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 황제(3)
“후욱. 후욱.”
우마딜로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만신창이였다. 몸 곳곳에 검상을 입어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신체 능력이 평범한 인간보다 뛰어난 숲의 종족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숨이 끊어졌을 것이다.
우마딜로는 상처를 부여잡고 자신을 이렇게 만든 원흉. 강철 기사단장을 고요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기사단장은 나무줄기에 온몸이 묶인 데다가 어깨 깊이 우마딜로의 손도끼가 박혀 있었다.
치명상.
승패가 결정 난 건 찰나였다.
기사단장은 승부수를 걸었지만 우마딜로는 그의 생각보다 더 빠르고, 튼튼했다.
숲의 종족을 상대해본 적이 없는 기사단장과 이안과 레아와 꾸준히 대련해 온 우마딜로.
삶과 죽음을 가르는 건 언제나 그런 사소한 격차인 법이다.
우마딜로가 입에서 핏물을 쏟아내는 기사단장과 눈을 맞췄다. 죽음이 기사단장에게 찾아오고 있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정신을 차리기 힘든지, 그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마구 흔들렸다.
우마딜로가 조용히 말했다.
“유언을 말해라. 들어주겠다.”
그 목소리를 들은 기사단장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는 마지막 여력을 쥐어짜 중얼거렸다.
“릴리. 에스테반. 생각보다 일찍 너희들이 곁으로 가는구나. 폐하. 도움이 되어드리지 못해 죄송…….”
목소리가 멎었다.
잠시 기다리던 우마딜로가 나무줄기에서 기사단장의 몸을 풀어 바닥에 눕혀준 뒤, 두 눈을 감겨주었다.
바닥에 떨어진 기사단장의 검도 그의 손에 쥐어 가슴에 올려주었다.
강한 전사에게는 그에 마땅한 경의를 표해주어야 한다.
분명, 승패가 반대였다면 기사단장도 우마딜로를 위해 이렇게 해주었을 것이다.
“후우우.”
우마딜로는 깊은숨을 내쉬며 위를 보았다. 지금쯤 이안도 힘든 싸움을 벌이고 있을 거라고, 그는 확신했다.
언제나 가장 어렵고, 위험한 싸움은 이안의 몫이었으니까.
우마딜로는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위로 가야 한다.
지금 이 몸 상태로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가야만 한다.
우마딜로는 상처 입은 몸을 질질 끌며 계단을 올랐다.
***
레아는 황제와 이안의 싸움을 숨 쉬는 것도 잊을 정도로 집중해서 보았다.
모든 게 충격이었다.
이안이 보여주는 검로도. 그리고 그 일격을 모조리 막아내는 황제도.
레아의 예상을 뛰어넘는 전투였다.
‘이안의 실력을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레아는 본인의 재능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그녀는 천재였으니까.
또래에는 그녀에게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그렇기에 이안을 처음 보았을 때는 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레아는 굳게 믿었다. 언젠가 이안을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착각이었다.
레아가 이안을 따라잡는 속도보다, 이안이 앞서나가는 속도가 더 빨랐다.
지금.
이안이 보여주는 검술은 레아가 꿈꿔오던 그런 경지에 거의 근접해 있었다.
짧은 사이에 보여주는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의 성장.
더욱 놀라운 건 황제가 그런 이안을 상대로 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황제는 이안의 모든 일격을 막았다. 그리고 선언했다.
자신은 미래와 사람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고.
‘무슨…….’
그건 또 다른 충격이었다.
그간 알고 있던 황제가, 사실은 레아의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그런 레아의 감정과는 별개로 싸움은 재개되었다.
검이 맞부딪혔고. 검광이 어우러졌다.
이안은 더는 속임수나 비장의 수 같은 건 쓰지 않았다.
그게 상대에게는 어떤 의미도 없다는 걸 알기에, 오로지 정공법으로. 정직하게 승부를 보기 시작했다.
‘잡기술은 필요 없어. 실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이안은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검을 휘두르면서 상대를 계속해 분석했다.
노리는 건 하나.
‘나도 상대의 움직임을 읽는다. 황제만큼은 아니어도 비슷하게는 가능할 거야.’
이안이 가진 월안은 황제만큼이 성능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안이 명백히 우위를 점하고 있는 요소.
검술.
그 검술에서 완벽히 황제를 압도한다면. 이안도 마찬가지로 황제의 수를 읽을 수 있다.
마치 미래를 엿보는 것처럼.
‘미래를 읽는 저놈을 상대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어.’
이안은 주위를 지우고 의식을 집중했다.
