은 팽팽히 머리를 굴렸고, 황제는 그런 이안을 비웃듯이 외쳤다.
“하하하! 즐겁구나!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해. 한참 부족해! 더 분발해 보거라!”
마치 여력이 한참 남았다는 듯한 말투와 여유로운 몸놀림.
하지만 이안은 도리어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뭔가를 감추고 있어. 대체 무엇을?’
피가 차갑게 식었다. 이안은 한 층 더 집중력을 발휘했다.
과도한 사용으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지만 이안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한 가지 거슬리는 점을 알아챘다.
‘대응이 너무 빨라. 말이 안 될 정도로.’
이안이 검을 뻗음과 동시에 황제는 방어 동작을 취했다.
때문에 이안의 속도가 더 빨라도 밀리지 않았다.
단순히 생각하면 황제의 검에 대한 기예가 그 정도로 뛰어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고 직감이 속삭였다.
‘이건……!’
이 미묘한 감각을 곱씹던 이안이 눈을 번쩍 떴다.
알 것도 같았다.
황제가 부리는 기묘한 힘이 무엇인지.
그걸 확인하기 위해 이안은 고민 없이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검광이 흩날리는 공간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건 몹시도 위험한 일.
검광이 이안의 몸 이곳저곳을 훑고 지나갔다. 피가 튀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급소만 피하면 문제없었다.
이안은 그대로 황제를 향해 성검을 내지르는 척하다가 그대로 손을 놓았다.
지근거리에서 시도하는 투검술.
당황할 법도 하건만. 황제는 이번에도 완벽한 방어를 보여주었다.
다만. 검기가 서린 검을 쳐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경직된 그 틈을 타.
이안은 오른팔을 뻗었다.
그대로 급소를 노리는 궤적.
황제는 급하게 검을 회수했다.
어느새 이안의 손에는 검광이 서린 단검이 한 자루 들려 있었다.
이안은 연속해서 팔을 내뻗어 황제의 급소 세 곳을 찌르려 했다.
첫 일격은 아슬아슬하게 가슴을 스쳤다.
하지만 황제는 검신의 각도를 구부려 이어지는 일격을 모두 막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안의 어깨를 베기까지 했다.
회심의 일격이 실패했다.
하지만 이안은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후련해진 얼굴로 단검을 황제에게 던졌고, 황제가 단검을 쳐내는 틈을 타 성검을 잡고 뒤로 힘껏 물러났다.
황제는 잠시 숨을 고르며 말했다.
“후우. 방금 건 조금 매서웠다. 설마 바로 앞에서 검을 던질 생각을 할 줄이야. 단검은 또 어디서 난 거지?”
“이건 좀 특별한 물건이라서 말이야.”
이안은 활공하는 단검을 위로 던졌다가, 다시 손으로 받았다.
“그리고 나도 대충 네가 어떤 재주를 부리는지 알 것 같아.”
“흐음?”
말해보라는 듯한 황제의 표정에 이안은 검지로 눈을 가리켰다.
“미래를 읽거나. 내 생각을 읽거나. 둘 중 하나지?”
이안은 확신했다.
마지막에 이안이 손해를 감수하고 시험했던 일격.
이안이 주먹을 뻗었을 때, 황실에 내려오는 검술을 배운 이라면 당연히 팔을 들어 방어했을 것이다.
그게 가장 깔끔하고, 완벽한 수다.
심지어 황실의 검술은 근접박투 상황에서 격투술로 맞붙는 것을 피하지 않는다.
이네스와 레아와 검을 나누며, 주먹과 발차기를 교환하며 이미 확인한 사실이다.
하지만 황제는 팔로 막는 대신 굳이 번거롭게 검을 회수해 막아냈다.
이안이 마지막 순간. 숨겨뒀던 ‘활공하는 단검’을 손에 불러들여 휘두를 걸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걸 예측한다고? 이건 진짜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명령에 따라 날아오는 아티팩트. 활공하는 단검은 최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기 황제에게 단검에 대한 정보가 샜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건 검술의 경지로 예측할 만한 수는 아니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많지 않았다.
“솔직히 전자는 좀 터무니없는 것 같고. 후자가 맞으려나?”
황제가 흥미를 보였다.
“사람의 생각을 읽는 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비슷한 게 있어서.”
정신을 집중하자 이안의 눈이 빛났다. 황제의 영혼이 흐릿하게 보였다.
정확한 마음을 읽을 수 없지만, 대강의 감정 정도는 살필 수 있다.
황제의 감정 상태로 봤을 때…… 이안이 내놓은 추측은 정답이었다.
“그 짧은 틈에 내 능력을 짐작하고, 확인하기 위해 꾀를 내다니. 실로 훌륭하다 이안. 기꺼이 갈채를 보내마.”
황제는 천천히 손뼉을 치며 이안을 진심으로 칭찬했다.
“그래. 네 추측이 맞다. 나에게는 특별한 눈이 있다. 아마도 너와 같은 눈이겠지.”
황제의 눈동자가 이내 달빛처럼 은은하게 빚을 냈다.
이안과 비슷하지만 다르다.
황제의 것이 더 뛰어나다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저와 같은 월안이에요. 설마 그걸 황제가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이네스는 자식이 없었다.
피를 통해 재능이 전해져 내려올 일이 없다는 뜻이다.
때문에 이네스가 지닌 능력을 다른 이들이 지녔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신비란 상식만으로 설명하기 힘드니까요. 게다가 저건, 한눈에 봐도 제가 가진 것보다도 더 강력해요. 부자연스러울 뛰어난 능력이네요.]
이안도 긴장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능력을 파악했지만, 안심이 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긴장되었다.
그만큼 황제가 가진 능력은 예상 범위를 초월했다.
그런 이안의 마음이 전해진 것 일가. 황제는 그저 즐거워 보였다.
“네 뛰어난 기지에 대한 칭찬으로 정답을 알려주마. 사람의 생각을 읽거나 미래를 보거나 둘 중 하나라고 했지? 틀렸다. 나는 둘 다다.”
“……!”
황제가 눈가를 톡톡 두드렸다.
“나한테는 대강이지만 미래가 보인다. 내가 본 미래가 꼭 맞는 건 아니지만, 큰 흐름은 대부분 맞아 떨어지더군.”
“미래를…….”
“또한 나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 전부는 아니라도 다음에 어떻게 행동할지 정도는 대강 보이지. 이 두 가지를 적절히 조합하면 꽤나 전투에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지.”
힘도 이안이 우위. 속도와 기교도 우위.
그런데도 황제가 밀리지 않았던 건, 이안이 어떻게 행동할지를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
수를 알면 대처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래도 인정하마. 수를 전부 읽었는데도 네놈의 검을 받아내는 건 꽤나 버거운 일이었다. 대단한 실력이었다.”
언뜻, 칭찬하는 듯하던 황제가 이어서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겠느냐? 미래를 보는 나를 이길 수 있겠느냐?”
미간을 좁히고 잠시 고민에 빠져 있던 이안은 얼른 상념을 털어냈다.
바깥에서 무언가 터져가는 소리가 크게 들린 탓이다.
황궁 밖의 싸움도 무르익고 있었다. 병사들은 지금이라도 죽어 나가고 있을 터.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그래. 어디 한번 해보지 뭐.”
이제부터는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