보이는 건 오직 황제와 나.
지금 이 순간.
이안의 모든 사고는 오로지 황제를 분석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황제는 웃으며 그런 이안을 압박해 들어왔다.
마치 이안이 무얼 하는지 눈치채고, 해볼 테면 해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온몸에 피가 빠르게 돌면서 머리가 뜨거워졌다.
하지만 이안은 생각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내 공격에 대한 상대의 간파. 그 간파에 대한 나의 예측. 또 그 예측에 대한 상대의 간파…….
격통이 머리를 두드리고 코에서는 코피를 끝없이 쏟으면서도 사고를 계속하던 어느 순간.
머릿속 무언가가 뚝! 하고 끊어지는 느낌과 함께 세상이 흑백으로 바뀌었다.
공간은 황제와 이안을 제외한 전부를 지워 버렸다.
이안은 이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언젠가 한 번, 발을 들였던 경지.
급속도로 감각이 확장되었다.
더없이 민감해진 이안이 감각은 황제의 모든 것들을 알려주었다.
그의 숨이 흐르는 방향.
이마에 맺히는 땀방울의 수.
머리칼이 일렁이는 모양.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정보가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이안의 머리는 그 정보들을 빠르게 분석했다.
그리고 보이기 시작했다.
이안을 향해 검을 내지르는 황제의 모습이.
실제가 아닌 허상이다. 이안의 두뇌가 만들어낸 미래의 황제.
하지만 이안은 안다.
이 허상이 수많은 정보를 토대로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이고, 아마 상대는 그렇게 행동하리라는 것을.
그 예측을 토대로 이안도 검로를 바꿨다.
하지만 황제는 호락호락하게 따라주지 않았다.
이안의 예측과는 다른 동작이 펼쳐졌다.
미래가 바뀐 것이다.
‘그래. 쉽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이안은 이를 악물고 더욱 머리를 혹사했다.
그러자 황제의 환영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미래를 예측해 이안이 공격하면 또 미래를 본 황제가 검로를 틀고.
그에 맞춰 또 예측하니 미래가 분화되는 것이다.
순식간에 황제의 수가 불어났다. 그에 맞서 검을 휘두르는 이안의 수도 늘어났다.
수백 명의 이안과 황제가 각각 다른 미래. 다른 경우의 수에서 검을 나누고 있었다.
살면서 느껴본 적 없는 기묘한 감각.
분명 시간은 동일하게 흐르지만, 이안은 마치 수백 번은 전투를 반복한 것 같은 피로를 느꼈다.
아니. 검만 맞대지 않았을 뿐, 실제로 싸운 것과 다름없었다.
수백 가지의 미래 속에서 이안은 몇 번이고 황제의 검에 찔리고, 베이고, 짓이겨졌다.
그럴 때마다 머릿속의 무언가가 끊어지는 느낌과 함께 탈력감이 찾아왔다.
이 피로를 황제 역시 느끼고 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순수하게 예측하는 것과 미래와 속마음을 엿보는 건 완전히 다른 것이니.
황제에게는 아직 여유가 있었고, 숨이 차오르는 건 이안 자신이었으니.
하지만 이안은 끈기를 가지고 포기하지 않았다.
터질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수백번 수천번의 미래를 예측했고…….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이거다.’
이 흑백의 세상에서. 선명하게 빛나는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단 하나의 길이.
이안은 검을 고쳐 쥐었다.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자세를 조금 바꾸었다.
그러자 수백 개로 나뉘어진 황제의 허상 중, 절반이 줄어들었다.
지금까지 보였던 건 허상은 전부 황제가 할 수 있는 경우의 수.
이 숫자가 줄었다는 건 황제가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 줄었다는 것.
이안은 눈에 보이는 길을 따라 자세를 바꾸고, 타이밍을 재며, 빠르게 치고 들어갔다.
더 날카롭게. 더 정교하게. 더 강하게.
그럴 때마다 눈에 보이는 미래의 숫자가 줄었다.
절반. 그다음에 또다시 절반.
이윽고 다른 모든 허상이 사라지고, 단 하나의 허상만이 남았다.
그리고 그게 의미하는 건 명확했다.
피하거나 막는 게 불가능한 필격의 수. 그 수에 마침내 이안이 도달한 것이다.
이안은 본 그대로 검을 뻗었다.
그제야 황제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미래와 속마음을 아무리 읽어도 대처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 움직이든 보이는 건 검에 베이는 것뿐.
“믿을 수…….”
후욱!
검광이 황제의 어깨를 훑고 지나갔다. 피가 솟았다. 황제의 오른팔이 아래로 추락했다.
탱그랑.
황제의 검이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그 소리를 신호로 이안은 흑백으로 된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동시에 이안의 눈과 귀, 코와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두뇌를 가혹하게 굴린 반동이 찾아온 것이다.
‘왜 흑백 세계로 보이는지 알 것 같아.’
너무 많은 정보들이 단기간에 머리로 파고들었다.
만약 그중에 색깔에 대한 정보까지 있었다면, 머리는 문자 그대로 터져 버렸을 것이다.
이안은 무너지려는 몸을 억지로 다잡으며 황제를 보았다.
황제는 멍하니 잘린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말이지. 대단해.”
고통에 겨워하거나 분해하는 일도 없이, 황제는 순수하게 감탄하고 있었다.
그는 피가 흐르든 말든 이안을 보며 말했다.
“미래를 보는데도 막아낼 수 없다니. 이 무슨 완벽한 공격이란 말인가. 아름답구나. 신께서 가장 공들여 만든 게 있다면, 방금의 그 검이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악마 숭배자와 붙어먹은 주제에 신이라니.
미친 사람처럼 계속해 중얼거리는 황제에게 이안이 삐딱하게 말했다.
“어디 머리라도 다쳤냐? 아니면 뭐 믿는 구석이라도 있어? 왜 이렇게 여유로워.”
“없다. 더는 내가 이길 수가 보이지 않는다.”
진심이었다.
황제에게는 어떤 적의도 보이지 않았다.
‘깔끔하게 승복하는 건가.’
그렇다면 다행이다.
지금 이안은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죽을 맛이었다.
만약 황제가 남은 한쪽 팔로 덤벼왔다면 꽤 곤란했을 것이다.
“흐흐. 하하하!”
바닥에 주저앉아 기둥에 등을 기댄 황제가 웃음을 터트렸다.
옷이 이미 피로 흥건해졌어도 황제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즐거워 보였다.
웬만하면 쉬고 싶었지만, 이안은 묻지 않고 배길 수가 없었다.
“뭐가 그렇게 좋은 거야. 같이 좀 웃자.”
“하하! 좋지 아니할 리가. 긴 시간 나는 이 순간을 몇 번이고 봐왔다. 팔이 잘리고. 숨이 끊어지는 미래를. 어렸을 때는 매일 밤 지독한 공포에 떨어야 했지. 하지만 막상 이 순간이 닥치니……. 두렵긴커녕 오히려 후련하기만 하다. 드디어 내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어.”
웃으며 말하던 황제는 돌연, 표정을 바꾸더니 레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레아 너에게는 정말 많이 실망했다.”
“……!”
레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동료가 위기에 빠져 있는데도 홀로 멀리서 발만 구르고 있다니. 대체 무엇을 위해 그토록 검을 열심히 수련해온 것이냐?”
“저는…….”
“됐다. 변명은 듣고 싶지 않구나. 쿨럭.”
“폐하!”
황제가 피를 토해내자 뒤쪽에서 비명에 가까운 고함이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오테르와 스텔이 함께 있었다.
이안은 이쪽으로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는 스텔에게 물었다.
“뭐야. 둘이 왜 같이 와.”
“…… 다쳤어?”
이안의 말을 무시한 스텔은 그대로 이안의 상처를 치유해주었다.
하지만 한계까지 쥐어짠 몸을 원래의 컨디션으로 되돌리려면 치유의 기적이 아닌 충분한 휴식이 필요했다.
이안은 스텔의 호의를 부드럽게 거저한 뒤, 황제를 보았다.
오테르가 황제의 몸을 부여잡고 절박하게 말했다.
“폐하! 조금만 참으십시오! 바로 가서 치료사를 불러오겠습니다!”
“잠깐. 우선 그걸 가져와 주시오.”
“…… 예? 하오나.”
“어서. 약속하지 않았소.”
굳건한 황제의 눈빛에 결국, 설득을 포기한 오테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몸이 푸른 입자에 휩싸여 사라졌다가, 이내 다시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투박한 검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이안이 말을 흐렸다.
“이건…….”
“받거라. 이게 필요하지 않느냐.”
성검의 마지막 조각.
이안이 물었다.
“이걸 어떻게?”
“말했다시피, 난 남들보다 많은 걸 볼 수 있다. 남들이 모르는 비밀도 알고 있지. 가령……. 네가 이곳과는 다른 세계에서 왔다거나.”
황제의 발언에 모두가 이안을 쳐다보았다.